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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스러운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딛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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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92년 독일에서 <뉴렌버그 연대기(Nurenberg Chronicle)>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드디어 지구의 종말이 왔다는 내용의 책이었습니다. 성경을 예증하고 역사적인 사례를 들면서 지구의 종말이 1년 안에 온다는 예언이었습니다. 이 책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상당한 쇼크를 불러 일으켰다. 절망감을 안겨 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출판되고 넉 달이 지난 어느 날 스페인 리스본 항구에서 작은 범선이 출항하였습니다. 이 배는 대서양의 풍파와 싸우며 서쪽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였습니다. 뱃머리에는 한 사나이가 수평선을 지켜보고 서 있었습니다. 지구의 종말이 왔다고 모두가 절망과 공포에 싸여 있을 때, 이 사나이는 저 바다 끝에는 반드시 새 세계가 있고, 더 살기 좋은 땅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출항한지 한 달 후 그는 정말 새 땅을 발견하였습니다. 1492년 10월 12일이었습니다. 이 희망의 사나이는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였습니다. 그가 처음 본 새 땅은 쿠바 동북부에 있는 바하마 열도였습니다. 그는 이 섬 이름을 '산살바도르(San Salvador)' 곧 '구세주'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나에게 소망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용기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여기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소망으로 인내하며 소망 중에서 즐거워하되 복스러운 소망으로 인내 하는 달입니다.
  복스러운 소망은 영생의 소망입니다.

(딛1:2)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은 그리스도인이 도달 할 최종 종착지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될 천국의 삶을 말합니다.

옛날 애굽 사람은 사람이 죽으면 배를 타고 저 나라로 간다고 해서 유명한 왕릉 같은 데는 묘실 옆에 큰방을 만들어 놓고 배를 만들어 넣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으면 약을 발라 썩지 않게 하고 금자탑을 쌓아 놓고 영원히 보존하도록 힘을 썼던 것은 부활을 믿는 까닭이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람을 묻기 전에 시체의 입에다 돈을 한 입 넣어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강을 건너서 딴 세계에 간다는 사상 아래 뱃사공의 뱃삯을 주라고 하는 의미의 풍습이었습니다.

진시황이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며 동남 동녀 500 명을 보냈던 일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 였습니다.

한 무제가 승로반의 찬이슬을 받아먹기를 하였던 것도 영원히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플라톤이나 로마의 유명한 철학자 시세로 같은 이는 철학적 견지에서 영혼은 불멸하며 반드시 살아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극단의 유물론자 외에는 대체로 내세와 영생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왔을까요? 우리 인간 자체를 살펴볼 때 인간의 본성이 있으면 그 본성을 만족하게 하는 대상이 반드시 있습니다. 배고픈 본성이 있으면 먹을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듣고 싶은 본성이 있으면 소리가 있습니다. 보고픈 본성이 있으면 볼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본성에 대한 상대는 없을까요?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달이 있기에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바닷물이 올라오는 것은 달이 있는 증거입니다.

테니슨의 ‘인메모리아’에 있는 유명한 글귀와 같이 “사람은 그가 아주 죽으려고 지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이 생각이 어디서 왔습니까? 영생이 있는 까닭으로 인해 죽음의 세계에서 이런 생각이 일어난 것입니다.

A.D 124경 헬라에 살았던 아리스테테스라는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죽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당시의 헬라나 로마 사람들은 모두가 죽음에 대해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마치 혼인하러 가는 사람을 배웅하듯 감사 찬송으로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떠나보냅니다. 죽는 사람도 감사를 하고 다른 이들은 결혼식에서 에스코트를 하듯이 어디론가 호송해주었습니다.

  복스러운 소망은,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서 인내하는 모두가 됩시다.

  복스러운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골 1: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소망은 하늘에 대한 소망입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과 사랑의 삶을 산 결과 하늘에서 받게 될 영광스러운 보상 즉 하늘의 복에 관한 소망입니다.

  어느 수족 인디언 아기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아기는 아버지의 팔에 안겨 있었는데 그 언니인 어린 소녀가 아기 가까이 앉아 있다가 그 모습을 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우리 아기가 오늘 밤 하늘나라에 갈 것 같아요. 아기를 위해 기도해야겠어요."  이렇게 말한 후 소녀는 아버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작은 입술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밤 우리 아기가 하나님을 만나러 가요. 그러니까 하늘나라 문을 활짝 열어서 우리 아기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아멘."

