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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강도의 회개 (눅 23:3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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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악을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당하실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도 한 사람씩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니 그들은 강도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을 빼앗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쳤던 강도들이 이제 그들이 지은 죄의 대가로 참혹한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로마 당국자들이 두 강도 사이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고의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강도들과 같이 대우함으로써 예수님께 더 큰 수치를 안겨 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을 받으실만한 악을 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죄짓고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신 것이 죄가 될 수 없습니다.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놓아준 것이나, 질병에 걸려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고쳐 주신 것이, 그리고 주린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주신 일이 어찌 죄가 될 수 있겠습니까?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아내지 못하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릇에 물을 가져다가 자기 손을 씻었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자기는 결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소요를 일으킬 것을 겁내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그러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관원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메시야를 고대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 앞에 메시야가 출현하자 그를 영접하지 않고 로마 당국의 손을 빌려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로서 로마의 압제에서 유대 민족을 해방시키고 무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 정치에는 관심이 없으셨고,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분주하게 일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성전 뜰에서 소와 양, 비둘기를 팔고, 또 돈을 바꾸어 주는 자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의 비위를 거슬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 날 골고다 언덕에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거 몰려와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욕하고 비웃었습니다. 로마 군병들도 예수님을 조롱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팻말을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로 써서 붙였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 스스로를 구원하라.”고 빈정댔습니다. 군병 네 사람이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심지어는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도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4절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고 하였고, 마가복음 15장 32절에는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고 증언했습니다. 흉악한 죄를 짓고 처형당하는 주제에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해 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없이 저들의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도리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비록 십자가에 달린 것은 아니나 한치씩 한치씩 죽어 가고 있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당신도 죄인입니다.”라고 말해 주면 얼굴을 붉히면서 “내가 왜 죄인이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환자가 병을 고침 받으려면 먼저 자기가 병든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치료는 자기 병을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필요하고 죄인에게라야 구세주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기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로마서 3:10-12의 선언은 이신득의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기독교 진리의 전제가 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 적게 지은 사람, 끔직한 죄를 지은 사람, 좀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 등으로 죄인들을 구별하지만, 그러한 구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치 밤중에는 촛불과 전등불이 그 밝기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밝은 태양빛 아래서는 둘 다 아무런 존재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로움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하신 율법에 의해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 두 강도 사이에 높이 세워졌던 주님의 십자가는 사실인즉 저와 여러분이, 아니 전 인류가 달려야 할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두 강도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처음에는 두 강도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한 강도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 강도는 모든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웃고 욕하고 대적하는 마당에도 묵묵히 그 모든 모욕을 참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이 분이야말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신앙생활을 해 왔고 성경을 들어왔기 때문에 메시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었습니다. 비록 강도가 되었을망정 태어날 때부터 강도였던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십자가에 달렸을 때 성령님께서 이 강도의 영안을 열어 주셨던 것이지요. 그러자 이 강도는 비로소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강도는 다른 강도가 예수님을 비방하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을 때 그 동무를 꾸짖었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런 다음, 그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즉시로 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강도가 똑같이 흉악한 죄를 저질렀고 그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을 받았고, 다른 한 사람은 멸망을 당했습니다. 두 사람이 시작은 같았으나 그 결과는 천양지차가 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같은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첫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향하여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네가 일생에 지은 죄도 많은데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이 거룩한 분을 비방하다니 너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어떻게 당하려고 그러느냐?”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믿음의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함부로 죄를 짓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물마시듯 죄를 짓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존재하시며 불꽃같으신 눈으로 모든 인생을 살피십니다.

