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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이 넘치게 하소서 (롬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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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소망을 가지는 존재로 세상에 나옵니다. 어린아이는 학교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학생들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른들도 나름대로 소망을 품고 성취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거의 모두가 좌절과 실패의 쓴맛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망의 목표와 대상이 썩어질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한 소망의 근원인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갑니다.

사실 소망이 없는 인생처럼 불행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가리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우리에 게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 연한 기대, 혹은 [불안한 대상]을 향해  기대감을 가질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내일에 대한 기대도 없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 공의로우신 심판주인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어려운 일이 생겨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말씀을 믿으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 62:5)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라고 고백하며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안에서

하나님은 믿는 자의 소망의 근원이시고 소망의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시 73:24-26)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성경에서의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허락하신 미래를 확신한 가운데서 기다리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그 소망은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데, 단지 구약과  '소망의 하나님'(호 데오스 테스 엘피도스)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기쁘고도 확실한 기대와 간절한 소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실로 소망의 근원이 되십니다. 우리가 인생길에서 지치고 낙망할 때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자비하시고 의로우셔서 쓰러지고 넘어진 자에게 소망의 위로를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 뱀에 물려 고통당하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놋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고 바라볼 때 모든 상처와 고통이 사라지게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민 21:9).

이 세상은 슬픔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역경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악인이 오히려 잘되는 것 같고 불의와 압제가 승리할 것 같아 보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 중에서도 성도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남는 것은 공허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그의 가슴은 더욱더 허무해집니다. 세상에서 느낀 공허를 하나님께로부터 채움 받기 위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면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인은 세상에서 돌아와 성소에 들어갔을 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었고 깊은 영적 진리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도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는 절대로 하나님을 소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계속적으로 교제해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지속적인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쉽게 단절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라도 계속적인 교류에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관계가 소원했던 자라도 하나님과 조금이라도 함께하길 원한다면 그분과의 교제를 끊임없이 지속시켜야 합니다. 매일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그분께서 원하시는 경건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나아가 세속적인 소욕은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속적인 사고와 가치는 영적 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크고도 치명적인 방해물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하늘보다는 세상을 더 많이 바라보고 거기에 더 많은 신경을 쏟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좇아 일어나는 인간의 소욕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더욱 성경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악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창 6, 7, 8장),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창18:16-19), 고라 무리의 멸망(민 16장)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회고해 보면서 미래의 역사를 우리는 미리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즉 현재는 악인이 흥왕하고 의인이 쇠미하지만 미래에는 악인이 급속히 멸망할 것이요, 의인이 흥왕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한 영화를 누리는 것은 세상 복이지만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은 신령한 복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거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는 것은 그의 성품을 닮기 위한 노력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노력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 없습니다.

  데이빗 리빙스턴은 세기의 위대한 기독교인이요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다가 하나님이 부르심을 받아 그의 시신이 영국으로 옮겨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시키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수만은 군중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인이 외로이 혼자서 군중들 후미에 홀로 서서 가슴을 조이며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이 노인은 다름 아닌 리빙스턴의 친구 윌리암이었습니다. 그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러 가겠다고 나섰을 때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장본인이었습니다. 윌리암은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로 떠난 후 런던에서 큰  부자가 되었으며 오직 자기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윌리암은 리빙스턴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살았지만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성을 떨치며 이 세상을 사라지는구나....그러나 나는 비록 부자라고 말할 수 있으나 소망 없는 세상을 위해서만 살았으니 얼마나 부끄러운가"라고 한탄한 것입니다.

비록 리빙스턴은 가난하고 고생하며 선교지에서 보잘 것 없는 인생처럼 살았지만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윌리암은 부자요 세상에서 부러울 것 없이 살았지만 그는 소망 없는 인생의 누린 것입니다.(예화뱅크-인생의 소망은 어디에)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는 모두가 됩시다.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시니

바울의 기원과 권고가 포함된 축도 형식으로서 미래에 대한 소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쁨(카라)은 주 안에서(빌 3:1) 나타나는 신앙의 결과이며(빌 1:5), 성령의 열매(갈 5:22)입니다.

'평강'(에이레네)은 여러 가지 용례로 사용되어지는데 실제로 생명(조에)과 동일한 의미를 가집니다. 평강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시켜 주시는 그의 구원 사역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해 그 구원이 보증된 영혼의 내적인 평온 상태를 의미한다(Dunn).

'믿음 안에서'의 '믿음'은 교회의 조화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토대가 되면 모든 인간에게 기쁨과 평강을 가져다 주는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됩니다(Dunn, Godet).

