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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지경을 넓혀주옵소서 (대상 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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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들어서 세 번째 주일입니다. 또 뿐만 아니라 1월에 들어서도 절반이 지난 15일이 됩니다. 아마 이쯤 되면 올해 신년의 예배를 드렸던 모든 사항들이 우리들 앞에 푸른 꿈으로 살아나 진행되고 있는지 아니면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약간의 시간을 지나서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내 마음에 낙심으로 다가오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올해 신년예배를 드리며 우리 마음에 품었던 꿈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품었던 소원과 계획들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도의 열망들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생각해 봅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강해지고 새로운 꿈과 소망을 가지게 되고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움을 느끼고 계십니까? 아니면 낙심함 가운데 나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어하고 실망이 되십니까?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정비해서 올해는 꼭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은총을 받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세상에 살면서 존귀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과연 이 세상에서 누가 존귀한 사람이겠습니까? 또 어떻게 함으로 그 존귀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에 대한 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야베스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그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셨고 응답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는 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응답의 역사의 힘입어 존귀하게 되었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야베스는 기도하였고 기도에 응답을 받았고 기도의 응답의 결과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고 응답받는 사람, 이 사람이 존귀하게 되는 사람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는 야베스는 성경에 많은 설명이 없습니다. 본문이 너무 짧아 그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어려움을 기도했고 그 소원의 응답을 받았고 결과로 형제보다 존귀한 자가 되었다고 간략하나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신년을 맞아 보름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내 자신의 계획과 목표에 대한 실천성 여부에 낙심하지 말고 우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더욱 새롭게 하고 우리 소원을 더욱 세련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마음에 계획이 새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그 마음에 기도가 더욱더 뜨거워지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수록 우리 마음속에 소망이 더욱더 새로워져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그러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응답의 역사와 존귀케 되는 은혜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무엇보다 야베스의 간곡한 기도의 모습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와 같이 단순한 한 구절의 문구이지만 야베스의 간곡한 기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께 대한 의뢰함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있는 아픔이나 생활의 곤고 혹은 여러 어려움이 생겼을 때 우리 하나님께 간곡히 기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대합니다.’라는 것은 내가 어려웠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내가 의뢰하지 않으면 내가 신뢰하지 않으면 어찌 그분께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라는 것은 우리 믿음의 밖으로 드러나는 표현의 모습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어려우니까 저렇게 매달리는거야’ 정도가 아니라 ‘믿음이 있으니 하나님께 간구한다’라는 믿음의 외형적 모습인 것입니다.
올해 아직 1월이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의 한해가 지속되어져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믿음의 사람 신뢰의 사람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 되기를 소원 드립니다.

야베스가 존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믿음의 사실이 나옵니다. 특별히 백부장 고넬료는 누구입니까? 베드로를 초청해서 그의 집에서 말씀을 듣고 그러함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이방인의 세계에 복음의 아름다운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던 그 일의 문을 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백부장 고넬료에 대한 서술 중에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경건의 내용에 대해서 규정을 해줍니다. 왜 백부장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고 지칭을 받았을까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면 그는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배했다고 말씀합니다. 본인뿐 아니라 온 집안으로 더불어 경배한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비슷한 내용이 많이 나오지요? 여호수아가 백성 앞에서 설교를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너희가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든지 아니면 너희가 이방신을 섬기던지 이제 결정할 때가 왔다”라고 하면서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하며 기도하다가 옥토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려서 밖으로 나오게 되지요. 그래서 그 간수가 죄수가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할 때 가로막습니다. 그때 간수가 묻지 않습니까? 내가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담대히 외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성경에서 이와 같이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모든 집, 가정이 함께 주님 앞에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온 집안으로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사항이 무엇입니까? 경건한 것, 백성들을 구제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해 인재양성과 사회복지사역 그리고 선교사역 세 가지가 균형 있게 이루어져 제 3기 역사와 사회를 위한 기여와 봉사의 헌신을 위한 연습기로 규정을 하고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구제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있어서 분명히 있어도 되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있어야 될 필수적인 사항이라는 사실입니다. 