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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Ⅵ)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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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구(欲求) 중에 불교에서는 욕계삼욕(欲界三欲)이라고 해서 욕계의 세 욕심 즉, 음식욕, 수면욕, 음욕이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심리학에 있어서는 선천적으로 규정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구성을 소질(素質)이라고 합니다. 소질이 현실적 활동이 되어 나타나려고 하는 면에서 경향(傾向)이라고 합니다.
경향이 충족되지 못한 것을 요구(要求)라고 합니다. 이 요구가 의식에 반영된 것을 욕구(欲求) 또는 욕망(慾望)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기본 욕구 중에는

① 식음(食飮)의 욕구
② 이성(異性)의 욕구
③ 안전안정 (安全安定)의 욕구
④ 공포 탈강(恐怖脫降)의 욕구 등으로 널리 속용(俗用)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구 중에 항존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의식주(衣食住)의 욕구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우리와는 다르게 식의주(食衣住)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식주는 우리 인간들의 보호 본능의 철저한 수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기본욕구인 의식주에 무관심하라는 말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기본 욕구를 우선순위에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Ⅰ. 인간의 보호 본능적 수단의 패러다임 (paradigm)을 교대하라는 말입니다.

패러다임이란 말은 ① 사물을 보는 방법 ② 문제를 삼는 방법 ③ 문제를 푸는 방법의 총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존 패러다임에 문제가 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생겨나는 현상을 패러다임의 교대 현상이라고 합니다.
본문 6장 30-31절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존재하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 버려지는 하찮은 들풀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들풀이 자라는 들판의 영광이 솔로몬의 궁전의 영광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를 가지고 염려하는 자는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일축 했습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염려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욕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1) 세상에 대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 {염려}(메림나오, )는 '분열되다', '나뉘다'는 뜻의 메리조( )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여기 {염려}는 근심이나 걱정이 가득하여 마음이 분열된 상태를 말합니다.
마태복음 13장 12절에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염려 가운데 주체는 의식주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한다고 하였습니다(마 6:25).
이 세상의 염려 중의 다른 하나는 돈인데 이것 역시 의식주에 속한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락에 빠집니다. 그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딤전 5:6). 쾌락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재리의 유혹에 어두워진 자들입니다(딤후 3:1-5). 이런 사람들은 마침내 주를 떠납니다.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2) 의식주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먹는 문제 때문에 염려한다고 하였습니다(마 6:25). 사람들은 입는 문제 때문에 염려한다고 하였습니다(마 6:25). 사람들은 이런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손해를 입습니다.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마 6:25). 주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하였습니다. 공중의 새들도 들에 핀 백합화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한 우리 생명 보존에 등한히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마 6:26). 이러한 염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웅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 6장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Ⅱ. 이방인들과의 가치기준의 차별화를 요구 하는 말입니다.

본문 6장 32절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방인들}이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이방인들의 의식구조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부동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지식이나 의(義)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찮게 여기고 무익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오직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평안하게 쾌락만 추구하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에 신에 대한 소망이나 기대도 없습니다. 더욱이 신을 섬긴다는 것은 저들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들은 철저히 의식주로 육신을 가득하게 하는 것만이 행복의 기준이 됩니다. 의식주를 초월한 신앙적 자세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불안과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합니다. 그 마음이 어둡습니다. 따라서 표정이 어둡고 불안하고 말과 행동이 성도답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불신자와는 차별화 되어야 할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자기보호본능의 수단으로서의 의식주를 걱정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걱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러한 염려가 합당치 아니합니다.
시편 91편 2-3절에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했습니다.
② 하나님은 그의 전능하신 속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③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시는 인지작용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했습니다.

Ⅲ.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것입니다.

본문 6장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먼저}(프레포스, )는 '첫째', '첫 번', '우선'등의 의미로 시간적으로 제일 먼저를 의미합니다. 시간과 사건(일)에 있어서 최우선을 의미합니다.
{구하라}(제테이테, )라 함은 '찾는다', '찾아 헤맨다', '조사한다', '목표로 삼는다', '갖고자 애쓴다'(제테오, )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령사입니다.

1)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의 나라}(텐 바실레이안, : The Kingdom of God<The Kingdom of heaven>)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통치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기를 원합니다.
①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중생 받은 개인의 영혼입니다(요 3:3, 5). ②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가정(행 16:31)입니다. ③ 성령께서 친히 주장하시는 교회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가 세우신 교회운동을 통하여 전개해 나가십니다(마 16:18).

예수님의 갈릴리 선언의 첫 번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마 4:17, 막 1:15).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었습니다(마 28:18-19).
하나님의 나라의 마지막 성취는 천국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2)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본문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여기 {그의 의}(텐 데카이수넬 아우툰, : His righteousness)}는 '자비', '옳음', '구제' 등을 의미함인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본질적 의미는 예수 자신입니다. 따라서 예수 자신의 대속의 십자가가 '그의 의'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한 의로 나타났습니다(롬 3:21). 예수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없이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굳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예수에게 전가되고 예수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공로 없이 된 은혜입니다(롬 3:21-31).
의에 대한 결론적 대답은 ① 예수의 십자가 공로 ② 그 공로를 믿음으로 받는 칭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들이 받은 교회적 사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의는 믿어야 할 의가 있고 행해야 할 의가 있습니다(약 2:14-25).

Ⅳ.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했습니다.

본문 6장 33절에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더하시리라}(프로스 테쎄세타이, )는 말은 '그냥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즉 그냥 얹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타우타 판타,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의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 식, 주를 덤으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먼저 구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삶의 수단으로서의 본능적 욕구를 구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곧 죽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를 먼저 구하면 기복주의자가 됩니다. 그것은 뜨거운 신앙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욕구 달성을 위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이러한 것들은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충족시키기 위하는 자들에게 이 모든 것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 내게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주의 많은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말씀에 맞았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자기를 위하여 장수나 부나 원수에 대한 복수를 구하지 않고 백성에게 베풀 공의로운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지혜도 주고,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와 영광도 주리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왕상 3:1-11).

로마서 8장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이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한 절대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절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한 절대 가치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실상 차선으로 구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으니 그냥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먼저 구하지 아니하는 자는 신앙생활이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
습니다. 반대로 이 모든 것을 먼저 구하는 자들은 신앙이 뜨거운 것 같지만 결국 자신의 욕구 충만을 우선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삶의 수단으로서의 본능적 욕구를 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는 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덤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목적이 먼저 되지 않고 수단이 우선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수단으로 존재하도록 만들고 맙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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