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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체질개선, 절망에서 희망으로 (대하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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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파 한의원에 가면 체질을 계선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체질이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하게 살려면 체질부터 개선을 해야 병이 잘 들지 않고 병이 든다 해도 빨리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쁜 체질은 좋은 체질로 바꾸고, 어약한 체질은 강한 체질, 비만 체질, 습윤성 체질, 건조한 체질, 긴장성 체질을 건강한 체질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핵성 체질, 관절질성 체질, 뇌졸중성 체질, 암종성 체질, 발육부진성 체질, 알레르기성 체질을 바꾸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점액질 등의 체질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개인마다 고유한 체질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타고난 체질은 쉽게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선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기업도 잘 되려면 경영 체질을 바꾸어야 하고 사회나 가정 교회도 건강하려면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유다의 6대왕 아하시야의 인생을 살펴 보면서 교훈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한 마디로 말하면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여 비참하게 망한 왕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처럼 이스라엘이 남북이 분열되어 있을 때의 이야기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쪽의 왕은 유다의 6대왕 아하시야였습니다. 북쪽의 왕은 악명높았던 아합왕의 아들 요람이었습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의 오빠이고 아하시야에게는 삼촌이 되는 이스라엘의 제 9대 왕입니다. 예후의 혁명에 의해 아합 정권이 무너진 아합 가의 마지막 왕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의 뜻이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셨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말하면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나 김일성 가문이 제거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유다의 제 6대 왕인 아하시야의 할아버지는 훌륭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여호람은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14살 때 좋았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할아버지의 정치하는 모습을 보면서 좋은 정치가란 어떤 사람인가를 배웠을 것입니다. 청소년 시절, 자신도 좋은 정치가로 한 번 할아버지처럼 나라를 잘 다스려 보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왕이 되어 정치를 하게 되자 할아버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주 폭력적인 정치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나 사랑은 없어졌습니다. 나라는 혼란해져 버렸습니다. 지도자의 영향력이 이렇게도 많은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희망찼던 나라에 절망적인 상황이 순식간에 찾아 왔습니다. 웃음 소리는 살아지고 전국에 한숨 소리만 들렸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삼촌들에게 재산과 성을 골고루 나누어 주고 가셨는데 아버지는 그것을 다 차지하기 위해 삼촌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공포의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백성을 짓밟는 독재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권력욕이 많은 아버지였습니다. 아주 포악한 아버지였습니다. 한 명도 아니고 6명의 삼촌을 다 죽였습니다. 훌륭한 원로 정치인들을 죽였습니다. 14살이 되던 청소년 시절에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비극이 바로 어머니로부터 왔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은 북쪽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외 할아버지가 아합이고 외 할머니가 이세벨이었습니다. 왕이라는 이유 하나로 남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아주 욕심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였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복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겨야 한다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지금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북한과 같았습니다.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 그럴듯합니다. 그러나 이 사상은 김일성을 신격화, 신조화, 절대화, 무조건 화시키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김일성의 권위를 신의 절대적 권위로 인정하고 김일성의 교시를 신조로 삼고 살아가게 하고 김일성의 교시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기 때문에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라도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을 신격화 함으로 정치의 사유화를 꾀하고 이 사유화를 효과적을 만들기 위해 정치의 민족화를 외적 방패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북쪽 이스라엘이 이미 이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초대 이스라엘 왕이 여로보암입니다. 하나님을 통치 이념에서 제거해 버립니다.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섬기게 합니다. 제사장을 임으로 세웠습니다. 절기를 임의로 바꾸어 버립니다. 그러다가 이제 아합 때에 와서는 완전히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이런 할머니 할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이 사상에 체질화되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아시안 게임을 할 때 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비를 맞고 있으니까 울며 그 사진을 거두어 가는 운동선수를 보았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입만 열면 어버이 수령 김일성 위대한 김정일 동지가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우리 사고로는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60년 동안에 체질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고가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편하고 쉽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유다 나라 사람들을 다 바알 신을 섬기게 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정치 철학이고 인생의 사명입니다. 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입니다. 얼마나 세뇌되었겠습니까? 얼마나 바알 사상으로 체질화되어 버렸겠습니까? 비전향 장기수들 보았지 않습니까? 수십년 남쪽에서 자유를 보면서 살았는데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체질이라는 것이 쉽게 변화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체질을 개선하여 아하시야 왕같은 사람이 되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체질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패배의식이 아니라 은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절망적인 체질을 희망적으로 바꾸지 못합니다. 주어진 것을 절망의 기회가 아니라 희망의 기회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어진 체질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꿀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어느날 블레셋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처들어 와서 형들을 다 포로로 잡아 가 버렸습니다. 