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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나 된 것은 (고전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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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
제가 제법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다음부터는
제 아버지가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이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유명한 교회의 장로님이냐고 묻습니다.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면 “아니, 목사님 아들도 아니고
장로님 아들도 아닌데 어떻게 큰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 마다 저는 사도 바울이 고전 15: 10에서 한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겸손의 표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과장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진실입니다.

최근 몇 주 동안 금요 심야 기도회에 제 친구 목사들이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중에 몇 친구는 제가 한 번도 설교를 들어 본 적이 없는 목사들입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퍽 기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모든 친구 목사님들로부터 기대 이상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나만 발전한 것이 아니고 내 친구 목사들에게도
놀라운 발전이 있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중대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많이 매달리는 사람을 더욱 귀하게 들어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제 친구 목사님들의 간증에 특히 큰 은혜를 받았는데 똑같은 일을 당했어도
그 사건을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군대 가서 누구나 얻어맞기도 하고 기합도 받는데
보통 사람들은 군대이니까 이 정도야 당연히 감수해야지 하면서 그냥 받아 넘깁니다.
그러나 제 친구 목사님 중 한 분은 거기에 대해 신앙적인 해석을 하고 반성을 했습니다.
그럴 때, 얻어맞는 것도 은혜가 되고 기합 받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는 사람들이 다 비슷비슷한 일들을 당하며 살지 않습니까?
고생도 하고 실패도 하고 견디기 어려운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 반성도 없이 그저 그렇게 그 모든 일들을 당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전혀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내 잘못 아니면 이웃의 잘못 때문에, 혹은 재수가 안 좋고
운이 안 좋아 이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래야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작은 일 하나도
하나님께서 연단시키시는 일로서 신앙적인 해석을 합니다.
금요 심야 기도회에서 제 친구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신 분들은
군대에서 겪은 이야기,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화장실 청소 하면서 누구나 다 겪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제 친구 목사님은 그것을 자기로 하여금 낮은 자리에 처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로서 해석하니 오히려 감사하고 벅찬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는냐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사건들을 하나님과 연관시켜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남이 볼 때 하잘 것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로서
해석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어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일을 벌이고 일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에 속장 수련회 관계로 강화에 있는 한 기도원에 다녀왔는데
기도원을 관리하시는 장로님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하나 들었습니다.
요즈음에는 기도원에 기도하러 오는 성도들이 많지 않다는 말씀이었습니다.
1960년대나 70년대에 다 살기 어렵고 힘들 때에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에는 기도하는 성도들이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장소에 최고 시설의 기도원을 세워놓아도
거의 대부분의 기도원이 적자를 본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먹고 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보니 간절한 소원도 식어졌고
또 세상에 너무 깊이 빠져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까?>
여러분, 오늘 여러분에게 은혜가 없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여러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주인이 되어서 모든 일을 그저 여러분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되어져 가는 일을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연이나 재수나 운명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말씀에 보면 요셉은 너무나 기구한 인생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자라다가
배다른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외로운 이국땅에서 요셉이 겪은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죄수 신분이 되어서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어떤 일을 당해도 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형편없이 낮은 곳으로 추락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하여 요셉은 일이 잘 풀려 형통하거나 높은 자리에 올라갔을 때
교만한 마음을 품고 우쭐해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습니다. 
요셉은 또한 기막힌 일을 만나 어려운 고난을 당했을 때에도
부모를 원망하거나 형제들을 원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창세기 45장에 보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다음에
형제들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요셉은 자기를 애굽으로 팔아넘긴 자들은 형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자기가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를 떠나 이국땅으로 오게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영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교회로 성장시킨 목사님들을 가까이 뵌 적이 있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탁월한 설교자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외모도 볼품이 없고 학력도 떨어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만나고 그 분들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왜 저런 목사님의 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다.

저의 발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목사님들은
하나님을 크게 체험한 분들이고 하나님을 크게 의지하는 분들이다.”

외모가 뛰어난 목사님이 큰 교회를 이룰 수 있다면
영화배우 신성일 씨나 장동건 씨 같은 분이 목회를 하면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교회를 하시는 목사님들 가운데 잘생긴 목사님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많습니다.