경건한 것을 지칭하는 가운데 백성들을 구제하기 때문에 경건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구제하지 않는 사람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뭐지요? 항상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바로 이와 같은 경건한 사람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무엇이 있고 저와 우리들에게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함과 날마다 구제함과 하나님께 항상 기도함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기도라는 것은 이와 같이 ‘항상’이라는 개념입니다. 내가 어떤 때 내 마음의 소원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 속에 늘 있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의 간구의 모습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을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야베스가 하나님 앞에 아뢰어”라는 말의 원뜻은 다급한 요구 고질적인 곤궁과 관련된 말로서 부르짖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그냥 여유 있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부르짖는 다급하고 간절한 기도를 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마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온전히 순복한 것인 양 하나님 들어주셔도 좋고 안 되면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우아한 기도만이 간곡한 우리의 믿음의 성숙을 나타내는 기도는 아닙니다. 정말 마음이 다급하고 간절해 하나님이 이 기도를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 우리가 어리석은 욕심에 찬 기도는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꼭 들어주셔야 한다라고 기도해도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나는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마음에 작정이 이미 되어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간곡한 마음으로 야베스처럼 아뢰고 부르짖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의 밤이 깊을수록 기도는 더욱더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나와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들을 봅니다. 고통이 있을 때 밤을 새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봅니다. 고통이 깊을수록 우리의 기도가 간절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우리들에게 다가옴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통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 어려움이 우리들에게 다가올 때 그것은 아픔과 눈물과 슬픔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의 때에 근접하게 하는 하나님의 축복의 사실이라는 것은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러저러한 삶의 고통이 있습니까? 삶의 아픔이 있습니까? 주님 앞에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이와 같은 삶의 눈물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존귀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일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확신해야 합니다.

다니엘 6장 10절을 보게 되면 다니엘은 어려운 중에도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을 쉬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인하여 우상 숭배할 때 드렸던 왕의 진미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식물만을 먹고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수려한 용모를 갖추게 되었고 또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가장 높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그냥 그를 놔두겠습니까? 시기하고 질투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모략이 늘 있을 수밖에 없지요. 마침내 그는 모략을 받아서 죽을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니엘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그 주변사람들이 알고 있지요? 다니엘을 겨냥합니다. 왕이여 만약에 왕에게 절하지 않고 다른 것에 절하는 것이 있으면 그를 사자굴에 던집시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다니엘을 겨냥한 모략이 그 주변에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을 그것이 자기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습관대로 이전에 하던 그의 모든 삶의 모습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을 섬기다 어려움을 당했을지라도 그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함으로 그 삶이 하나님을 향해 있음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그의 어려움은 인간적인 고민으로만 끝내지 않고 늘 하던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믿음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응답만이 그의 삶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에게 그 바벨론 사람들의 이와 같은 시기와 질투로 말미암은 모략과 중상과 계략들이 이번 한번만 이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지나가도 또 있고 또 있어 질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것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한번 모면한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서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 문제를 이루어 주셔야 한다라는 것을 그는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문제를 하나님과 더불어 해결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내 생각에 의해서 어떤 일을 하고 인간적인 방법에 의해서 어떤 일을 한다고 한들 문제해결은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문제를 해결하자하고 그는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의 열쇠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올 한해 들어서 이러저러한 모든 마음의 행로를 거치셨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그런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 드립니다. 내 뜻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일까? 내 말이 내 행동이 내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먼저 나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일하시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그 일을 망가뜨리는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도 조급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간들은 언제나 너무 조급합니다. 하나님의 해결하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기 보다는 언제나 조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고 우리의 죄악성을 드러내게 되고 우리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존귀의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를 보게 되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소원에 기도와 응답의 역사를 봅니다. 