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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라의 웃음 이야기 (창 17:15-19, 창 18:12-15, 히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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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 아침마다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벨의 순교 이야기”에 이어서 새해 첫 주일에는 “에녹의 동행 이야기”를 했고, 두 번째 주일에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했고, 세 번째 주일에는 “아브라함의 축복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일마다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아 지난 석 주 동안 매일 새벽마다 80여명 이상의 성도들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때로는 90여명 또는 100여명 이상의 성도들이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110명이 나온 아침도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은혜를 받지 못한 분들은 오늘 아침부터라도 마음을 활짝 열고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새벽에 한 번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내일 새벽부터라도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 받지 못하면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열국의 어미가 된 “사라의 웃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라의 본래 이름은 사래였습니다. 사래라는 이름의 뜻은 “나의 공주” 입니다. 사래는 ‘공주’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사래를 향해서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창12:11).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는 것은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면 외모와 함께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그 마음과 영혼 속에 나타나야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마음과 영혼에 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미인은 향기가 없는 미인이 되고, 매력이 없는 미인이 되고, 보기 싫은 미인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사라는 외모의 아름다움 뿐 아닌 마음과 영혼의 아름다움도 지닌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마음과 영혼으로 노래하는 성가대원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이고, 마음과 영혼으로 기도하는 새벽 성도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입니다. 유아부 유치부 어린이들이 너무너무 예뻐서 모두 안아주고 싶은 것처럼, 영혼으로 노래하는 성가대원들과 영혼으로 기도하는 새벽 성도들이 너무너무 예뻐서 모두 안아주고 싶습니다. 이제 열국의 어미가 된 사라의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사라는 의심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사라가 속으로 웃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100세였고 사라의 나이는 90세 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제 아들을 낳는 다는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사라의 웃음은 이해할 수 없음과 믿을 수 없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의심의 웃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조소하는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비웃는 웃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런 불가능한 일이 어떻게 나에게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진솔한 의심의 웃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라의 의심의 웃음을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으면서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서 같은 내용의 말씀을 하실 때 웃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17:15-17).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심하며 속으로 웃은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참 웃기시네” 라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의 웃음은 남편을 따라서 웃은 것이므로 더욱 더 이해할 수 있는 웃음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속으로 웃을 수가 있습니다. 놀라며 웃을 수도 있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웃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제가 러시아에 가서 선교사가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제가 타지키스탄에 가서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선교사가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제가 감비아에 가서 캄보디아에 가서 선교사가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나님, 어떻게 제가 북한에 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있습니까?” 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웃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조소의 웃음도 비웃음의 웃음도 아니고 그저 믿을 수 없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미성숙과 의심의 웃음입니다.

  둘째, 사라는 믿음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사라의 의심의 웃음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과 불신앙의 웃음을 너무 오랫동안 계속합니다. 그것이 너무 오래 계속되면 그 웃음은 절망과 불안과 불행으로 바뀌어지고 맙니다. 사라의 의심의 웃음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습니다. 사라의 의심의 웃음은 곧 믿음의 웃음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후 곧 마음의 자세를 바꾸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3-14).

