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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움이 몰려올 때 (시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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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살면서 여러 가지 많은 종류의 두려움을 경험합니다. 음악실기시험을 치룰 때 우리는 긴장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했던 웅변대회에서도 우리는 많이 두려워했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할 때 우리는 입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이나 중요한 취직 시험을 치룰 때 우리는 두려움에 갇히고 맙니다.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고 나서 결과를 기다릴 때 우리는 초조합니다. 두려움 앞에 우리는 떱니다. 의사가 고개를 흔들며 결과를 말해 줄 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죽음이 점점 나를 향해 걸어오는 모습을 느낄 때 우리는 가장 큰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이런 작은 두려움에서부터 큰 두려움까지, 사소한 두려움에서부터 절실하고 현실적인 두려움까지 많은 두려움과 함께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지금 현재 당신은 어떤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까? 내일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직장을 옮기는 문제 때문에 생긴 두려움입니까? 내 가정에 찾아온 알 수 없는 고난이 남긴 두려움입니까? 내게 찾아온 질병 때문에, 병원에서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가족 때문에 내 안에 쌓여버린 두려움의 덩어리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두려워하고 있는데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나의 두려움을 알고 계실까요? 그 분이 나의 두려움을 알고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두려움의 뿌리가 되는 원인을 제거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내가 이 두려움 가운데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요?
  우리의 생각을 멈추어 봅시다. 하나님을 향해 “왜? 왜? 왜?”라고 질문하고 싶은 것이 많지만 우리는 고요히 서서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두려움이 내 영혼을 덮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2.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성화를 많이 봤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본 그림은 아마 큰 바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은 하늘을 향한 채, 고요히, 너무나도 평화롭게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 그림이 예수님의 일상적인 기도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십자가를 앞에 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그런 그림이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의 모습이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막 14:35) 기도하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내가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고 (마 26:37-38) 가르쳐 줍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눅 22:44) 말합니다. 이런 성경의 기록들은 예수님께서 한가하고 평화롭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지 않았음을 알려 줍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처절하게 기도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흙먼지가 일어나는 그 겟세마네 동산의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평화롭게 있지 못하고 경련을 일으키며 풀뿌리를 쥐어뜯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무나 힘이 들고 괴로워서 흐느끼며 일어났다 엎드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입에서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 날 밤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 십자가. 예수님은 주님의 뜻을 늘 물으며 그것을 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그 뜻을 물으면 물을수록 더 선명하게 보여 주셨던 그 십자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주며, 십자가의 마지막이 무엇을 남기는지 너무나 잘 알고 계셨던 주님이기에 십자가는 주님에게 너무나 짙고 무거운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우리 주님은 두려움과 고통 앞에서 솔직하셨습니다. 힘센 척, 안 그런 척 가면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두려움이 올 때 우리는 두렵지 않은 척 웃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두렵다고 말씀드리세요. 왜 내게 이런 두려움이 오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자세하게 말씀드리십시오. 직장 문제 때문에 어렵다고 말씀드리세요. 직장에서 내가 감당해야할 프로젝트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한다고 말씀드리세요. 내가 이런 병을 앓고 있고, 나의 가족이 이런 상황 속에서 병원에서 지내고 있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래서 나는 무섭다고, 나는 두렵다고, 나는 고통스럽고, 눈물이 난다고 말씀 드리세요. 우리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과 아픔과 고난과 절망을 물리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두려움과 아픔을 다 들어주실 만큼 여유로우신 분입니다.
  문제는 그 두려움 자체가 아니라 그 두려움이 왔을 때 내가 취한 행동에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내게 찾아왔을 때 가장 먼저 누가 생각났고, 누구를 찾았느냐에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의 두려움이 왔을 때 그 두려움을 가지고 아버지께 갔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다시 들어봅시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의 두 가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두려움을 아무런 여과 없이 아버지께 고백하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곧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두렵다고 말하면서도 그 두려움을 아버지께 맡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두렵다고 고백했지만 이길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두렵다는 고백을 맨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다 털어 놓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무엇인가에 의해 두려움을 가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가장 먼저 술집으로 달려가서 이 괴로움을 잊으려고 합니다. 카운셀러를 찾아가 상담을 먼저 요청합니다. 두려움을 없애주고 자신감을 키워주는 책을 삽니다. 나의 절친한 친구를 만나 내 사정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두려움을 고백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맨 처음에 들었던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다는 것을.... 이제 나는 이 두려움을 가장 먼저 누구에게 들려주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두려움의 고백을 가장 먼저 듣기 원하십니다. 