막내인 자신만 살아남았습니다. 갑자기 온 가정은 슬픔으로 가득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천년 만년 살며 세상을 호령할 것 같았던 아버지가 몸저 누워 버렸습니다. 여호람의 나이 20살 때였습니다.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나이 38살 때였습니다. 날마다 신음하였습니다. 이 2년 동안 중병에 걸려 신음하다 죽었습니다. 8년 동안 왕으로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백성들은 잘 죽었다고 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대신들은 폭군이었다고 왕실 묘실에도 장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우리 성도님이 이런 아버지를 두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늘 술을 먹고 술에 취해 살았던 아버지를 두고 계셔던 분이 있습니까? 감옥 생활로 평생을 보내었던 아버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다 부도가 나서 평생 도망자 신세를 살았던 아버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풍에 걸려 오래 동안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만약 아버지가 되면 아버지로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사람들은 신비하게 부모의 체질을 닮아 가는 것을 봅니다. 미워하면서 닮아 갑니다. 시집살이 해 본 사람이 더 시집살이를 심하게 시킵니다. 저의 아버님은 술을 참 잘 드셨습니다. 술만 잡수시는 것이 아니고 술 잡수시고 실수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마 저도 술을 배웠다면 아버지만큼 잘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술 잡수시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나는 어떤 경우도 술을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술을 먹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가정 체질을 희망적인 체질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나쁜 가정 체질을 얼마든지 개선시킬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장로님들이 교회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사가 되면서 저는 결코 그런 교회는 만들지 말아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힘이 없어 수모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끝까지 참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경험은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나오는 유다의 제 6대왕 아하시야는 체질 개선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22살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불행했던 가족 경험이 치유의 수단이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넘어뜨리는 마약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불행했던 가족 경험을 그대로 답습하는 사람이 있고 그 가족 경험을 개선하여 가족 체질을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불행했던 가족 경험을 그대로 답습해 버립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나 “배운 것이 도둑질 밖에 없다”는 말처럼 그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그대로 자신도 따라갑니다. 그가 왕이 되자 어떻게 하였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21장 6절을 보십시오.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21장 13절을 보십시오.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 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그런데 아하시야도 아버지와 똑같이 합니다.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대하 22:3)” “패망케 하는 아합의 집 교도를 좇아(대하 22:4)” “아합의 집 교도를 좇고(대하 22:5)” 하나님이 싫어하는 아합 가정 문화를 따랐습니다. 아합 가정의 풍습을 따랐습니다. 외할아버지 가정의 의식 구조를 비판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버지의 통치철학을 비판없이 수용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왜 그렇습니까? 신앙의 줏대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은혜를 망각하는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이는 그 모친이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22살이지만 한 나라의 왕이 되었습니다. 형들은 다 사로잡혀 갔고 자신만 살아 남았습니다. 왕이 될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 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잘나서였습니까? 21장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서 다윗의 언약을 생각하사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마땅히 사형시켜야 할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두시고 살려 두실 뿐 아니라 왕이 되게 하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 어머니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절망적인 체질을 희망적인 체질로 바꾸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개선 뿐 아니라 바꾸어집니다. 인생의 역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절망의 늪에서도 희망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장례 행렬을 하던 나인성 과부의 집이 예수님을 만나니까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자결하려던 간수의 집이 예수님을 믿으니까 온 식구가 세례를 받고 천국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우리 가정은 어쩔 수 없어, 나는 죽어다 깨어나도 변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장사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우상장사였다는 사실 하나로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아버지 야곱은 사기꾼이고 욕심장이였습니다. 얼마나 네명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체질적으로 얼마나 힘겨운 집안이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 불행한 가족 역사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회로 삼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아버지는 매독에 걸렸고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시름하였습니다. 아들이 넷이 있었는데 하나는 병으로 죽었고 나머지 셋은 결핵에 걸렸습니다. 이 때 임신한 아들이 베토벤입니다. 그는 17세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직 어린 소년이 동생까지 부양해야 했던 사람입니다. 30세부터 음악가의 생명인 귀가 이상하기 시작하여 만년에는 완전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넘치는 행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괴로움을 뚫고 나아가 기쁨을 발견했다"고 했습니다. 베토벤은 젊어서는 신앙이 없었으나 나이를 먹을수록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가정의 불행한 경험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불행한 가족 경험은 성숙을 위한 발판과 미래를 위한 교훈이 됩니다. 숨겨 놓고 불행의 씨를 키우는 오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삶의 간증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불행한 절망적인 체질을 희망의 체질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우리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개선의식을 가져야 합니다./상대적 개선의식이 아니라 절대적 개선의식/기준이 말씀과 말씀의 원리입니다.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인생은 더욱 절망의 끝으로 달려 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체질을 개선해야 합니다. 