초대교회 당시였습니다. 어떤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아들이 기독교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로마의 원형극장에 던져졌습니다. 잠시 뒤에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은 으르렁거리면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무섭게 달려드는 사자를 보고서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기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엄마! 무서워요!” 어머니는 아들의 몸을 꼭 안아 주면서 조용히 위로해 주었습니다. “얘야! 눈을 꼭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 올 것이란다! ”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을 받아 감옥에 끌려가면서도, 또 매를 맞으면서도, 심지어는 사자굴 속으로 던져지면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이는 저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는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삶에만 너무 치중하고 있지 않나 우려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의 복 된 영적 시야가 가리워져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식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인생은 길가는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잠시 거쳐 가는 곳이요, 우리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주를 인하여 당하는 핍박과 환난이 있더라도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주신 영원한 하늘나라가 있음을 생각하고 하늘나라의 복된 소망 중에 인내 합시다.

밴 다이크는 이런 유명하고 풍자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로마의 어떤 부자가 천국에 가서 천사의 안내를 받아 가며 천국의 여기  저기를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한곳에 와보니 참 아름다운 집이 있었습니다. 아주 근사하고 멋있는 집이었습니다. 이 부자가 깜짝 놀라면서 "도대체 이집이 누구 집이요." "그 집은 당신이 거느리고 있었던 당신 종의 집이오"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이 천국에서 이런 집을 소유 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가 이렇게 말하자 천사가 대답합니다. "천국에는 실수가 없습니다. 천국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그가 보낸 자료로 이 집을 지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다 보니 무척이나 날고 허술한 집이 한 채 보였습니다. 이 집 앞에서 깜짝놀라며 부자가 "도대체 이집은 누구 집이요?"라고 물었습니다. "당신 집이오"라고 천사가 대답하자 부자는 반문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 집이 내 집일 수 있습니까?" 천사가 다시 대답합니다. "천국은 오류도, 실수도, 착각도 없습니다. 이집은  당신이 보낸 그 자료로 지어진 집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물질은 어떤 일에,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가 살피며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준비하는 모두가 됩시다.

  복스러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는 재림의 소망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은 재림입니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시는 주의 재림이 복된 소망입니다.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이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히 6:18,19)합니다. 그러기에 영원하며(벧전1:4) 복된 소망(시146:5)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을 대신해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질병과 고통을 한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모든 죄와 저주를 다 청산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영광중에 계시며 다시 오실 때에도 천군 천사를 대동 하고 신적위엄을 가지시고 영광중에 오실 것입니다.

외국의 잡지에 이런 실화가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약혼자를 잃은 여인이 전사 통지서를 쥐고 비오는 날 저녁 동리 강에 있는 큰 다리를 실의 속에 거닐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끝내 약혼자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지 못하고 투신자살을 결심하고 막 다리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한 중년남자가 나타나 팔을 급히 잡더니 "여기는 추우니 우리 다리 지키는 조그만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 합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난로가 있는 그 사무실로 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통곡하는데 그 사람이 아무 말하지 않고 두 손을 잡더니 "하나님, 이 여인에게 실의를 딛고 일어설 평화와 소망과 용기를 주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삶의 소망과 의욕을 느꼈습니다. 조금 후 이 사람이 인자하게 웃으며 "하나님께서는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새 출발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이 여인은 집에 돌아왔는데 곰곰이 생각하니 그 다리지기가 너무 고마워 다시 인사 하러 그 곳에 갔더니 사무실도 그 사람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비로소 그 다리지기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새 출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복된 소망 되신 예수님을 바라며 살아 갈 때 복된 인생을 살며 주님 오실 때 영광의 자리에 함께 할 줄로 믿습니다.(예화뱅크)

  주님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실 때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난감한 질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천국 문 앞에 당도 했습니다. 닫혀 있는 천국의 문을  두드린 후 곧 한 사람이 나왔는데 베드로사도였습니다. " 지금 천국엔 빈자리가 하나뿐입니다. 당신들 중 더 겸손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들어 올수 있습니다. 어느 분이 들어오겠습니까? "

놀부아저씨의 천국기행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국구경 한번 시켜 달라고 매달린 지 일백여일...일찍 자리에 든 어느 날 잠을 깬 곳이 다른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내 몸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안내로 천국의 여기저기를 둘러 보고 있는데 한 방에 가니 시계가 가득 들어 있었다. " 이게 다 무슨 시계죠 ? "" 지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속을 썩일 때마다 한 눈금 씩 가는 시계죠."" 제건 어디 있나요 ?" " 어디 한번 찾아 볼까요 ? " 한참을 찾다 못 찾은 베드로.. "이럴리가 없는데.. 혹시 이름이 뭔가요 ? " " 연놀부입니다만... " 베드로사도가 무릎을 탁 치고 하는 말 " 아~ 그 시계는 하나님 집무실에서 선풍기로 쓰고 있는 데요 ! "(슬픔의 시계)

