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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 제자와 함께하는 성령 (요 1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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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언덕교회의 목표는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언덕'입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실천방안인 제자훈련에 대하여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제자훈련과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삶 사이엔 긴밀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제자훈련하면 훈련교재를 가지고 열심히 성경을 배우는 지적 훈련을 연상합니다. 물론 그런 내용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 제자훈련은 언제나 그 이상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인격적 만남, 제자들의 성품과 삶의 변화 그리고 제자로서의 능력있는 사역을 포함합니다. 제자훈련이 성경지식을 축적하여 머리만 크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매우 비극적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약속을 해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셔서 그들과 늘 항상 함께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게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참 제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다(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혜사에 대하여 약속하시기 전에 과연 참 제자란 어떤 존재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아주 짤막한 말씀에 심오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참 제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단순히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식과 사랑을 혼돈하면 안됩니다. 물론 예수님에 대한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소중한 자산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두뇌와 지성이 지옥에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풀어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지성은 하나님 형상의 일부분입니다.

그러나 지식이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식 자체로 끝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여 바울은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전 13:2).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 없는 지식은 매우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바울이 잘 경고한 것처럼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고전 8:1).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아프게 한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은 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대제사장, 장로, 율법학자, 거짓 선지자,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한국교회를 돌아보아도 한국교회를 깊이 병들게 하고 심히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바로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수요일 오동석 목사님의 말씀은 정말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익숙한 삶과 성숙한 삶을 구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경이나 기도 등 신앙생활의 다양한 측면에 익숙해지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숙이란 오늘 본문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말로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그 점에서 너무나 아름다운 장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세 번 던진 질문을 잘 아시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잘 혼돈한다는 점입니다. 이런 혼돈의 배경엔 에로스를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에로스란 자신에게 너무나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열렬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 상대방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일정정도의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희생과 헌신 때문에 내가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에로스와 진정한 사랑이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지점은 그 희생과 헌신이 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순간입니다. 에로스는 그 지점에서 멈춥니다. 결국 상대를 버리고 자신을 택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더 나아갑니다. 자기를 버리고 상대를 택합니다. 예수님이 무력하게 체포되어 재판정에 서게 되고 주변사람들이 '너도 한 패가 아니냐'고 묻는 순간 그는 바로 그 기로점에 선 것입니다. 그 결정적 지점에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자신을 택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이 에로스였음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자기 사랑의 방편일 뿐이었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이용한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착각에 빠지지 않고 에로스와 진실한 사랑을 분별하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저는 요즘 다시 본회퍼라는 분을 생각하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는 1930년 24세라는 약관의 나이에 베를린 대학교 신학교수가 될 정도로 천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장래가 확실하게 보장된 탁월한 지도자 감이었죠. 그는 매우 비극적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히틀러가 등장하면서 독일은 진정한 기독교와 유럽문명 자체를 위협하는 악마적인 존재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본회퍼를 아끼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하려고 애를 씁니다. 하여 1939년 미국으로 피신을 시키죠. 그러나 그는 얼마 안 있어 독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 때 라인홀드 니이버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내 동족이 시련을 당할 때 동참하지 않는다면 전후(前後) 독일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재건하는 작업에 참여할 권리를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조만간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두려운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문명의 생존을 위해 조국의 패배를 바랄 것인지 아니면 조국의 승리를 염원하는 나머지 우리의 문명을 멸망시킬 것인지 말입니다, 나는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안전한 곳에서 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는 1945년 4월 9일, 연합군의 손에 의해 해방되기 바로 몇 일 전, 히믈러의 명령에 의해 수용소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게 됩니다. 그 해 7월 27일 런던 홀리 트리니티 교회에서 그를 추모하는 예배가 열렸습니다. 참여자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충성스럽고 용감한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신 것은 악마적 정권의 범죄 행위를 구속하고 유럽 문명을 재건하는 데 필요한 정신을 회생시키기 위함이었음을 느꼈습니다.

그의 순교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그의 주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지금 까지 인도된 데로 걸어 온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고 있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점을 추호에도 의심해선 안됩니다. 지금 까지 저의 삶엔 하나님의 자비가 차고 넘치도록 충만하였고, 저의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분의 용서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시를 썼습니다. 그는 그 시에서 한편으론 주변 사람에게 영웅적인 사람으로 칭송 받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론 자기 내면에 있는 두려움과 연약함 때문에 지쳐있는 자신의 이중성에 대한 고뇌를 털어놓습니다. 그 시의 결론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이 적막한 질문은 나를 끝없이 조롱한다/ 그러나 내가 누구든지 간에, 당신은 아십니다. 오 하나님! 내가 당신의 것임을!'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에서 말할 수 없는 행복과 기쁨을 맛봅니다. 그 역시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2. 참 제자는 보혜사 성령을 받게 된다(16-17)

