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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훈련 3: 교육 (딛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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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디도에게 보내는 편지 일부입니다.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들 각각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를 썼습니다.

1. 늙은 남자: 절제, 경건, 근신, 믿음-사랑-인내에 온전
2. 늙은 여자: 행실 거룩, 참소치 말고, 금주,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
3. 젊은 여자: 남편과 자녀를 사랑, 근신, 순전, 집안일, 선하며, 남편 복종-하나님의 말씀이 훼방 받지 않게
4. 젊은 남자: 근신, 교훈으로써 부패하지 않고, 경건,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 하기,
5. 종들: 상전에 범사에 순종, 거스려 말하지 말기, 떼어 먹지 말기, 선한 충성 다하기: 이로써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

6. 공통: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양육하심.
경건치 않음과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림.

정리: 은혜로 살면서 세상 정욕을 버리고 경건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내용입니다.

더 간단히 하자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원을 위해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까?

부모의 소원이 자녀의 소원입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여러분과 똑같은 소원을 품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소원을 위해 기도하듯, 여러분의 자녀들도 기도 중에 그런 간구를 주님께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라면 부모-자식 간의 괴리는 넘어설 수 없습니다. 세상에 부모-자식의 거리처럼 먼 것이 또 있을까요? 많은 부모들의 고민이 그것입니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소원은 어떤 비즈니스가 아닙니다. 비즈니스는 변합니다.

중산층 자녀들 대부분이 정체성 위기를 겪습니다. 1세대들은 큰 고생하면서 오늘의 부를 이뤘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부모의 고생을 알지 못합니다. 2세대들의 정신문제를 말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Young drifter입니다. ‘젊은 표류자’라는 뜻입니다. 중산층 자녀들로서,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에 일정함이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들입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부모 세대의 꿈과 비전을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들 나름대로의 꿈도 비전도 내놓을 것이 없는 젊은이들입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상당한 부자들이 1세대입니다. 또, 그 부자들의 대부분이 지금 2세들에게 물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young drifter 2세들은 절박함이 없습니다.
그들은 고생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의 ‘사랑’ 대신 물질적 풍요 속에 자랐습니다. 부모들은 바쁘게 살았습니다. 일에 매여 시간을 다 거기 보냈습니다. 자녀들에게는 돈으로 다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여러분 중에 그런 2세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가 고생을 모르나? 우리도 정말 고생했다.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모르고 하는 말 아니가?”

그러나 1세대가 했던 생존을 위한 고생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36년의 일제 치하와, 그 이어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정권과의 싸움 속에 엄청난 고난 속에 지내왔습니다.

지금 작년 통계로 전 국민의 20%가 해외여행을 했습니다. 이건 정말 20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세계 12대 경제대국에 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만큼의 거품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타나는 현상이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국내외 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빈익빈부익부 문제가 참으로 심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정말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지적한 그 문제는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부요해졌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TV를 보고 셀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전체의 부요함은 절대빈곤 속에 살던 지난 세대와 비교가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런 부를 누리면서, 2세가 겪는 문제는 ‘정체감 상실’입니다. 정체관 상실은 당연하게도 ‘가치관 상실’로 이어집니다. 
미국 이민 2세가 겪는 위기 또한 심각합니다.
부모들의 성화 속에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다른 인종들에 비해 아시아인들의 약진이 눈에 띕니다. 그래서 상대적을 더 많은 아시아인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도 잘 잡습니다.

그러나 미국사회에 들어가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더욱이 한인사회에 남지도 못합니다.
어쩌면 이민 1세대가 경험했던 인종차별보다 2세대가 겪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할 수 있습니다. 영어는 잘 하지만, 아무래도 다른 것이 있습니다. 함께 자라난 사람들에게 차별 받는 것은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여기서 술, 마약, 도박 같은 문제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기정체감의 문제와 가치관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다.
2세들 가운데 교회 나가는 비율이 대단히 낮습니다.
3세로 가면 거의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른 인종 교회로 나가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기도여야 합니다.
어머니의 소원이 ‘기도’로 나타나지 않으면, 자녀들에게 그 소원은 ‘부담’입니다.
그런 부담을 주어서야 쓰겠습니까?

누가복음 18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가난한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갔습니다. 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 인간적으로도 못된 사람이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부탁하고 또 부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과부의 간절한 요청을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간절함이 전달되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 세대의 기도는 그런 간절함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어야 합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은 장로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의 기도를 배웠습니다.
새벽기도를 드렸습니다.

부모의 소원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부모는 ‘기다림’ 중에 있어야 합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의 귀가는 평안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축을 잡고 잔치를 열었습니다.