3. 오늘 다윗은 시편 23편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갔습니다. 그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알고 있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는 그의 영혼을 찢고 깨지게 했습니다. 그는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영혼에 가해지는 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는 사실 두려웠지만, 두려워하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눈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니라, 그에게 해를 끼치려고 찾아온 두려움의 실체가 아니라, 그를 덮고 있는 문제가 아니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였습니다. 그는 목자 되시는 주님께 자기의 눈을 고정했습니다. 그래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4.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아예 지나가지 않도로록 해주시면 될 것 아니냐?, 왜 하나님은 나에게 평탄한 길, 아무런 문제도 없는 곳으로 나를 인도해주시지 않는가?” 그러나 오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를 삥 둘러서 우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골짜기로 직접 통과하시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이기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사망조차도 ‘음침한 골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동안의 음침한 골짜기도 우리가 건널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미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오셨고 우리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은 단순히 그림자일 뿐입니다. 죽음의 실체는 주님이 다 담당해 주셨습니다.

5.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의 두려움에 몸서리칠 때조차도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에게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또 한 번 똑같은 말씀을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
그래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면서도 목자되신 주님을 바라보았기에 해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치가 떨리는 두려움 속에서도 아버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십자가를 치워버리지는 않았지만 주님 안에 있었던 두려움을 거두어가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바라보자”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그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오늘 내 안에 있는 두려움과 부끄러움과 슬픔이 변하여 기쁨과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6. 우리는 2006년의 새로운 해를 맞이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미국인 목사님에게 어떤 사람이 편지 한 통을 보내왔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지난 18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결혼해서 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많은 선천적인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의사는 “희망을 갖지 말라고, 오늘밤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왜 하나님이 저에게 1.6KG밖에 되지 않은 채 세 달이나 일찍 태어난 조산아, 그것도 왼쪽 다리는 허벅지까지만 있고, 오른손은 기형이고, 폐에도 손상이 있는 이 아이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발 지금 이 아기를 데려가지는 말아 주십시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셨습니다. 아기의 상태가 호전되어 몇 달 후에 퇴원을 했습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이런 저런 수술을 위해서 병원을 들락날락했습니다. 허벅지까지만 있는 아이의 왼쪽 다리가 자랄 때마다 뼈가 살을 뚫고 나와서 그것을 깎아야만 했습니다. 아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서 그 아버지는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저주하고 등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15년 동안 이 사람은 술에 절어 살았습니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술을 마셨습니다. 아침에 되면 자기의 손이 부러져 있고, 벽에 구멍이 난 것을 보고서 간밤의 일을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이 남자는 침대에 누운 채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남편이며 아버지인지를 생각하다가 총을 꺼내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라디오가 켜져 있었는데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한 번도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우리들을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별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에도 많이들은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그 한마디가 이 사람의 마음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그 말은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만약 당신이 나의 미래를 주장하신다면 내가 사탄의 손에 빠지기 전에 나를 이 비참한 삶에서 건져내어 뭔가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 남자의 아들은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의 동부지역 수학 경시대회에서 3등을 해서 주시사로부터 상장을 받고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전국 세계지리 경시대회에서 우승했고, 지금은 고 3인데 얼마나 많은 일들로 자신들을 놀라게 하는지 모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편지의 마지막에는 자신을 구원했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미래는 주님이 주장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미래도 주님이 주장하심을 믿습니까? 여러분의 미래도 주님이 주장하심을 믿습니까? 우리가 그 남자의 상황과 같은 지경을 만나서 기도했는데 어쩌면 하나님은 그 아이를 그냥 데려 가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에도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앞길이 막히는 듯해도, 내가 원하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도, 병중에 있는 나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취하신다고 해도 여러분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선하심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두렵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내 삶의 겟세마네 동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겟세마네 동산을 피하지 마십시오. 그 동산으로 들어가십시오. 다만 그 눈물의 겟세마네로 들어갈 때조차 나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그 동산에 머무는 동안에는 땅바닥을 쳐도 괜찮습니다. 눈물을 흘려도 좋습니다. 울부짖어도 좋습니다. 내 영혼에서 땀이 흘러 핏방울이 되더라도 나보다 더 앞서 피땀을 흘리신 그 분이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내 앞에 있는 산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재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 산을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 분에게 말씀드리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힘겨워하기 보다는 그 세상과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에게 여러분의 짐을 안겨주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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