그의 딸이 귀신이 들렸어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좀 해결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은 본척만척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좀 해결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 하십니까? “자녀들에게 줄 떡을 개에게 주지 않는다 너는 개와 같은 사람이다” 가뜩이나 가나안 사람들은 이 유다 사람들에게 개와 같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러나 그는 마음을 더 낮추지요. 더 낮추어서 우리 예수님께 간청을 하지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주인이 이 부스러기와 같은 이 작은 은혜만 주셔도 내 모든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는 주님께 대한 온전한 기대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축복하시며 그의 딸을 낫게 하시는 해결해 주시는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어떤 때 이와 같은 애절한 간곡한 기도가 이루어질까요? 거절당해도 다른데 갈 때가 없을 때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 아니면 우리 하나님 아니면 나는 내 문제를 해결할 것이 없다라고 생각할 때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간곡한 소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데까지는 합니다. 그런데 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결국은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런데 미리 내 한계를 알고 하나님께 미리 돌아오는 사람은 축복의 백성이요, 은총의 백성입니다. 주님께 대해서는 어떤 부끄러움도 없어요. 주님이 나를 아시고 주님이 내 길을 아시고 주님이 나의 모든 행로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 마음에 있는 인간적인 더러움과 우리 마음에 있는 인간적인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들을 우리가 다 내어놓으면 어찌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가리워주시고 은혜로 덮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씻어주시니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과 나의 더러움에 대한 부끄러움조차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욱더 심각한 상태인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온전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 개와 같다 내가 개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의 은혜만 입으면 됩니다.’ 주님 앞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여실히 보며 그것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낮출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은혜의 역사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마가복음 9장 17절 이하를 보게 되면 벙어리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뭐라고 간청하죠? ‘할 수만 있거든 좀 내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세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마가복음 9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아버지가 어떻게 되죠? ‘예. 내가 믿나이다. 주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내가 믿나이다.’ 이 과정을 잘 보세요. 처음에는 아주 촛불과 같은 작은 믿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 혹시 하실 수 있으면 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우리말로 따지면 간절히 조그만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주님께서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 뭐라고 하시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시자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믿나이다. 내 믿음없는 것을 용서하소서. 주께서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믿나이다. 그 때 주님께서 그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던 것입니다. 기도하다 보면 주님과 대화하다 보면 주님과 은혜의 교제를 나누다 보면 우리의 작은 촛불같은 믿음이 커져서 큰 불이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루어져 마침내 존귀케 되어지는 성도들이 되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마음의 간절한 소망이 현실화된 사실로 먼저 마음에 느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적인 응답으로 다가옵니다. 현실속의 사실로 다가옴을 언제나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참 이상하게 기도하는 내용이 꼭 내 삶의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기도하던 내용이 사실처럼 느끼진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은 그것이 실제적으로 사실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더 경배하고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가 쌓이고 쌓인다라는 문구를 상당히 좋아하거든요. 한번 기도하고 또 한번 기도하고 한달 기도하고 일년 기도하고 2년 기도하고 기도가 쌓이고 쌓일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것, 너무 좋아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기도가 쌓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월이 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더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더욱더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비전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연단시키고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의 역사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한 것에 대해서 마음 흔들리지 마세요. 여러분 기도하셨습니까? 믿고 그대로 실행하시고 기도하셨으면 그대로 믿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는 결국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주문이 아니에요. 내가 이렇게 말했는데…. 이런 주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간곡한 믿음이요 하나님을 신뢰하는 우리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 분당이 내려다보이는 오포 넘어가는 고개에 올라가서 분당 전 지역을 내려다보면서 교회 개척 전에 2년 정도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께 여러번 말씀드렸죠. 2년 정도 하나님 이렇게 인도해주셔서 제가 와보지 못한 곳에 오게 되었고 또 이제 이곳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할 때 교회를 설립하고 개척해서 우리 성도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합니다 하고 2년 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2년 정도 기도해서 이쪽으로 올 시기가 거의 다 됐는데 전혀 다른 길들이 또 열리는 것입니다. 