기다림 없는 귀가는 고통입니다. 다시 집을 나가게 될 때는 돌아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재소자들이 사회에 나갈 때, 그들을 반겨줄 집이 있어야 합니다.
갈 곳이 없을 때, 그들은 다시 큰 범죄를 짓습니다. 교도소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지난 1987년 1월 15일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 남한어선 동진호의 선원 최종석씨가 지난 26일 북한에서 환갑을 맞았습니다. 납북자가족협의회 최우영 회장의 아버지인 최종석씨는 19년 전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동료 선원 11명과 같이 북한당국으로부터 간첩의 누명을 쓰고 북한에 억류돼 있습니다.
최우영 씨는 최근에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가 공개되었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회갑 때는 휴전선 근처의 어떤 나무에 400개의 리본을 매달았다고 했습니다.

노란 손수건. 생각나십니까? 교도소에서 나오는 남편을 맞이하기 위해 수천 개의 노란 손수건을 나무에 달아맨 이야기 말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교육은 ‘기다림’입니다. 어제 심은 곡식을 오늘 추수하지 않습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교육도 그렇습니다. 금문교회 교육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기다림.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달려 나가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덕목입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갈아엎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조그만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 보여야 되는 일입니다.

“Grapes must be crushed before wine can be made. Wheat must be broken to make bread." M.R. De Haan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포도알은 으깨져야 합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리가 부서져야 합니다.

교육은 교육자의 부서짐을 요구합니다. 부모가 교육자인 가정에서 부모는 자녀 앞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자녀가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는 어린이들 앞에서 부서져야 합니다.
기다림의 엄청난 세월을 견뎌야 합니다. 길고 긴 겨울을 지난 꽃이 아름답고 향기 높은 것처럼, 고난의 세월 속에 기다린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육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무슨 결실을 거둘 수 있습니다.

현재 상태만 봐도 금문교회 교육은 훌륭합니다.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각각 목사님들이 맡았습니다. 교사들의 수준 또한 높습니다.

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든 교사들은 1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과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12년의 금문교회 역사를 돌아볼 때 지금처럼 교육에 체계가 잡힌 때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2006년 들어서서 금문교회 교육은 훨씬 달라져야 합니다.
창립 12년을 맞는 올해, 우리는 바른 교육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교육공간이 있어야 합니다.
훌륭한 시설을 갖추고, 미국과 세계를 책임지는 훈련을 여기서 받아야 합니다.
그런 엄청난 비전을 올해 2006년에 세우고, 우리는 그 기초를 놓아야 합니다.
지금 주일학교 전용 예배실과, 중고등부 예배실, 그리고 도서관과 교육실이 설계되어 시청에 서류 접수되었습니다. 현재까지 청사진 그리는 데만 15,000불이 들어갔습니다.

2월 7일에 시청 내 planning department council이 열립니다. 여기서 통과되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계속해서 기도해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새벽기도마다 이 문제를 집중해서 간구드릴 것입니다. 

우리의 간절함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그 기도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의 기도 따로, 자녀들의 기도 따로, 그래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결론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소원을 자녀들이 ‘알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그 소원을 ‘이해’하고, 저들의 소원으로 ‘포함’시키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자녀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있습니까?
교육실을 돌아보십니까?
도서 확충을 위해 어떤 수고를 하십니까?

여러분은 ‘기도 중에 기다리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기도 중에 으깨어지고 있습니까?
자존심 다 내려놓습니까?
어깨가 무너지고, 마음이 찢기고, 눈물이 뺨을 흘러내립니까?

정리

우리의 기다림은 자녀를 기다리고 부모를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기다림은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림입니다.
재림주 예수님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 교육은 누구의 이익이나 감정, 자존심 등에 걸린 문제를 넘어서게 됩니다.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길을 가는 성도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자녀들의 삶을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고, 진지한 대화가 있는 교육이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께서 탕자의 아버지처럼 우리를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둘 때까지, 그 길고 긴 기다림의 세월을 ‘소망’ 중에 지내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제와, 은혜와 진리의 찬양이 있어야겠습니다.

2006년에 우리교회 교육부는 어떻게 발전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가르치는 교사들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십니까?

나는 여러분의 기도가 열매를 거둘 것을 확신합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시편 126:5-6).

기도

은혜의 주님.
저희들의 자녀들을 교육할 수 있는 길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녀들이 바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부모 된 우리가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으깨어지는 기도 시간을 허락하옵소서.
참다운 기다림 속에 평안한 가정을 열매로 거두게 하옵소서.
우리를 지금도 기다리시는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은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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