예수님은 진정한 제자들이 누리게 될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여기서 보혜사(保惠師)란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parakl tos)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위로자(comforter) 혹은 상담자(counsellor) 등으로 번역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 곁에 서서 그의 친구가 되 주며 그를 자문하고 도와주며 그가 피고로 법정에 서게 되면 그를 위해 변호해 주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곁에 계시면서 보혜사의 역할을 해주셨습니다(요한일서 1:2). 예수님의 약속은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게 되면 다른 분이 오셔서 그 보혜사의 역할을 대신 해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부연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은 진리와 관련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생각나게 합니다(요 14:26). 예수님을 증거하는 능력을 베푸십니다(요 15:26).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세상이 갖고 있는 잘못된 견해들을 책망하여 교정하십니다(요 16:8-11). 제자들을 진리가운데로 인도하고 예수님에게 들은 데로 장래 일에 대하여 알려주시며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제자들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수요일 경찰청교회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 후 지난 번 언덕에 와서 설교를 해주셨던 홍영기 치안감 그리고 교회 일군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홍 치안감은 이런 간증을 하더군요. '제가 골초였습니다. 담배를 끊어 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습니다. 어깨에 파스를 붙이고 다녀보기도 하고 금연초를 펴대기도 했습니다. 별 소용이 없더군요. 그런데 예수님을 진실로 믿게 되니까 어느 날 그냥 피고 싶지가 안아지더군요.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저 자신도 놀랐습니다'. 물론 담배 피고 안 피는 것이 신앙의 본질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건강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문제이지요. 하지만 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예수님 믿고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참 좋은 경험입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다른 간증을 하나 더 했습니다. '앞에 여성도님이 계셔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제가 술자리에 가면 항상 제 옆에 제일 예쁜 여자가 늘 앉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 곁에 늘 앉아 계시는데 그 꼴을 보면 뭐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잠시 후엔 바로 그 여성도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희가 같은 교회를 다니는 데요. 하여튼 홍 국장님은 예배 때마다 뒷자리에 앉아서 늘 우신 답니다'. 그 분은 이렇게 답하더군요. '제가 찬송만 불러도 눈물이 나는 이상한 병이 걸렸습니다'. 참 듣기 좋은 담소였습니다.

이렇게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이 눈치채게 됩니다. 이런 삶은 모든 제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 당시의 열두 제자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20에서 벌써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제자들을 통해 제자가 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보혜사 성령을 12제자에게만 주고 그들 통해 제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는 주시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처음으로 임할 때 12 제자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던 120 명이 함께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된 제자들도 모두 성령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제자란 '배우는 사람(마테테스; 만타노=배우다)이란 뜻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그리스도인 중에 특별한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보혜사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열망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언덕교회에도 이런 열망이 넘치길 바랍니다.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사를 둘러보면 성령과 관련해서 많은 폐해가 있어 왔습니다.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못된 짓을 골라하는 경향성이 있어 왔습니다. 감정만 너무 뜨거워 성경말씀은 고사하고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하여 교회를 시끄럽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했습니다. 이런 데 몇 번 덴 사람들은 성령이란 말 자체에 매우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사모하는 열정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맙시다. 그런 병폐를 극복하는 길은 보혜사 진리의 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르게 보혜사 성령을 받아 그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언덕에 그런 열망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그 길은 앞서 이미 살펴본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길과 관련하여 대조법을 사용해 넌지시 부연설명을 하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므로, 그분을 맞아들일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것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과 너희 즉 제자들을 대조하시고 계십니다.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보혜사 성령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현대 한국교회의 슬픈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습니다. 왜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는데 진정으로 보혜사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이처럼 찾아보기가 어려운가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너무 가깝게 지내다가 물들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성령은 본질적으로 같이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라고 말할 때 단순히 모든 사람들 혹은 물질세계나 문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세상은 하나님이 미워하시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선언한 바가 있습니다(요 3:16). 그런가 하면 가나 혼인잔치 집에 참여 하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셔서 하객들을 즐겁게 해주셨습니다.

제자들과 적대관계에 있는 세상이란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힘을 말합니다. 요한1서 2:15-16은 그런 세상과 결별할 것을 권면합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안에 아버지의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의 자랑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A.W 토저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해서 세상을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 그리고 '그 본성에서 비롯된 모든 것'이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본성은 부와 성공 그리고 지위와 명성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으로 불타오릅니다. 이런 욕망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혹하고 압박함으로써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방해합니다.

이런 욕망이 아주 흉악한 모습으로 그리스도인과 교회에 찾아온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경건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뒤집어쓰고 찾아올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통해 내가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입니다. 철저히 우리 안의 세상과 싸워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갈 6:14)'. 그는 세상과 확실히 결별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테레사 수녀가 미국의 어느 공항에 있을 때 한 기자가 다가와 질문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전할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는 조금도 주저 없이 답했습니다. '그래요. 미국인들은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막연해 보일지 모르지만 심오한 권면입니다. 세상과 결별할 수 있는 내적 힘 역시 기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이렇게 기도합시다. '나로 하여금 세상과 결별하고 성령과 동행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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