다른 교회에서 청빙하는 일도 생기고 전에 제가 모시고 있었던 담임목사님이 총신신대원의 교수로 가셨는데 제가 개척하기 위해서 교회를 사임했다는 말씀을 듣고 제게 연락을 해서 한번 만나자고 하시더니 저하고 둘이 같이 교회를 개척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제자고 그분은 선생님인데 같이 이렇게 동역자로서 공동으로 담임목사를 하고 이렇게 교회를 개척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를 목회하고 계신데 원래 교수는 담임목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교수를 할 수 없으니 우리 최목사가 담임하고 나는 돕는 목사가 되서 한번 학교에서 가르친 대로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주 젊은 목사인 저에게 그런 제시를 했다는 것은 상당히 목사인 저를 믿어주시는 건데, 마음에 기쁜 일이죠. 가서 설교도 한번 했습니다. 목사님은 사택도 이쪽으로 마련해 놓고, 아주 굉장히 강력히 요청을 하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가까운 데에요. 송파쪽인데 저는 그쪽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기도하고 또 그 지역에서 기도를 해보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어차피 저는 이리저리 옮기는 목사는 아닌데요. 저는 이제까지 평생에 두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한 교회는 23년 다니고 두 번째 교회 15년 다녀서 지금 몇 년 됐죠? 38년 동안 2개의 교회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제가 여기 한번 오면 여기가 저의 마지막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는데,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미 그것은 교회가 다 이루어졌고 교회 건축 계획까지 다 세워졌고 모든 것이 다 되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간절히 기도를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그 언덕에 가서 2년간 기도를 했을까? 왜 그 언덕에 가서 2년 동안 기도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길로 인도할 것이면 그 언덕에 가서 왜 2년 동안 기도했을 것인가?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학교에서 실천 신학을 가르치셨는데 저보고 또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 개척해서 교회가 설립돼서 이뤄질 확률은 1, 2%도 안되는데 최목사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같이 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에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런데 제 마음에 드는 생각은 무엇이냐 하면 기도에 대한 사실이었습니다. 왜 기도하게 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그곳에 와서 2년 동안 기도하게 하셨을까?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제 마음속에 응답이 안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한 곳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렵게 말씀드렸죠. 참 불러주셔서 감사하고 제게 너무 과분한 제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 가서 2년 동안 기도한 것에 대해서 네가 그 문제를 풀지 못해서 결국 저는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제가 사정을 소상히 설명드리고 양해를 구하고 제가 가지 못함을 말씀드리고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하게 하셨으면 그것에 대해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기도를 하게 하셨을까?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고 응답의 형태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거든요. 그럼 기도하게 하셨으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했으면 과정가운데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우리가 문득 그것을 끊어버리고 다른 일을 하게 된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들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서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의 사실로 말미암아 연단시키셔서 전혀 다른 일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 그 문제에 대해서 곰곰이 풀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신 것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내 마음의 소원이 생겨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소원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여호와, 소원을 주셔서 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대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셔서 우리를 하나님이 존귀하게 세우려는 하나님의 뜻과 의도라는 것입니다. 늘 기도하실 때 내 마음의 소원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소원이라고 한번 믿어보세요. 그 때 우리 마음에 더욱더 뜨거운 역사가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올해도 기도하셨죠. 제가 올해 신년 다섯 가지 마음에 소원하는 것을 쓰라고 했죠. 저는 그것을 쓰시면서 여러분들이 그냥 인간적으로 생각한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각 속에 이 일을 이루어라라고 생각하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아 이런 것을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성령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성령의 역사를 완결시켜드리는 것입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완결시켜드립시다. 성령의 역사를 완결시켜드려야 합니다.
기도는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승리의 인물은 모두가 기도의 인물이요 기도의 역사입니다. 여호수아가 아말렉 군사들과 싸울 때 모세가 손을 들었어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여호수아 군대가 지게 되어 있죠. 손을 들어서 이기게 합니다. 팔이 아프니까 아론과 훌이 그 팔을 받혀서 손을 들게 되고 결국 기도의 손을 들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갈멜산의 대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를 간구하여 마침내 은혜의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다니엘의 기도, 사무엘을 얻게 되는 한나의 눈물의 기도, 오순절 성령충만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게 됩니까?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여서 간절히 기도할 때 마침내 주님께서 약속하셨던 오순절 성령충만의 사건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역사는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계시고 인간들의 마음에 기도의 소원을 품게 하시고 간구하고 응답하는 순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습니까?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있을 때 주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날 보니 정말 예배당 가득 우리 성도들이 오셔서 금요심야기도회에 참여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이제 요즘 금요심야기도회에 점점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것을 봅니다. 마음이 참 기뻤습니다. 목사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과 은혜를 주시려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요? 기도하는 이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우리 한번 따라서 합니다. 기도의 줄을 잡읍시다. 기도의 줄을 놓지 맙시다.