중동지역에 나가서 건설에 참여한 한 남편을 둔 여인이 있었습니다. 1년 동안 떨어져 있던  남편이 돌아온다는 편지가 날라 왔습니다. 편지를 받은 여인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이 노래지고 경색되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 그 여인은 남편이 해외에 나가있는 동안 부정한 여인에게 남편이 다시 온다는 것은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동에 남편을 보내고 1년을  떨어져 살면서 남편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던 또 다른 여인은 전혀 다른 반응이었습니다. 남편이 곧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인은 가슴 설레이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시장을 보아다 김치를 새로 담근다 별식을 만들려고 각종 요리 준비를 갖춘다 하면서 준비를 하고, 이부자리를 깨끗이 빨고 집안을 정돈하고 귀국일 하루 전엔 목욕하고 미장원엘 다녀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생활은 희망적인 생활이요, 준비하는 생활이요. 성결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얼마 전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도시에서 여론 조사를 했는데  그들이 675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자 85%정도의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 등록하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하는 가하면 선한 일생을 살다보면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단지 성경을 읽음으로써 천국에 갈수 있다고 한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자기 혼자서의 노력으로 갈수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더욱이 무엇을 믿던 간에 자기가 믿는 것을 굳게 지킨다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대답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거듭남 곧 갈보리 어린 양의 피로 씻음을 받아야만 천국에 이룰 수 있다고 못 박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라는 분만실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부모가 신자니까라고 하는 식으로 교회의 일원이라는 분만실에서 태어나기도 하고 또한 선행이라는 분만실에서도 나기도 하나 그리스도인은 갈보리 십자가의 보혈 공로에 힘입어 죄로부터 돌이켜 서서 구주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에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하며 천구구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약 50여 년 전에 미국 텍사스에서 석유사업으로 큰 부자가 된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세 친구의 이름은 죤 뉴우턴, 루이 웨더포드, 사무엘 프레스톤 입니다. 석유산업 호황으로 억만장자가 된 이들은 전세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놀러갑니다. 그들은 엠배서더 호텔 69층 전체를 예약하고, 첫날 뉴욕 관광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취한 채로 호텔에 돌아와 보니 일이 생겼습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입니다. 프론트 직원은 하룻밤만 2층에 지내달라고 사정합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는 술기운에 객기가 생겨 69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결정합니다. 등산하는 기분으로 걸어올라 가는데, 처음 몇 층은 괜찮았으나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마지막 몇 층은 거의 기어 올라가면서 2시간 반 만에 겨우 69층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올라와 보니까 프론트에서 방 열쇠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1층까지 걸어서 내려갈 것을 생각하니 그만 정신이 아찔해지고 고민이 됩니다. 마침 그때 구세주가 등장합니다. 청소하는 흑인 아주머니가 손에 마스터키를 들고, 활짝 웃으면서 객실 문을 열어주며 농담 비슷하게 말합니다. "이곳까지 올라오느라고 많이 고생하셨지만 방 열쇠가 없으면 방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이 마스터키가 없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마스터키는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방문 안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마스터키입니다.' 라는 흑인 아주머니의 농담이 존 뉴우턴 에게 어린 시절의 교회생활을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두 친구에게 "예수님은 정말 우리의 마스터키이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두 친구도 그 고백에 동의하고 그날 밤 그들은 눈물로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밤에 예수님이 찾아오심으로 그날 이후로 그들은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게 됩니다. 텍사스 제일 부자들이 자신의 부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기도의 후원자, 재정적 후원자가 됩니다. 빌리 그래함이 지금의 빌리 그래함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미국의 정치가요 과학자며 저술가로 유명한 벤자민 프랜클린(Benjamin Franklin)은 말하기를,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자기 일을 열심히 하되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는 곧 인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이렇듯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이루기까지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런 원리는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주의 재림을 대망하며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는 주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처음에 아무리 믿음 생활을 잘 시작하였다 하더라도 끝까지 인내로써 신앙을 잘 지켜나가지 않는다면 신앙을 wjarjagom 보아야 합니다.

영생의 소망 하늘의 소망 주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시리라는 재림의 복된 소망으로 인내 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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