체질 개선을 위해서는 음식을 조절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지 말고 먹을 것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나쁜 습관과 우리의 삶을 좀먹는 사단의 세력은 만만하지 않습니다. 한 번 걸려 들면 쉽게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암세포처럼 생명을 죽이고 자기도 죽습니다.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에 보면 어머니가 꾀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바알신을 섬기는 이세벨의 딸로 유다 나라를 바알화 시키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자식을 잘 기르고 가정을 행복하게 하는데는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시대의 말로 한다면 오직 남쪽의 공산화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화신입니다. 철저히 사상적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주체사상을 철저히 학습한 간첩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장기수를 보면 얼마나 사상이 무서운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북한 공작원처럼 철저하게 북 이스라엘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여인은 아버지 어머니가 가장 악락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궁중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때 교육을 받은 여인입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사람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와 정략 결혼을 하여 아버지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 장본인입니다. 아버지를 이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게 하였고 정상적인 왕으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패역한 왕이 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신앙도 이데올로기가 되면 무섭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비참하게 파괴해 버립니다. 수단화 되어 버리면 무서운 도구가 되어 전쟁을 일으키고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화형을 시키고 수많은 사람을 악의 구렁텅이로 집어 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잘못된 신앙의 피해를 얼마나 많이 보고 있습니까? 잘못된 신앙에 의한 심각한 교회의 양극화를 그저 당연한 것으로 보게 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닮아가고 싶어하고 인기를 얻고 싶어하고 권력과 부를 축적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히 생각되지 않습니까? 은혜의 복음이 아니라 힘의 복음으로 변질되는 것을 아무런 부담없이 즐기지 않습니까? 수많은 전쟁이 종교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져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까?

아합의 집 교도를 좇으니까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집 다윗의 집의 가르침과 교훈을 좇지 않으니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아합의 비정상적인 경영방법, 아합의 폭력적인 정치 철학, 아합의 가증한 가정문화를 좇아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아합의 집같이 악을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합의 집과 같아지는 것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은 사람이 세상과 똑같은 가정, 세상과 똑같은 교회, 세상과 똑같은 기업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공중 권세를 잡고 자신의 통치권 속에서 자신의 통치 원리에 따라 순응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터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돌아 서야 합니다. 과감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희망의 열차를 타야 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적당히 물장난만 하면 안됩니다. 은혜의 바다에 몸을 맡겨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시 37:5-6)”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온전히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덴마크의 고독한 실존주의 철학의 창설자라 불리는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범한 두 가지 죄 때문에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 하나는 그 부친이 소년 시절에 너무나도 가난하여 유틀란트의 황량한 벌판에서 양을 치면서 심한 추위와 굶주림에 못 견디어, 언덕에 올라가 그토록 가혹한 생을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그 부친의 전처가 병으로 죽자 그의 하녀를 강간하여 임신하게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키에르케고르는 그 하녀가 낳은 8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형제 다섯 명이 일찍 죽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도 34살 이전에 죽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기 생일을 기록한 호적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고 호적을 조회해 본 사람입니다. 그가 아버지에 대하여 이런 수치스런 일을 안 것은 23살 때였습니다.그때부터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타락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원망하고 탕아생활을 계속하던 중 죄책감에 못 견디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25세 때 '레기네 올센'이라는 16세의 미녀와 사랑에 빠지면서 오랜 세월의 방탕은 끝나게 되었으나 그는 그곳에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고민과 우울증에 빠지다가, 무서운 고독과 고뇌 속에서 마침내 사랑했던 그녀를 저버리고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그는 그에게 있는 척추병(?)이라고 추측되는 질병의 공포와 함께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집이라고 생각했던 심리적 불안으로 말미암아, 고독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생을 맡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환경에 인생을 맡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떠했든 우리 하나님께 인생을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절망적인 체질에서 일어서 희망의 체질로 개선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던 길에서 우리는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도는 마지막 죽음 앞에서 주님을 만나 돌이켜 새로운 인생길을 잠깐 걷다가 천국으로 갔습니다. 아직 끝난 시간이 아닙니다. 돌이키기에 늦은 시간은 없습니다. 살인 자 도망자 모세가 여호와를 통해 새로운 인생은 산 것은 80세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받고 아들이없는 절망적 상황속에서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갈렙은 85세에도 절망하지 않고 저 산지를 내게 달라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지금 계속 절벽을 향해 굴러가고 있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영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3. 우리는 체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신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미래 동기 부여가 분명해야 합니다. 막연한 종말의식이 아니라 실존적 종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인생의 끝은 비참해 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체질을 개선하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절박한 마음을 가지고 개선해야 합니다.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담배를 피우면 10-20년 후에 나에게 심각한 피해가 온 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담배 피우는 체질을 바꿀 수 있습니다.