어떤 사실, 사항, 사람에 대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뜻이 그 기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기도하는 중에 먼저 내 마음이 변화됩니다. 여러분 기도의 응답에 가장 확신은 먼저 내 마음이 변화에서 옵니다. 기도하면 내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기쁘고 감사하고, 이해하고, 또 옆에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게 되는데 그 평가가 늘 감사하고 좋은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내 옆의 사람에 대해서 나쁜 평가가 이뤄지면 나는 성령충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고 기쁘고 정말 감격하게 만드는 것이죠. 옆에 사람을 봐도 전보다 훨씬 좋은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요. 여러분 은혜받으면 옆에 사람 다 좋은 사람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면 옆에 사람이 다 나쁜 사람으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변화됩니다. 내 마음도 변화되고 내 주변의 사람들도 변화되고 상황도 변화되고 사물들도 변화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과 기도가 이렇게 밀접한가?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믿음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그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더욱더 큰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마음의 변화를 통해서 상황의 실제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응답이 있게 되고 마침내 실제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거기에는 간절한 기도의 역사가 있었음을 봅니다. 우리는 내 뜻의 성취를 위한 주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간구인 간절한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두 번째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원컨대 주께서 나에게 복의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근심을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즉 야베스의 기도는 무엇보다 복의 복을 더하사 지경을 넓혀주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베스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작은 사람입니다. 저는 작은 능력밖에 없습니다. 나는 작은 계획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축복하시면 나의 지경이 넓혀질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내 자신의 부족을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더하시면 우리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입니다. 파수꾼이 아무리 성을 지켜도 집을 짓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건축을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니 않으시면 그 수고가 헛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은혜의 통로에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개울가 옆에 있어야 물을 마시기 쉽습니다. 물이 흘러가는 통로에 있어야 수분을 흡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과실나무 밑에 있어야 과실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간혹 은혜와 축복은 원하면서 우리의 삶은 그 반대로 산다면 그것은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간곡한 기도는 음성만이 아니라 문자로도 그리고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 보여지는 종합적인 언어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잖아요. 감을 주우려면 감나무 밑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받으려면 은혜의 통로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맞는 삶을 살아야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아래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가끔가다 보면 마음이 어렵고 울적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내가 스스로 어려워하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원하실까?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원하신다는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쁨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즐겁고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에 이런 울적함과 슬픔은 무엇일까? 결국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과 괴리되어서 이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지경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히는 것 가운데 가장 먼저는 마음의 지경을 넓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적으니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내 지경에서 내 수준에서 넘어가니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틀렸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이해 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넓어져야 합니다. 품을 수 없는 것을 품어야 합니다. 결국 축복은 우리의 마음이 넓혀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마음이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식과 지혜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리와 지식에 대한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인식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알지 못해요.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자꾸 틀렸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지경, 우리의 인식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의 지경도 넓어져야 합니다. 헌신을 위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기업으로 하나님의 생업에 축복을 위한 이와 같은 헌신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삶, 하나님의 축복 속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더 큰 헌신을 이룰 수 있도록 하나님이 생업 위에 지경을 넓혀주시기 위해서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는 우리의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헌신하면 두가지를 생각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하나님께 크게 헌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내가 이렇게 헌신했으니 내가 이젠 더 큰 헌신을 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헌신하고 나면 다음에는 어떻게 헌신할까 하고 또 헌신할 것을 찾아요. 똑같은 헌신의 요청이 있을 때 더 큰 헌신을 하려고 해요. 그런데 반면에 또 이런 경우도 있어요. 하나님께 헌신하고 나서 내가 지난번에 그렇게 헌신했으니까 이번에는 됐지. 한번 헌신했으면 됐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지경이 넓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떤 사물에 대해서 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헌신의 지경에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축복과 하나님 앞에 헌신이 균형있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한번 한번 거치면서 우리는 지경이 넓어져야 합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왜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장대해 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늘 기도하다 보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해야 될 일이 보이는 것 같아요. 