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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시대를 위한 여성들 (삿 4:4~7, 롬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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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왕의 남자’가 인기랍니다. 여러 가지 인기몰이의 요인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현대인에게 관심이 많은 ‘크로스 섹슈얼’(Cross-sexsual)을 정밀하게 다루었다는 것입니다. 크로스 섹슈얼이란 외모를 여성처럼 꾸미는 남자를 말합니다. 극 중에서 공길이로 분한 이준기가 그래서 인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위버 섹슈얼’(uebersexual)도 흥미를 가집니다. 자신감과 지도력과 정렬과 너그러움이란 긍정적인 남성상을 갖추고 여성경멸과 문화적 소양 결핍 등 보통 남자의 약점을 극복한 남자를 말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 다니엘 헤니를 꼽습니다. ‘메트로 섹슈얼’(metrosexual)이란 말도 있습니다. 외모 꾸미기와 여가 생활에 많은 돈을 쓰는 도시 남자를 말하는데 권상우와 같은 인물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남자를 뜻하는 ‘레트로 섹슈얼’(retrosexual), 기존의 성 역할 및 관념에 반대되는 성향을 가진 여성을 뜻하는 콘트라 섹슈얼(contrasexual)등이 있습니다. 점점 남성은 여성화되고, 여성은 남성화되는 시대적 추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루밍 샵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그루밍이란 마부가 말을 관리한다는 말인데 자기 관리가 극대화되고 따라서 남성전용미용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부자리 정리하는 데는 10분, 밥 먹는 데는 10분, 세수하고 화장하는 데 2시간 걸리는 남자도 있다고 하네요. 참 이상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점점 남성화 되어 갑니다. 여성이지만 개성이 뚜렷한 여성을 좋아합니다. 확실한 직업을 가진 여성을 선호합니다. 나아가서 근육질의 여성을 흠모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조금은 혼란스러울 것 같은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더 중요한 것은 동반자의 시대라는 의식입니다. 종속보다 동반이 강조되고, 동역과 협력과 상호보충이 앞서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돕는 것도 일방적인 지원이 아니라 협력이 되어야 합니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과 공길이의 대사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시각장애인 놀이를 하다 말합니다. “나 여기 있고 자네 거기 있나?” “나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지.” “나는 여기 있고 자네가 거기 있잖나”.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 크레딧 장면엔 더 기막힌 대사가 나옵니다. “나 여깄고 너 거기 있지” “아니다. 내가 여기 있고 너 거깄다”, “나도 너도 여기 없다”, “아니다. 우리 다 여기 있다”. 이 대사는 나를 넘어서는 융합의 경지가 있습니다. 초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관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더 인기라고 합니다.

  로마서 16장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26명에게 문안을 보냅니다. 그 가운데 여성의 이름이 많이 나옵니다.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율리아, 올름바가 다 여성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동역자라고 하고, 수고 많이 한 자라고 합니다. 바울의 사역에 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여성입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혼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에게는 밀란의 교부 암브로스가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혼자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리도 서로를 동역자로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여전도회 주일에 다시 한번 동역자로서의 여성을 생각하고 만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첫째, 새 시대를 위하여 동역자의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로마서 16:3에는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브리스가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이 시대의 여성은 남성의 동역자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여성을 남성의 갈빗대로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남녀가 종속적 관계가 아니라 동질적 관계인 것을 의미합니다. 하와는 아담이 밖에 나갔다 올 때마다 아담의 갈비뼈를 세어 보았답니다. 혹시나 하나 더 뽑아서 또 만들었나 싶어서 그랬답니다. 한 번은 하와가 아담에게 “당신, 나 사랑해?”라고 했더니 아담은 “당신 말고 또 누가 있어?” 그랬다고 합니다. 에덴에서부터 사랑은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돕는 배필이란 종속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남편은 아내의 머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도 대표성이지 종속성이 아닙니다. 만일 돕는 이란 말이 종속적 개념이라면 시편 54:4에서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는 말은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종속된 자가 될 수 있습니까? 머리라는 말이 종속적 개념으로 해석해도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1:3에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종속적 관계일까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종속되었을까요? 이건 삼위일체 신학에 어긋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7에서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아내는 남편과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입니다. 함께 받는다는 것은 동반자이며 동역자란 말입니다.

  부부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남녀가 동반자의 성격입니다. 교회에서도 동반자이며 동역자로서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남성과 여성이 종속적인 관계가 아닌 동반자로서의 관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보충하여 하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세계화시대는 세계가 동반자입니다. 어느 한 쪽을 소외시키고 무엇을 할 수 없는 시대가 아닙니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고 협력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서로가 다른 쪽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 서로 질시하고, 평가 절하하는 자세는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사고가 아닙니다.
  보수는 진보를 필요로 합니다. 부자는 빈자를 필요로 합니다. 식자는 무식자를 필요로 합니다. 남성은 여성을 필요로 합니다. 노인은 어린이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인간적인 간격과 장벽을 모두 초월하여 동반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상생상극(相生相剋)이란 말이 있습니다. 원래 음양오행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오행의 순환은 상생합니다. 목(木)은 화(火)를 낳고, 화(火)는 토(土)를 낳고, 토(土)는 금(金)을 낳고, 금(金)은 수(水)를 낳고, 수(水)는 목(木)을 낳습니다. 이 오행은 상생하는 동시에 상극합니다. 수(水)는 화(火)와 상극하고, 화(火)는 금(金)과 상극하고, 금(金)은 목(木)과 상극하고, 목(木)은 토(土)와 상극하고, 토(土)는 수(水)와 상극합니다.

