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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치유의 사랑 (요 21: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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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치유의 사랑 (요21:24-29)

(요약) 

주님께서 실망한 제자들의 그들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시고 사명 맡겨 주셨듯 지금도 죄인의 심령을 치유하신다. 우리를 치유하는 은혜는 먼저 용서의 복음이다. 그러므로 믿고 정죄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능력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듣고 은혜를 받으라. 그리고 기도의 체험이다.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라. 그리고 성령의 위로이다. 그러므로 은혜생활을 하라. 그리고 사명의 실천이다. 사명의 열심 속에서 더 강해진다. 그리고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과 매일 주님과 동행함에서 항상 치유 속에서 살게 하신다.

(설교)

이 시간에 예수님의 치유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많은 마음의 상처로 고민하게 됩니다. 이 상처는 쉽게 치유 되지 않고 일생을 안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을 부인하고 스스로 실망하고 낙심한 이러한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사랑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또 다시 사명 맡겨 주셨습니다. 혹시 실망하는 성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우리 주님의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좋은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주님의 치유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1. 먼저 관용하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5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얘들아" 이 말은 대단히 애정 어린 호칭임과 동시에 成人 제자들을 어린 아이들로 불러 주시는 말씀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너무 심각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왜 그렇게 심각합니까? 자신들을 어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이게 뭡니까? 책임감도 의리도 신앙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책임감도 의리도 신앙도 그 무엇도 없는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들은 주님의 제자 될 자격도 없는 자들이에요.’ 이런 실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무 심각해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얘들이니 잘못할 수 있어요. 가볍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질문은 우리 같이 놀자, 우리 같이 고기를 잡자. 편한 친구가 되자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삶을 가지고 너무 심각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창조의 목적과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자기의 복락과 즐거움에 동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상을 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히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무슨 거창한 일을 해야 상 받는 줄 알지만 생각부터 바꾸세요. 먼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만사를 하나님께 맡기고 가장 마음 편하게 먹고 사는 것을 바라십니다. 더 바라신다면 하나님의 그 안식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훌륭하게 살지 못했고 큰 업적 없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혈 공로 안에서 마음 편안함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상이 큽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 안에서 보혈공로로 화평을 누리며 맡김으로 마음의 쉼을 얻으며 성령으로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한 실망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2. 다시 찾아와 기회 주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은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6절) 말씀하셨습니다. 3년 전 제자들이 부름을 받았을 때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을 때 예수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두 배에 가득히 잡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번에도 다시 나타나셔서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하시며 그 기적을 다시 맛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시 함께 하시고 또 다시 불러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이번에는 그물도 찢어지지 않아 고기를 놓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몇 마리를 잡은 것까지도 알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가 잘못했어도 버리지 않으시고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동안 마음으로는 천 번 만 번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왜 이렇게 건재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일으켜 주시고 붙드시는 주님의 사랑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경험으로 내가 잘 나가는 때보다 넘어지고 쓰러질 때 더 영적으로는 성공적일 때였습니다. 저의 삶은 실패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그만큼 진리의 노하우로 가득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 안에서는 실패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은 신앙 공부요 인생 공부입니다. 사람은 탓하고 윽박지르지만 주님은 너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내가 도와주리라. 다시 시작하자고 말씀하십니다.

3. 다가오는 따뜻한 사랑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주님은 세 번째로 "와서 조반을 먹으라"(12)는 말씀하셨습니다. 실패와 좌절과 피곤함과 배고픔에 지친 제자들에게 따뜻한 떡과 생선을 대접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우리도 주님에게서 음식 사랑을 배우십시다. 음식은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입이 열리면 마음도 열린답니다. 그래서 사람 모이는 곳에 먹이면서 전도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없고 교회 가는 것을 마음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언제나 음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물론 사회인들도 교회를 가깝게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주님의 치유는 따뜻하게 다가오는 느낌의 치유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인데 이 사랑을 경험하면 치유되지 않을 심령이 없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청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엘리야를 먹이시고 제우시고를 반복하시되 정다운 음성으로 몸을 어루만지시며 깨우지 않았습니까? 이 주님이 어루만져 주심이 곧 치유입니다. 사51:11에 “여호와께 구속된 자들이 돌아와서 노래하며 시온으로 들어와서 그 머리 위에 영영한 기쁨을 쓰고 즐거움과 기쁨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이다” 하신 말씀을 경험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상처를 이해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네 번째로 하신 말씀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의 마음에 숨어 있는 상처를 이해하심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했지만 순간적인 실수의 결과는 뒤바뀐 상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의 사랑이 그 반대로 표현되거나 인정받을 때 얼마나 괴롭습니까? 사극에서 궁녀들이 왕을 위한 것들이 오해 되어 사약을 받을 때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중심을 아십니다.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자기중심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 질문을 통해 베드로가 주님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숨은 상처가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 못할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 못합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까지도 이해 못하고 조롱할 것 같으니까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 상처 때문에 정상적인 생활도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대답과 같이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이 내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그 순간 마음의 상처가 다 치유됨을 경험합니다. 이 시간에 주님이 나를 다 아신다는 믿음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5. 사명 속에서 치유는 더 적극적이 됩니다.

주님께서 다섯 번째로 하신 말씀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제자들이 사명을 부여 받을 만큼 실망이 사라지고 치유되었을 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이런 면도 보는데 즉 마음의 치유는 사명감에 타오를 때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에 불타는 심령이 되면 상처받으려야 받을 틈조차 없습니다. 사명에 불타는 사람은 자기를 초월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명으로 받는 고통은 도리어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다.

자기 사명에 충실해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마음은 물론 육체도 튼튼하게 하십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부요하게 하십니다. 전도 간증하는 분들 보세요.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말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하신 말씀이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명 속에서 더욱 온전히 치유하십니다. 더 강하게 하십니다. 기쁨을 주십니다. 더 가깝게 만나 주십니다. 저 하늘의 상의 그 부요함이 지상을 살 때 우리 마음에 실상으로 부풀어 오르기 때문입니다.

6. 주님은 십자가 고난 속에서 더 온전히 치유하십니다.

주님의 여섯 번째 말씀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노년에 주를 위해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말을 들은 주님을 배반하여 무거웠던 베드로의 마음이 다 치유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주를 위해 죽는다니 그동안 주님을 부인했던 것 다 갚는 것 아닙니까? 조금도 미안할 것이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남의 일에까지 참견했던 농담조의 자유로운 그의 언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진리는 우리의 상한 마음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으로 더욱 온전히 치유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 그 속에서 상상할 수 없이 부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6:22-23) 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 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하고 충성할 때 주시는 치유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7. 주님과 동행함으로 항상 치유 속에서 살게 됩니다.

주님의 일곱 번째 말씀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었습니다(19,22). 주님은 요한의 앞날을 묻는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남 상관하지 말고 내 인생에 관심 두라는 분부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같이 순종하며 주님과 함께 사십시다.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이 말씀처럼 우리 혼자 인생길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같이 갑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언제나 즐겁습니다. 기쁩니다. 행복합니다. 위로가 넘칩니다. 주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같이 천국생활을 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만국을 소성하고 치유하시는 잎사귀가 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에서 실망하고 낙심되는 상처 속에 있으십니까? 이 시간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을 치유해 주시던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찾아 오셔서 우리를 용납하시고 불러주시고 먹여주시고 이해하시고 능력 주시고 더 깊이 만나주시고 함께 하시며 크신 사랑으로 여러분을 치유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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