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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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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강해를 쓴 메이나드 A. 펄스는 "만약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난다면 끝이 너무나 아름다웠을 텐데..."라며 아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불순종하던 요나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사랑하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사명의 자리로 갔기 때문이요, 자기 생각으로 다시스로 가다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니느웨로 갔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요나가 순종의 요나로 바뀌었습니다. 크나 큰 니느웨 성에서 단 하루 밖에 말씀을 선포하지 못했지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선포하는 메시지도 너무나 단순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을 신뢰하고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는다면 과거 소동과 고모라에 내렸던 심판을 40일 후에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메시지였지만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왕까지도 자신의 권위와 명예의 상징인 조복을 벗고 베옷으로 갈아입으며 회개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서는 분위기가 아주 딴판입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도대체 뭐가 싫고 뭐 때문에 분노한다는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자신이 선지자로서 선포해 놓은 복음의 성취보다는 민족적인 감정이 더 앞서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가 일본선교에 열심히 참여하다가도 한.일간에 분쟁이 생기면 "그것들 다 죽어야 돼.."하는 식입니다. 유대백성이 아닌 이방백성이 구원받고 복받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은 멸망받아야 할 민족인데 하나님의 은혜라니 말도 안되는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나는 은혜 받아도 좋지만, 당신 은혜 받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복 받아도 좋지만, 다른 사람이 그것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복 받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모습이 나의 모습이요 우리들의 모습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요나서를 시작하면서 먼저 이 말씀이 나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듣겠노라고 아주 어려운 다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마음 변치 않기를 축원합니다.

성도여러분, 말씀을 듣고 제일 은혜가 될 때가 언제인가요? 그것은 바로 오늘 저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인 줄로 믿습니다. 반대로 시험이 언제 되던가요? 그것 역시 이 말씀이 나를 향해 하는 말씀이라고 여겨질 때 시험이 들지요. 그래서 은혜 받는 일과 시험드는 일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인데, 어떤 사람은 시험충만해서 가는 거예요. 예배 마치고 인사 할 때보면 얼굴이 벌개가지고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는 모습을 보면 참 측은해요. "오늘 은혜받을 기회를 놓쳤구나" 하고 말입니다.

2절을 보면 왠지 모를 마음의 분노가 막 생깁니다. 도대체 이게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람의 기도인가 하고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성도의 신앙 행위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잖아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요 내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시간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고귀한 기도의 행위가 하나님을 향해 불평과 불만을 마구 쏟아내는데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터무니 없는 항의와 독선적인 분노, 나아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어들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는 요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처음엔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마치 숙달된 조교같이 행동하는 것 말입니다.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지요. 지금 요나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면서 참으로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기도의 시간이 자신의 불평을 늘어놓는 기회인것 처럼, 자신의 계획과 의도대로 되지 않은 일에 대하여 하나님을 책망하는 시간처럼 여겨질 정도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 이러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내 얘기를 들은것입니까? 안 들은 것입니까? 나는 유대인은 좋아하지만 이방인이 복 받는 꼴을 못 보겠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제가 다시스로 도망간 것 아닙니까?" 이젠 자신의 잘못된 행동까지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차라리 하나님 뜻대로 하느니 내가 죽어버리겠다는 장면에선 요나의 강팍함의 극치를 보게 됩니다.

가끔씩 성도들의 모습에서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볼 때가 있습니다. 속회를 조정하거나 선교회 임원을 맡기려고 하면, 혹은 권사나 장로로서 추천이 되지 않으면 얼굴이 편치않거나 전화를 통하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요. 그러면서 사족을 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그렇게 안해 주시면 저 다른 교회로 갈지도 모릅니다..." 이쯤되면 완전히 협박 수준이지요. 사실 장로 추천에서 제외되거나 당회 투표에서 떨어진 후보들이 교회를 옮겼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가장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줄로 믿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선언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전 12: 13)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기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도 있지 않습니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할렐루야!

구호는 "주님 뜻대로" 해 놓고, 행동은 "내 뜻대로" 해서 문제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모습이요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린 자신이 꽤 신앙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내가 올해 벌써 25년째 예수를 믿고 있어.... 내가 집사 된지가 10년이요 권사 된지가 10년인데.... 그렇게 관록만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는 이제 살고 싶지도 않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하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하나님 앞에서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욕심에 무엇이 채워지는가를 기대하면서 하는 교회생활이라면 헛수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 모든 생각과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 뜻대로 살기를 원하는 목적을 가지셨다면 오늘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삶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막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하나님 앞에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막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이 요나 아니예요? 놀랍게도 주님께서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요나야, 그게 옳은 일이냐?

사실 우리가 인간적인 생각을 한다면 이것은 정말 두들겨 맞아도 이것은 시원치 않은 일입니다. 어디서 하나님 앞에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부드럽게 말씀하십니다. 지금 네가 내게 화내는 일이 옳은 일이냐? 부드러우신 주님의 반문이 여기 있습니다.

저는 이 놀라운 주님의 모습이, 이 놀라운 주님의 반문이 요나를 새롭게 변화시킨 줄로 믿습니다. 세상일 하다보면, 더구나 주님의 일 하다보면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다 쏟아놓으면 속을 시원할 줄 모르지만 그것으로 사명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회장님들 지난 둘째주에 모여서 1시간 반 훈련할 때 그런 말씀 드렸어요. 여러분들이 속회를 인도하다보면 속이 뒤집어 질 일 많을 것이고, 하고 싶은 얘기가 목구멍까지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을 거예요. 이것은 내가 못 참고, 이것은 내가 해야 된다고 그렇게 마음의 몇 번의 다짐을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그거 입 밖에 나오면 그걸로 끝이예요. 바보가 많아서 말 못하는 것이 아니고, 할 말을 못해서 못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바보는 아니잖아요. 주님, 온유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다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가 우리의 삶의 중심에 있는 거예요. 교회건물 제일 높은 곳에 십자가가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해가 안 될 때, 우리가 사랑할 수 없을 때,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도저히 용납이 안 될 때, 십자가를 보는 거예요.