  인간의 장기의 간과 쓸개도 그렇습니다. 간과 쓸개는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역할이 전혀 다르지만 서로가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장기도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합니다.
  남녀는 서로 상극입니다. 그러나 상생합니다. 남자와 남자는 서로 같습니다. 그러나 남자와 남자가 하나 되면 안 됩니다. 여자와 여자는 절대 하나 되지 못합니다.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서로가 다른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어야 순리이고, 좋은 것입니다.

  미래사회는 남녀의 차별이 극소화 될 것입니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확대 될 것입니다. 전업주부가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직업여성이 많아지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커리어가 중요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남녀는 서로 극단화할 것이 아니라 서로 빈틈을 메우고, 서로 보충하고,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남녀의 차별은 없애야 하지만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들 각자는 서로를 위해 빈틈을 메우려고 이 세상에 부름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신 삼종지도’를 아십니까? “어려선 아비와 어미의 뜻을 함께 따르고, 시집가면 지아비를 가르쳐서 평등한 가정을 만들며, 지아비가 죽으면 아들에 연연하지 말며 나의 길을 간다”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역자요, 가정에서도 동역자입니다. 안과 밖의 개념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안 사람, 바깥양반이란 말이 이제는 어색하게 들립니다. 이제는 안 양반, 바깥사람이라고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여 장로님을 여섯 분을 세웠고 현재로 네 분의 여 장로를 가진 앞선 교회입니다. 교회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조화를 이루고 역할이 동역자의 역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교회를 위하여 많이 수고하여야 합니다.

  로마서 16:6에는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12절에는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많은 사람에게 문안하면서 수고한다는 말은 여성들에게만 쓰고 있습니다.

  수고는 문자적으로 손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수고란 사전적으로 일을 하는데 애를 쓰고 힘을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역시 손이 발달한 것은 여성입니다. 손이 고생하는 것도 남성보다 여성입니다. 우리 민족을 손이 발달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여성들, 한국 여성들의 손재주는 대단합니다.

  인간을 정의할 때 “손쓴 사람”(homo habilis)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손을 쓰므로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손은 중요한 인간의 신체입니다. 손이 쉬고 있을 때는 얼굴도 쉬고 있으며, 마음이 활발하면 손도 활발합니다. 손의 숙련은 두뇌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솜씨와 손재주가 비롯되는 곳도 바로 두뇌입니다. 손은 두뇌의 거울입니다. 손은 마음의 대행자입니다. 머리와 손은 짝을 이루어 일합니다.

  손을 많이 쓰면 머리도 좋아집니다. 부지런함은 우리의 고래의 미덕입니다. 특히 여성의 부지런함은 소중한 미덕입니다. 여성의 손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우리 민족의 여성들은 손이 발달한 여성입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지식은 없어도 지혜는 풍성했습니다.

  잠언 31;10 이하에 보시면 ‘현숙한 아내’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13절에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라고 합니다. 16절에는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라고 합니다. 19절에는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라고 합니다. 20절에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라고 합니다. 결론으로 31절에는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잠언의 제일 마지막 절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칭찬이 잠언의 결론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칭찬도 손으로 수고한 열매에 대한 칭찬입니다.

  여성은 굉장히 강합니다. 복제 동물이 모두 암컷인 것을 아시지요? 체세포에 전기자극을 가할 때에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이 때 생존력이 강한 여성 세포만이 착상이 된다고 합니다. 성경은 해산의 수고를 말합니다. 여성은 낳고 또 낳습니다. 아마 남성은 하나 낳고나면 죽어도 안 낳을 것입니다. 수고는 강한 자의 몫입니다.

  전도서 5:19에는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수고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수고할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헨리 포드는 “자신이 팬 장작을 때면 남이 팬 장작보다 두 배의 따뜻함을 느낀다”고 하였습니다. 수고하므로 얻는 행복입니다.

  잠언 10:6에는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는 길입니다. 잭 하일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라는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수고할 때에 주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므로 주님을 알아갑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을 보세요.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합니다. 여성들의 수고는 하나님께 기억이 됩니다. 우리 모두의 수고가 하나님께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한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결론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쉬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고 남자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없어보세요. 편할지는 모르지만 사는 맛이 없고 삭막할 것입니다. 여자 없이는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남성에게 여성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우리 남성과 그리고 여성에게 다시 확인되기를 바랍니다.

  여성 여러분, 남편에게 사라 되세요. 주님을 섬김에 마르다가 되세요. 주님의 말씀에 마리아가 되세요. 주님을 사랑하는데 막달라 마리아가 되세요. 남을 섬기는 데 다비다가 되세요. 기도에 한나가 되세요. 나라를 위한 일에 드보라가 되세요.

  그리고 포스트모던시대, 여성시대를 맞이하여 여성의 역할이 극대화되는 시대에 좋은 여성, 훌륭한 일꾼, 좋은 여전도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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