  하나님은 우리가 속으로 웃는 것도 다 아시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도 다 아시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그 웃음과 생각 속에 믿지 못하는 의심이 있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책망하십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며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일도 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마14:31). 책망을 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곧 항복하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주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날 여행한 집사님들을 책망한 일도 있고, 주일 저녁 예배에 빠지는 집사님들을 책망한 일도 있고, 예배 시간에 늦게 오는 성도들을 책망한 일도 있습니다. 책망을 듣을 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과 축복의 말씀을 듣고 곧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는 말씀을 듣고 곧 항복하며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 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듣고 곧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사라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히11:11). 사라는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게 되었고 그래서 잉태하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믿고 하나님을 참으로 알게 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웃음을 지니게 됩니다. 평안의 웃음과 여유의 웃음입니다. 장애물과 방해물을 보고도 웃는 편안과 여유의 웃음입니다. 불가능을 바라보면도 웃는 편안과 여유의 웃음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시126:2) 라고 시편의 저자가 고백했습니다. 시온의 포로를 바벨론에서 돌이키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꿈을 꿀 때 시편의 저자는 입에 가득한 웃음을 지녔습니다. 불가능의 가능을 바라보고 꿈꿀 때 우리 입에는 평안과 기대의 웃음이 가득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어두운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웃었습니다. 저는 이런 웃음을 조금씩 배워왔습니다. 정보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받을 때나, 여행을 하면서 도둑을 맞을 때나, 불가능이 나의 앞에 가로 놓여 있을 때, 혼자서 웃었습니다. 지난번 아프간을 방문할 때 불가능이 우리 앞에 가로 놓여 있었지만 저는 혼자서 웃었습니다.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동행한 사람들에게 말하면서 혼자서 웃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져는 것 같이 보여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과 여유의 웃음을 웃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히11:38). 사라는 웃었습니다. 믿음의 웃음과 평안의 웃음과 여유의 웃음과 기대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셋째, 사라는 기쁨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믿음은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사라의 믿음의 웃음은 편안의 웃음과 여유의 웃음이 되었고 나중에는 기쁨과 축제의 웃음이 되었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잉태한 후 기한이 되었을 때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입니다.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21:6). 여기 웃음은 기쁨의 웃음이었고 축제의 웃음이었습니다. “그를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창18:18) 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사라의 기쁨은 개인적인 기쁨이나 가족적인 기쁨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천하 만민에게 미치는 천하적인 기쁨이었습니다. 사라를 향해서 ‘열국의 어미’가 되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했을 때 사라의 기쁨은 열국의 구원으로 연결되는 열국적인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그[사라]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창17:16). 사라의 기쁨은 성모 마리아의 기쁨과 비길 수 있는 천하적이고 열국적이고 우주적인 구원의 기쁨이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다면 우리는 사라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조상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쁨도 자기 개인적인 차원에 머문 기쁨이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의 구원과 연결되는 기쁨이었습니다. “너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니”(빌2:17).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사라는 인류 구원을 인해서 웃었습니다. 인류 구원을 인해서 기뻐하며 웃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비길 수 있는 기쁨의 웃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 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눅1:47,48,54,55). 사라는 하나님의 선물인 이삭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이삭을 통해서 천하 만민이 구원 얻을 것을 내다 보면서 기쁨과 축제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웃음의 과정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도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분부를 따라서 남편 아브라함이 청년이 된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사라의 가슴은 죽음 같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가 전한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서 돌아왔을 때 사라는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견디지 못해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십자가에 매 달려 죽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터져서 죽어가던 성모 마리아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에 비할 수 있는 극도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사라가 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사라는 살아서 돌아온 아들 이삭을 보고 천국의 기쁨과 승리를 만끽하며 마지막 승리의 웃음을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라는 그가 겪은 극도의 슬픔과 극도의 기쁨 때문에 곧 숨을 거두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라는 마지막 승리의 웃음을 웃으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창23장1절은 사라의 죽음을 묘사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시신을 막벨라 굴에 매장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도 막벨라 굴에 함께 매장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열국의 어미가 된 믿음의 여인 “사라의 웃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라는 외모만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었고 마음과 영혼이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극히 인간적인 의심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들으면서 곧 항복하고 믿음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나중에는 아들 이삭을 얻은 후 아들 이삭을 통서 천하 만민이 구원 얻을 것을 내다 보면서 기쁨의 웃음과 축제의 웃음을 웃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천국의 웃음을 웃기까지에는 죽음과 같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웃음을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롯의 처와 같이 집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웃고 있습니까? 아들 딸 손자 손녀 잘 키우면서 웃고 있습니까? 좋은 직장에서 돈을 좀 벌면서 웃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 세상의 일들로 인해서 허무한 웃음을 웃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설교 마지막 부분에 가서 항상 이렇게 책망 조의 설교를 하게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참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을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세상을 따라가지 마십시다. 믿음의 조상들을 따라가면서 사십시다. 제사를 드리든지, 자녀들을 낳든지, 방주를 짓든지, 웃음을 웃든지, 믿음의 조상들이 한 대로 그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한 마디 더 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저 출산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빚어낸 위기입니다. 사라처럼 출산하기 힘든 나이가 된 분들도 자녀들을 많이 낳아서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라의 웃음을 웃으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통해서 누군가가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은혜와 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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