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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아오라, 그리하면 돌아가리라 (슥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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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에 단 한번 우는 전설의 새가 있다. 그 울음소리는 이 지상의 어떤 노래보다 아름답다.
단 한 번의 노래를 위하여 그 새는 둥지를 떠나 가시나무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가 가장 날카롭고 긴 가시를 찾아 거기에 스스로 자기 몸을 찌른다.
그 순간 새는 죽어가면서 노래를 부른다. 자신의 목숨과 아름다운 노래를 맞바꾸는 순간이다.
그리하여 온 세상은 침묵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조차도 눈물의 미소를 짓는다" 이 의미 있는 잠언은 '가시나무 새'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시나무 새'는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단 한번뿐인 나그네 길에서 의미있고 가치있게 살기 원하는 우리 모두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에 단 한번 울음을 우는 새와 같고, 단 한번 절정의 꽃망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단 한 번의 노래는 어디에서 터져 나올까요? 그 단 한번의 절정의 꽃망울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터뜨려질까요? 맥컬로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절망의 현장에서 위대한 고통을 지불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펼치는 성경이 스가랴서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서는 어떤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까요?

얼마 전 대구 서문시장에 큰 불이 났습니다.
일순간 잿더미로 변해버린 삶의 현장을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면 됩니다.
스가랴서는 이런 사진 한 장으로 그 서막을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막에는 이런 글이 또렷이 새겨져 서서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슥1:1) 도대체 이 때가 언제이고, 어떤 상황이 펼쳐지고 있는 것일까요?
바벨론 제국에 망한 유대나라는 그야말로 초토화 되었습니다.
성벽이 무너졌으며, 성전은 훼파되었고 유능한 젊은이들은 다 포로로 잡혀갔습니다.(느1:3).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예루살렘, 짓밟힌 모습 그대로 무려 70여년이나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꾸는 것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레스란 왕이 바벨론 포로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조국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칙령을 발표했기 때문입니다.(B.C 538년).
이 소식을 접한 바벨론의 유대인들은 이 기쁨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시126:1)
출애굽 사건과 견줄만한 이 꿈같은 일로 말미암아 드디어 그렇게도 고대하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선, 무너진 성곽을 다시 수축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온신의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북쪽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저들은 의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후, 무려 14년동안이나 예루살렘을 재건하는 일이 중단되어 버렸습니다.(스4:1~24), 그러면 공사를 방해하고, 의욕을 꺽어버린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요? 동족입니다. 믿었던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을 중건하고, 성전을 수축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협력해 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믿었던 사람들에 발등 찍힌 격이 되어버렸으니, 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요? 다리오왕 이년 팔월은 바로 이때입니다.
나라가 망해 무려 70년 동안 방치되어 폐허가 되다시피 한 그곳에, 복구공사가 조금 진행되다가, 그것마저 중단되어 또 14년이 흘러버린 때입니다. 그러므로 '다리오왕 이년 팔월'은 절망의 때입니다.
잡초만 무성한 조국을 바라보며, 모두가 삶의 의욕을 잃고, 자포자기해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믿음의 끈'을 놓아버린 때입니다. 바로 그 다리오왕 이년 팔월에 하나님의 말씀이 스가랴 선지자에게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에게 들린 하나님의 첫 음성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슥1:2)입니다.
이렇게 피폐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 원인이 열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을 하나님은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열조'란 저 까마득한 '윗대, 선조'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이 본문에서는 바로 윗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뜻합니다.

지금 이 일들이 선대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현재의 이 처참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돌아오라, 그리하면 돌아가리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1:3)
그동안 열조들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나타났습니다. 비참한 상황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를 여기, 나에게서 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나의 후손들에게 이어지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만이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돌아간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돌아가는 것'일까요? 사실, '돌아오라'는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호소하는 듯 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자유의지는 내가 돌아가려고 결정할 수도 있고, 돌아기지 않으려고 결정할 수도 있는 '내 의지'를 말합니다.
분명 자신의 의지, 결단으로 돌아옵니다. 회개합니다. 그러나 그 의지, 그 회개속에 하나님의 감화가 있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돌아올 수 없다. 내 능으로 돌아올 수 없다. 오직 주의 신으로만 가능하다'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와 동시대에 활약했던 선지자가 학개라는 선지자입니다.
그가 학개서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 역사를 하였으니'(학1:14) 여기에 마음은 'mind'가 아니라 'spirit'즉 바람, 호흡, 영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흥분시키셨습니다. 즉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흥분'시켰습니다.
자신의 의지, 결단이 아니라 그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이 성령이 역사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흥분'시키는 성령의 역사가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성령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의 자리, 좌절, 절망의 자리에서 '흥분'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돌아오는 것도 내 힘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앞에 어떤 현실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스가랴, 학개, 스루바델 총독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 처참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잡초만 무성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 지 알 수도 없는 그런 피폐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곳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도 돌아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그리하면 돌아오리라'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흥분시키면 단 한 번의 절정을 터뜨리는 은혜의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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