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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상(3) (눅 1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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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지도자 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경건의 모델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실 때 그들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위선자들이요,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들이요,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절름발이요, 지식의 열쇠를 가졌으나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려는 재자들에게 모범적인 교사가 아니라 기피해야 할 대상들이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는 동안에 수만 명의 무리들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이 무리들 중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불신에 사로잡혀 표적을 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내면의 어두움이 경건한 겉모습에 가려져 있지만 그들의 어두움은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지도자들이 되어야 하는지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된 제자들이 악한 세상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며, 어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깨우쳐 주셨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심을 깨우쳐 주시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될 것을 호소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지도자들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요소가 무엇이며,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배우고, 진실하고 용기 있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진실한 지도자가 되라(1-3)

1절을 보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12절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물론 몰려든 많은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누룩이란 삽시간에 온 떡덩이를 부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룩을 본 사람 있습니까? 아마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요즘은 간식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50~60년대에는 간식이라 봐야 고구마 감자를 삶아 먹거나 찐빵을 쪄 먹을 정도였습니다. 찐빵을 찌려면 전날 밤에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반죽을 해서 뜨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놓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누룩이 온 반죽을 부풀게 해 놓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팥고물을 넣어 빵을 만들어 밥솥에다 찌면 찐빵이 됩니다. 어릴 때 신기한 것은 요만큼의 반죽이 그릇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누룩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성경에는 누룩이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고,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또 누룩은 그 영향력 때문에 사람들이 가르치는 교훈을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시니까 제자들이 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하신 줄로 깨달았다고 했습니다(마 16:11,12).

그런데 누가는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이라고 밝혔습니까? 바리새인의 누룩은 곧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외식(히포크리토스)은 연극배우들의 연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배우라는 말은 원래 가면을 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위선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을 할 때 배우들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 안동 탈춤과 같이 커다란 가면을 쓰고 연극을 했습니다. 가면을 쓰면 1인 2역, 3역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큰 이를 드러내 놓고 웃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 나와서 게르를 하면 청중들이 배꼽을 잡고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배우가 재빨리 무대 뒤로 달려가서 눈살을 찌푸린 슬픈 표정을 한 가면을 쓰고 나타나 슬픈 연기를 하면 청중들은 애도의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을 가리켜서 하이포크리토스(hyperitos), 즉 ‘가면을 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이 바로 배우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위선이라는 말은 배우가 하는 연기를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 곧 그들의 연기에 속지 말라는 말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면에는 두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지마는 가면을 쓴 사람은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는 온갖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선하고 착한 듯이 행동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으나 겉으로는 경건한 모습으로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드렸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겉모양만 보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그들의 인정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런 것이 외식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위선은 한 마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속이고 사람들 앞에서 사는 거짓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위선은 진리에 대한 악마의 경배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도 겉만 꾸미려는 바리새인의 요소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12제자들은 서로 높아지고자 했습니다(9:46). 누가 크냐고 하며 비교하며 경쟁했습니다. 높은 자리를 탐했습니다. 열두 사도와 70인 제자들 사이에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무리들이 수만 명씩이나 몰려들고, 복음 사업이 심히 번창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내용도 없이 ‘나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다. 칠십인 제자다’하고 폼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큰 지도자나 된 것처럼 뒷짐 집고 섬김만 받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조금씩 바리새인의 악영향을 받는 것을 보시고 영적인 위험을 느끼시고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런 외식을 경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대개 사람들은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금방 드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위선이 드러나게 됩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거짓된 신앙을 감춘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다 드러납니다.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드러나고, 골방에서 귓속말로 한 것까지도 지붕위에서 전파됩니다. 예수님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다 드러난 것처럼 우리들의 위선이 드러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이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다 드러났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거짓이 드러나니까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히 4:1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위선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은 바꾸어 말하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위선을 버리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정직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위선에 물들지 않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감추인 것, 숨은 것, 어두운데, 골방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들은 모두 사람들이 없는 은밀한 장소를 가리킵니다. 어두침침하고, 닫혀 있고, 감추어져 있고 숨어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의 삶이 다르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의 삶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선입니다. 거짓입니다. 밝은 데서 하는 말이 다르고, 어두운 데서 하는 말이 다르다면 그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공개적으로 하는 말이 다르고, 귀속 말로 하는 말이 다르다면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 말들이 언젠가는 광명한 데서 들리고 지붕 위에서 전파됩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 속담에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입으로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한다고 해도 마음에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하다면 언젠가 그의 속된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특히 어두운 데서, 골방에서 은밀히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가장 은밀히 나누는 대화가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어두운데서 말하는 그 말이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골방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혼자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어떤 마을에 한 창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면 항상 수도원의 종탑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있는 한 수도승은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창녀의 집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음에 타오르는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창녀의 몸을 탐하였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창녀는 천국에 갔고, 수도승은 지옥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마음에는 온갖 탐욕과 거짓과 음란이 가득하면서 외식으로 수도승노릇을 하던 그는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혼자 있을 때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영광 돌리는 사람은 외식에 빠지지 않습니다.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우리의 위선이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은밀한 가운데 행하는 우리의 신앙도 언젠가는 빛을 발하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마음의 골방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더불어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만이 외식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외도할 수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외식에 빠지게 됩니다. 외로울 때 기도하라. 기쁠 때 찬송하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토록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삶을 살 때, 때가 되면 풍성한 생명의 열매들을 맺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네델란드에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습니다.  “거짓이 아무리 빠르게 달음박질해도 결국 진실이 거짓을 앞지를 것이다”