설교 잘하는 목사님이 큰 교회를 이룰 수 있다면
말 잘하는 아나운서 김동건 씨나 이계진 씨 같은 분이 목회를 하면 잘 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출신인 곽규석 목사님이 얼마나 재치 있게 말을 잘합니까?
그런데 그 분이 미국에서 이민 목회하실 때 대교회를 목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목회는 말할 것도 없고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우리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도 그랬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세계적인 명문대학 옥스퍼드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교수로도 있었습니다.
웨슬리는 장장 15년 동안 옥스퍼드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웨슬리는 어떻게 하면 성결해질 수 있을까를 물으면서
인간의 모든 노력과 수단을 총동원했습니다.
성경과 경건서적들도 열심히 읽었고 주기적으로 금식도 했고
고아원이나 교도소를 방문하면서 자선 사업에도 열을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인간적인 노력을 아무리 기울여도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뭔가 늘 허전하고 채울 수 없는 불만족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옥스퍼드 시절에는 Holy Club, 즉 ‘신성 구락부’라는 경건회를 결성해서
성결운동을 벌였지만 그 숫자는 대 여섯 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엘리트들뿐이었습니다.
웨슬리는 인간적인 노력과 행위에 의존해서 성결해지려고 애썼지만 한계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1735년에 웨슬리는 옥스퍼드를 떠나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떠납니다.
이 때 웨슬리는 참담한 실패를 경험합니다.
열심히 성경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열심히 금식한다고
목회가 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웨슬리는 인간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목회에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웨슬리는 2년 동안의 미국 선교사 생활에 완전히 실패해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깊은 패배감과 상처를 안고 고민하던 웨슬리에게 서광이 밝아왔습니다.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 쯤 되었을 때 올더스게잇이라는
작은 거리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여 있는데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놀라운 회심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 때 부터 웨슬리는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노력에 의지하지 않고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율법중심의 사람이 아니라 은혜중심의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이지요!
그 때부터 웨슬리가 설교하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영국교회의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탁월한 노력을 기울여도 잘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들 가운데 인간적으로 볼 때 아주 훌륭한 분들이 있습니다.
반듯반듯하고 설교도 잘하고 아주 성실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잘 성장하지 않고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목사님은 인간적으로 보면 부족한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교회도 성장하고 목회도 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일어날까요?
제 생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듭 말씀 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그리고 깊이 체험한 사람이 크게 쓰임을 받습니다.

<팔삭둥이 사도 바울의 고백: “나의 나 된 것은”>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가 된 것도 그가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오늘 봉독한 고전 15장의 주제는 부활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믿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경에 있는 그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무덤에 묻히셨으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게바, 즉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 12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후에 500명이 넘는 형제자매들 앞에 나타나셨는데
그 중에 태반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의 형제 야고보에게도 나타나셨고 모든 사도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에게까지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자기는 도저히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기에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주를 뵙기에 도무지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8절에서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가 무엇입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팔삭둥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바울은 진짜 미숙아로 태어났을까요?
희랍어 원어 성경을 보면 ‘ektroma’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ektroma’라는 말은 ‘유산된 태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진짜 미숙아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바울이 의도적으로 사용한 상징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일찍이 교회와 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감히 사도라 불릴 자격도 없었고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딤전 1: 13절에서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로서
딤전 1: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로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에는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팔삭둥이같이 미약한 사람이었으며 교회를 훼방하고 핍박하고 폭행을
일삼는 죄인의 우두머리로서 사도가 되기에는 자격미달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도대체 자격 없는 바울이 지상에 존재해왔던 수천억의 인구들 중에
손에 꼽을 정도의 사람들만이 볼 수 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본문 10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된 것도
자기가 잘 나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우리는 자격 없고 부족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써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쓰시는 하나님>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 가운데 인간적인 약점이 없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낮은 울타리』1월호를 보니까 그웬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디모데는 위궤양, 호세아는 부인이 창녀,
아모스가 받았던 훈련은 고작 무화과나무의 가지 치는 것,
요나는 도망자, 아브라함은 늙어빠진 노인, 베드로는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자,
나오미는 가난한 미망인, 모세는 살인자요 말더듬이, 기드온과 도마는 의심이 가득했고,
예레미야는 자살충동에 사로잡혀있던 우울증 환자, 엘리야는 탈진상태까지 갔었고,
마르다는 걱정투성이, 다윗은 살인에 간음, 삼손은 장발, 다윗은 사울의 갑옷이 안 맞을
정도로 작았던 소년, 바울은 모세를 닮아 화를 잘 내었던 자…”

하나님은 연약하고 흠이 많아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을 귀하게 써주셨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면 실망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써 주십니다.

오늘은 음력 설날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리고 금년 한 해는 저나 여러분이나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서
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합시다!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께서 그 댓가로 무엇을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격 없고 수고도 부족하고 인격도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 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반드시 도우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금년 한 해는 여러분 모두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순간순간 신비하고도 오묘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십시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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