이 강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날 아무 준비도 없이 종말을 맞이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으며, 바로 이 두려움이 그를 회개의 단계에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세상 유혹을 받아 죄 짓는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엄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러분을 죄 짓는 자리에서 떠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를 구해 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러나 회심한 강도는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떳떳하게 예수님을 향하여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 10:32-33)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잠 14:27) 하신 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자기가 받는 형벌을 정당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강도는 처음 십자가에 달렸을 때만 해도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자기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곁에서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을 대하면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었습니다. 과연 자기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제 죄를 깨닫지 못하고 분위기에 편승해서 덩달아 예수님을 조롱하는 다른 강도를 보고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임금이 감옥엘 시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죄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면담하면서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죄수들은 하나같이 죄가 없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노라고 하소연했습니다. 그런데 죄수 하나가 줄곧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는 정말 몹쓸 죄를 지었으므로 감옥살이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그 임금은 그 회개하는 죄수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치면서 “너 같은 죄인은 결백한 사람만 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하면서 바깥으로 내쫓았다고 합니다. 지옥에 가면 이곳저곳에서 ‘억울하다’는 소리가 진동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 대가를 달게 받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하여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한 둘째 아들을 보십시오. 나중에 그가 빈털터리가 되어 들에서 돼지치기가 되어 쥐염 열매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드디어 회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아버지를 만나서 드린 첫 말씀은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 지은 것을 원통히 여기고 눈물로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세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그를 저주하고 욕하고 비웃는 자들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고 그의 무죄하심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님께서 이 사람의 마음에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죄가 있다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속량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무죄성은 구세주의 기본적인 자격 요건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으므로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무죄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무죄하신 예수님에게 온 인류의 죄를 다 걸머지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난당하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복음서를 읽어보시고, 거기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시되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되 속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을 지니신 주님. 인격적이나 편협하지 않으신 주님의 모습을 대하면서 이 강도와 같이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회심한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감히 자기를 낙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단지 자기를 생각해 달라고만 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기억하시든지 그것은 예수님께 다 맡겼습니다.

로마 당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고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하시고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 강도가 자기 영혼을 부탁하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강도가 이처럼 예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을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처럼 이 강도에게 복스런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서 예수님에 대하여 전해 들으면서도 마음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지내다가 멸망으로 떨어지는 마당에 이 강도는 십자가에 달렸던 짧은 시간에 구세주를 믿고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복 받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강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사정하고 애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이 말을 하는 데는 아무리 천천히 말할지라도 십 초가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강도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영생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오랜 세월이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더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할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 못해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신 대로, 나사렛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으시는 부모님이 계시거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님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하신 말씀과 같이, 우리는 일단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할 때 처음에는 핍박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완고한 분들은 그러려면 부모 자식의 의리도 끊겠다고 협박하기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계속 전하십시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병상에 누워서, 임종을 기다리면서 여러분이 전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이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부르고 예수님의 손에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게 될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 강도가 지옥에 떨어지려던 순간에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은 비유컨대 불 가운데서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아니면 무너진 건물 무더기 속에서 건짐 받은 것과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것과 받지 못한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큰 것입니다. 하나는 영생이요 하나는 영벌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도 좀 더 늙어서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는, 그것은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누구나 다 이 강도와 같은 행운을 만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가 따로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2에 보니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이라는 시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에게는 십자가에 달려 죽어 가던 그 순간이 그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였으며,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한편 강도는 그 마지막 기회를 놓쳐 버리고 멸망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 강도의 믿음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상의 나라가 아니요 영원한 천국을 말합니다. 다른 편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마당에서도 이 세상에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단지 육신의 삶만을 바랐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윤택한 생활을 영위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 나라여야 합니다. 로마서 14:17에 보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거룩한 나라요 영적인 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는 이 땅의 축복보다 영적인 축복,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연후에 이 땅의 축복도 구하십시오. 이 순서가 올바로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진실된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강도를 통해서 우리는 회개와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둘 다 동일한 죄를 짓고 세상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가는 순간에, 한 강도는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또 한 강도는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버리지 못하다가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데도 받아 누리지 못한다면 이처럼 아쉽고 후회막급한 일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구원받는데 우리의 공로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는 매우 단순하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구원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졌다고 가벼이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대가로 지불하고서 얻은 것입니다. 온 우주보다도 더 크고 막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3에는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십자가상에서 회심하고 구원받은 이 강도를 부러워할 것입니다. 이 강도는 정말 행운아입니다. 너무나 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들이야말로 이 강도보다 수백배 수천배 더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강도는 불타는 건물잔재에서 겨우 건짐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성도님들께서는 이미 구원을 보장받고서 영원한 천국의 상급을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성도님들 모두, 이 큰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답게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시면서 봉사와 전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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