II. 용기 있는 지도자가 되라(4-12)

4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저주를 선포하신 것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친구로 삼으셨습니다(요 15:14-15).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가짜 친구들은 어려울 때 등을 돌립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이제 큰 두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한 지도자가 되도록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첫째,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라(4-7)

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앞으로 제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리 심하게 제자들을 괴롭혀도 그 몸을 죽이는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육신을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영혼을 영원한 희락으로 돌아가게 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를 죽인 후에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당시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렸습니다. 앗사리온은 십분의 일 드라크마입니다. 그런데 두 앗사리온을 주면 네 마리아에다 덤으로 한 마리를 더 얹어 주었습니다. 이만큼 하찮은 미물까지도 하나님께서 다 기억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어떠하겠습니까? 7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특히 제자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자녀들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머리카락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대개 금발머리는 15만개정도라고 하고, 검은머리는 11만개로 추정합니다. 물론 대머리는 제외입니다. 그런데 하루에도 수백개의 머리털은 빠지고 새로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다 세고 계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그 택하신 자녀들을 귀히 여기십니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한숨과 눈물을 모르시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드리는 우리의 헌신을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서 힘쓰는 그 택하신 자들을 보호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분들을 붙들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핍박하는 자들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극렬히 타는 풀무불속에 던져 넣었지만 머리털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습니다(단 3:27). 또 다니엘은 믿음의 순결을 지키다가 사자 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음으로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았습니다(단 6:22).

이상에서 볼 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동시에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정말로 귀히 여기시는 사랑과 신뢰의 대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오,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이중적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자녀들이 아버지를 두려워하면서도 아버지 품에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옷깃을 여미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매달리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신앙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질 때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선생이나 교수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교수가 학점을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교수님한테 잘 보여야 좋은 점수를 따고, 대학원을 마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수님 눈치를 살피며 종처럼 살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수님이 A학점을 줄까요? 하나님이 A학점을 주실까요? 우리를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을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A학점을 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직장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공부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도 가정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며 여러분을 보호하고 계십니다. 이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라(8-9)

8,9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생활을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또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25%라고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신자들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이요 하고 시인하며 사는 사람은 5%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이심을 적극적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에 저를 시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며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눅 19:17)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결국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사랑으로 보호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날 세 번이나 주를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요, 그를 알지 못한다고 강경하게 부인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좋던 베드로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당장에 어떤 불이익이 자기에게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때로는 불이익을 당하기 싫어서 침묵하기도 합니다. 현실을 도피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히 옳고 그름을 밝혀야 하는데 우물주물 넘기기도 합니다.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분명히 도와주어야 하는데 귀찮아서 외면하기도 합니다. 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하는데 십자가를 회피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기에서 사람 앞에서는 바로 불신자들 앞에서를 가리킵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들 앞에서, 특히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는 말은 이처럼 불신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우리는 불신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학교에 가면 불신자 친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직장에 가면 믿지 않는 동료들 사이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시장에 가면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요.’라고 분명히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그래서 술을 안 마십니다.’라고 밝히면 그런대로 인정해줍니다. 옛날처럼 강제로 술을 먹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도 못하고 두려워서 벌벌 떨다보면 결국 주를 부인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은 한 마디로 말하면 언제 어디서는지 누구 앞에서든지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밝히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왕처럼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 믿으십니까?” “예수 믿으면 억수로 좋습니다.” “예수 믿느니 너무 너무 행복합니다. 예수 믿어 보세요.” “꼭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삶이 예수를 시인하는 삶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상관의 눈치 살피고, 우물주물하게 되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주님께서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셋째,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으라(10-12)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예수님의 증거를 듣고 거역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게 대해서는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거역하는 죄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도 귀신들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마 12:31).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의 역사를 사단의 역사로 고집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속 역사를 개인적으로 영접하도록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 책망하실 때 그 책망을 받아들이고, 불신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의 역사를 거역하면 회개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못하면 죄 사함을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도 없으니 당연히 구원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히 3:7,8a)

1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장차 어떤 어려움을 겪으리라고 하셨습니까?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사람이 저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서 심문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할 것을 염려치 말라고 하십니다. 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핍박 받는 제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할 말을 가르치십니다. 지혜를 주십니다. 합당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핍박 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굳게 의지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바리새인의 위선을 닮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투명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어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며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 우리를 모든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 때를 따라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님을 굳게 의지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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