참 기도하면 하나님 앞에 어떤 일이 축복을 받는가 그리고 어떤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것일까라는 것들이 우리들에게 보여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괜히 일만 만드는 일이에요. 가만히 있으면 편안할텐데 괜히 일만 만들어서 괜히 복잡하고 불편하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편안한데…. 가만히 있으면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도 가운데 우리 마음에 늘 열정을 불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지경을 넓혀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목회계획 설명회를 할 때 말씀드렸듯이 우리 주변에 소년 소녀 가장을 돕자라고 했을 때 몇 십 가정 정해서 돕자고 하면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몇 십 가정이 아니라 이 분당에 400가정이 있다라고 하면 그 400가정을 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것도 1, 2년이 아니라 10년 이상, 우리가 같이 힘이 되서 돕자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또 다른 수준입니다. 그러니 현재 있는 힘만 가지고 안 되고 또 힘을 만들고 생성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많은 수고와 애씀이 투자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의 헌신을 생각할 때 있는 것 가지고 헌신하자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고 없는 것도 만들어서 하나님께 헌신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고 나서 꼭 내가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우리의 삶은 편하게 사는 것만이 제일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의 원하심대로 사는 것이 우리들에게 축복이 아닌가? 정말 이 세상에서 편안한대로 마음 편하고 몸 편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편한대로 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삶의 진정한 기쁨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헌신은 내게 있는 것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없는 것도 만들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잖아요. 축복받기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하기 위해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면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봅니다. 작은 일은 충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작은 일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연연하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너무 사소한 일에 우리는 목숨을 거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정작 우리가 우리의 삶과 목숨을 걸고 해야 될 일이 있는데 아주 소소한 일에 마치 그것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인 양 우리의 모든 것을 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연필 한 자루와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데나 낙서하고 다니면 정작 인생의 이야기를 써야 할 때 우리는 그것을 쓸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에나 소비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뭐라고 기도합니까?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으로 도우심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니 하나님의 손으로 도와야 합니다. 내 지경을 넓혀주시는데 주의 손으로 도우시고 또 뿐만 아니라 주의 손으로 도우셔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환난이 넘치고 근심이 넘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멎게 하시고 근심을 멎게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환난이 멎게 됩니다. 근심 중에도 소망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소망이 생깁니다. 걱정과 근심, 때로는 이럴 것 없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우리는 담대히 일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한 가지 더 우리 생각해보고 마칩니다.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야베스가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야베스의 기도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므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되실 때 우리들이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대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여 더 알맞고 크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 기도하다 보면 우리가 어리석은 기도했다고 느끼는 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아시니, 기도하면 문구대로가 아니라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합당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완숙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기도하면서도 미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도 있고, 합당하지 않은 기도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에도 우리들에게 마음을 보시고 알아서 축복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원할 때가 있죠. 그때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알았어. 그렇게 해줄게.’ 그 아이가 원하는 말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의 원하는 것보다 큰 것을 해석해서 알맞은 것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는 것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게 되고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 꺾지 않고 꺼져가는 촛불을 끄지 않습니다. 혹시 우리 성도님들 살아가면서 상한 갈대를 꺾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꺾어 본적은 없습니다. 꺼져가는 촛불을 끄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밟아보고 꺼지게 하고 정말 우리는 고통을 준적은 없습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주님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잊어버리고 주님께 긍휼과 자비는 받으면서도 우리는 그것을 베풀지 못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입으려면 상한 심령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입으려면 우리는 자비와 긍휼대로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입어야 우리는 길이 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도움을 입은 백성들은 축복의 백성입니다. 내 힘과 능력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손에 축복을 입어야 합니다. 주의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큰손으로 축복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의 작은 손으로 아무리 움켜 봐야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손으로 축복하옵소서. 바로 이와 같은 기도가 우리의 소원이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신년 들어서 15일의 시간이 지났고 주일로서는 세 번이 지났습니다. 신년예배를 드린 지 15일이 지났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떤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어떤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주실 줄로 믿습니다. 환난과 슬픔을 멎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기도를 허락하실 때에 우리는 존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존귀한 성도님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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