아하시야는 아합의 고리를 끊지 못했습니다. 마치 도박하는 사람처럼, 약물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아합 집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합의 아들 요람 즉 외삼촌과 함께 아람왕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아마 삼촌이 도와 줄 것을 말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민족의식이 발동해서 우리는 한 피 한 민족이니까 우리가 힘을 합해 중국을 치자고 말했을 지도 모릅니다. 깊은 수렁으로 같이 들어갑니다.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들어갑니다. 올무에 매입니다.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런 행위가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사람들의 보기에는 당연합니다. 외삼촌이 요구하는데 조카가 같이 도와주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외삼촌과 함께 외적을 물리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러나 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보시기에는 아합의 집같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참한 인생길에서 벗어날려면 세상의 관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신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중년 여인이 유혹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당시 세상의 가치관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고 즐기고 눈감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요셉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9)”라고 말합니다. 목사인 저도 때로는 세상의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은 이발하러 갔는데 이상합니다. 일반 이발소가 아닙니다. 가서 그냥 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 보지 않는다고 하나님도 보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음의 길로 간다고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시는 것은 아니지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탄식합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라고 했습니다.

아하시야는 그 전쟁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외삼촌이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을 기화로 병이 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삼촌 병문안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7절에 보십시오. 아하시야가 요람에게 가므로 해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므로 화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죽음의 위기를 겪었으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아야 했습니다. 일이 잘못되면 무엇인가 자신에게 잘 못된 것이 있지 않나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방법과 삶의 스타일, 성격과 습관이 문제가 있지 않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다 죽지 않나 이러다 망하지 않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원인 없이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적으로 잘못되는데도 여전히 그 습관과 방법, 신념과 철학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면 그것 때문에 더 어려운 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정에 끌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할 일입니다.

그곳에 갔다가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받았습니까?
임시의 아들 예후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패한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들어 쓴 하나님의 몽둥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의 방법이 통하고 하나님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역사는 진행되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안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셨습니다. 참고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그에게 권위를 주어 아합의 집을 청소하게 하였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예후가 아합의 집을 징벌합니다. 이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유다 방백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아합의 집에 동참했던 사람들입니다. 아하시야의 형제의 아들들을 죽입니다. 아하시야를 섬기는 자들을 다 죽입니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로 도망을 갔습니다. 예후가 끝까지 추적했습니다. 결국 남한의 대통령이 북한에 갔다가 북한의 폭력 정치에 반대하여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 의해 테러를 당한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와 같은 비참한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비참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1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고 23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합의 집을 따르다 보니까 결국 아하시야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하나님을 잘 섬겼던 할아버지 여호사밧 때문에 장사는 치루어 주었습니다. 10절에 보십시오. 어머니가 어떻게 합니까? 유다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려고 합니다. 사단의 전략이 무엇인지 알겠지요? 메시야 탄생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탄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타락할 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말씀하였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약속의 자녀가 메시야 인 것을 말씀합니다. 다윗의 언약 가운데 태어난 메시야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오늘날 사단은 우리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던 넘어뜨리고 유혹합니다.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후 11:14)”여 유익하고 편리하고 기분좋다고 유혹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꽃을 피우려면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우리의 죄악된 체질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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