  '찰스 스펄전' 목사는 어느 날 친구와 같이 농장을 지나다가 주고받는 이야기 가운데 웃음이 터져 나와 눈물이 나올 정도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갑자기 웃기를 중단하고는 '우리 이 웃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고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웃음은 보약입니다. 가식이 없는 한바탕의 웃음은 병과 고민을 씻어 버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일 앞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합니다. 그리고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커다란 은사일 것입니다. 진정한 웃음은 기쁨에서 나옵니다. 항상 기뻐하여야 합니다(살전 5:16).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고 믿었다고 합니다(롬 4:18). 아무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이라고 해도 소망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이삭은 이름의 뜻 그대로 웃음이며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근원이 되셔서 그를 믿고 바라는 자에게 믿음 안에서 기쁨을 주십니다.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즐거움의 기쁨'입니다.

(벧전 1:8,9)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을 우리의 삶에서 맛보기 위하여 소망의 하나님을 굳게 바라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신 까닭은 우리가 슬픈 환경에 처하게 되어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음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면 어떠한 역경에 처하더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의 특징 중 하나는 그 마음에 평강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일시적이나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영속적이며 또한 실제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살후 3:16).

성도의 삶은 어느 때든지, 언제든지 평강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늘 모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바다에 풍랑이 일어났을 때 제자들은 놀라 떨며 예수님을 찾아 깨웠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는 이미 해결 받은 것과 다름없다는 믿음이 약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풍랑을 꾸짖으사 잠잠케 하셨습니다(눅 8:22-25).

인생은 바다와 같고 풍랑은 일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풍랑도, 어떠한 폭풍도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 안에서 잔잔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또한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진정한 화해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한 자는 그의 죄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악과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진정으로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한 자가 되라'(골 3:15)는 사도 바울의 말씀은 성도의 삶이 평강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합니다.

  큰 슬픔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한 부형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부형님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10억 원에 가까운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사방에서 빚쟁이들이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 가운데에는 절친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그는 고가도로 밑을 지나갈 때면 도로가 무너져 내려앉아 그 밑에 깔려 죽기를 바랐고,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에는 교통사고라도 당해 죽었으면 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어버리면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죽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깊은 절망 가운데 있던 그는 한 친구에게서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날도 잔뜩 무거운 마음을 안고 주일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고 있는데 성령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네 체면을 앞세우느냐. 이 시간 너의 자아를 완전히 깨뜨리고 막벌이라도 해서 먹고살 각오를 해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네가 하나님 앞에서 훌륭하면 얼마나 훌륭하냐. 그 음성을 듣고 그는 깨어져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자아라는 우상을 깨뜨려졌고 그를 짓누르고 있던 걱정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마음속에 용기가 솟아나고 평안과 기쁨이 넘쳤습니다. 슬픔에 빠져 있던 그의 가슴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셨던 것입니다. 그가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을 자원으로 삼아 불가능에 도전하자 3년이 지난 뒤에는 그 많던 빚을 다 갚고 전보다 규모가 더 큰 사업체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얻은 평안과 용기로 인생을 재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충만케 하시니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삽시다.

  성령의 능력으로

기쁨과 평강의 근거가 믿음 안에서 시작된다면 소망 역시 믿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과 소망을 충만케 누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엔 뒤나메이 프뉴마토스 하기우)입니다. 여기서 '~으로'(엔)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라는 위치와 장소를 나타내는 처격임과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라는 도구적 의미를 지닙니다(Dunn).

'능력'(뒤나메이)은 일반적으로 '~할 수 있는 힘, 권능'을 나타내지만 '성령께서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 그리고 소망을 일으키는 경이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J. Calvin).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다가올 본향을 향해 우리의 소망을 넘치도록 가져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이 땅을 나그네로 살면서 오직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히11:13).

우리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세상과 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의 능력으로 하늘의 소망이 넘치도록 하게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침 안개와 같이, 들의 풀꽃과 같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 세상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기쁨과 평강을 영원토록 우리에게 부어 주십니다. 자신이 받을 축복과 앞으로 누릴 영생을 생각한다면 성도의 삶에는 당연히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샤르니라는 한 프랑스인이 나폴레옹 황제에게 밉게 보여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에게서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는 돌 조각으로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 하나가 고개를 들고 나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푸른 잎사귀에 부어 주곤 했습니다. 그 싹은 마침내 꽃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옆방에 면회왔던 죄수의 딸이 이 감옥 안을 들여다보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말했습니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황제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샤르니는 감옥에서 핀 꽃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기까지 가꾸었습니다. 소망은 생명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말고 전진하여야 합니다. 소망은 좋은 동역자입니다. (소망은 생명이다.-예화 뱅크)

한 소년이 다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소년을 안정시킨 뒤 소년에게 우유를 한 잔 가져다주었습니다. 소년은 그 우유가  무척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도 컵 가득히 들어 있는 우유를 마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습니다. 소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때문에 우유 한 잔을 가지고 늘 동생들과 나누어 먹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누나 이 우유 다  먹어도 돼요 ?" 그러자 간호사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지. 또  많이 있으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 선물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용기 없고 소망 없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 지혜, 건강 등을 가지고 당신의 소망을 마음껏 펼쳐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소망으로 인내하고 소망으로 즐거워하고 복된 소망으로 인내하며 소망의 하나님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안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시니 성경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는 삶을 사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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