그런 너를 사랑했어. 생명을 다 해서 그런 너를 사랑한거야. 그런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사랑해봐.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줄 믿습니다.

주님의 부드러우신 반문이 들립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 자신을 바라보게 하는 사랑의 반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요나야, 네가 너의 민족 이스라엘을 사랑한 것처럼 내가 이 이방민족, 앗수르민족, 니느웨백성들을 사랑하는 것도 네가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냐?

네가 복 받는 것도 좋지만, 저 사람이 복 받는 것을 원한다. 나는 김집사 복 받는 것도 원하지만, 박집사가 복 받는 것도 내가 원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예요. 너는 우리만 복 받는 것이 좋겠지. 너는 우리만 잘 되면 좋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그게 아니야. 부모님은 자식들이 다 잘 되는 것을 원하시지요.

다음 주일이 설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명절은 부모님을 위해 특별한 사랑을 보여드리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1.1.2 중보기도 카드에 어머님이나 아버님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을 보여드리면 좋겠습니다. "이것좀 보세요" ‘이게 뭐냐?’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기도카드인데, 어머님 이름을 위해서 제가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형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어요.’

요나가 그 큰 니느웨성에서 하루 밖에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았지만, 니느웨성이 왕으로부터 무너진 것처럼 강팍함, 교만함이 쓰러진 것처럼 여러분들이 여러분 형제들에게 부모들에게 몇 마디 하지 않지만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이 충만하고, 여러분의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면 몇 마디 되지 않는 그 말씀 속에 그들은 메가톤급의 충격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어머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이, 그 몇 마디 안 되는 그 말이 어머님의 심령을 울리고, 어머니의 두 귀를 울리고, 우리 형제들의 삶을 흔들고 진동시키는 그것이 아마 진정한 최고의 선물이 될 줄로 믿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성냄이 합당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 하면서 화내지 않습니까? 성내지 않으십니까? 틀어지고 삐치고 협조하지 않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자기 중심적인 행동을 주님은 반문하고 있습니다. 지금 네가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해 놓고, 지금 도대체 네 중심대로 사는 지금 네 모습이 합당하냐는 거예요.

여러분, 2절을 읽어보면 거기서 제일 액센트가 뭔지 아세요? 내가, 내가, 내가, 내가, 요나는 4번이나 반복해 놓고, 지금 하나님 앞에 내가 당신에게, 내가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런 것 싫어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내가 자기를 끊임없이 내세웁니다. 예수 안에 내가 죽어야 하는데, 평소에 죽은 것 같았는데 어떤 일을 해 보면 자기가 확 살아나와 가지고 판을 다 깨는 거예요. 주님이 반문하고 계십니다. 너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해 놓고, 너 도대체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니?

자기 중심적인 기도를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너 지금 도대체 기도가 뭔지나 아니? 기도한다면서 실상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이게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 아니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 하기도 전에 기관총처럼 쏴 붙이는 거예요. 그것이 기도인 줄 착각하고 있는 요나 같은 우리들을 주님은 말씀합니다. 넌 지금 기도가 뭔지나 알고나 하는 거냐?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의 과거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이 뻔뻔한 요나는 주님은 반문하고 계십니다. 철저하게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또 변명하고, 또 변명하고, 또 변명합니다.

최근에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던 한 분의 모습도 이제는 우리가 안타까워하고, 짜증이 나는게 뭐예요? 끊임없이 변명하는 거잖아요. 끊임없이 끌어들이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다 보니까 이제는 국민들이 더 이상의 관용을 베풀 마음이 없어졌어요. 차라리 이거 제가 잘 못한 것입니다. 이거 제가 잘 못했습니다.

연구원들의 수정란 기증은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그렇지, 그 사람의 말이 맞을거야. 나중에 보니까 보고를 받았어요. 나는 보고만 받았지, 저는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까 자기 차에 태워서 병원에 가서 난자채취수술을 받게 하고, 그 자기 차에 태워서 데리고 갔어요.

하나하나 들출 때마다 수많은 거짓말들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 이제는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 정도입니다. 제가 제 칼럼에 그렇게 썼어요.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던데, 그 양반은 날개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가 자기의 잘 못됨을 오히려 하나님께 역정을 내고, 합리화까지 하는 이 요나의 모습, 우리가 누구를 탓하는 그런 탓하는 시대는 이제는 필요하지 않아요. 정좌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습니다.

주님 나의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성내는 나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온유함으로 응답하시는 주님 앞에 내가 무릎을 꿇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이 우리의 무례함과 우리의 독선적인 모습까지도 녹아지게 하고, 변화하게 해서 다시금 주님의 사랑에 붙잡힐 수 있는 그런 성도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내 중심, 내 방법이 언제나 앞섰던 것을 회개합니다. 내 뜻대로 결정되지 않으면 그것은 잘 못된 것이고, 그것은 참여할 수 없고, 동의 할 수 없고, 협력할 수 없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민족 사랑은 할 줄 알았지만, 타민족 사랑은 아니라고 했던 그러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여겨졌던 요나의 모습이 철저하게 깨어지기 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순수함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 뜻 대로 살기 원합니다. 이 순수하고 바른 모습이 이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결단이 되게 하시고, 고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함과 무례함 속에서 또 한 번 사랑으로, 또 한 번 온유함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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