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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자도 쓰신다 (막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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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는 동일한 이름이 많이 나온다. 그 중에 가장 흔한 이름이 야고보(야곱)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야고보는 요한의 형제로, 세베데의 아들이다. 또 예수님의 형제로서,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감독(행15:13)이며,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도 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들은 혼돈을 피하려고,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10:3, 막3:18, 눅6:15) 또는 “작은 야고보”(막15:40)라고 하였다. 마가는 마태를 소개하면서 (막2:14) “알패오의 아들 마태”라고 기록하였다. 마태와 작은 야고보는 형제였지만,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제자다.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말 이외에, 말이나 행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 작은 야고보가 있었다는 내용뿐이다. 그에 대한 정보는 ‘작은’(mikrov")이라는 형용사뿐이다.

  왜 그를 작다고 했을까? 이 야고보는 키가 작거나, 나아가 어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영향력이 별로 없었기에, 작은 야고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의 형제 마태와 함께, 주님의 충실한 제자요, 성도였다. 이 말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다.

  야고보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다간 제자다. 작은 야고보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위해 충성을 바친 수많은 성도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섬겼다.

  5병2어를 드렸던 아이의 이름도 찾을 수 없고, 마가 다락방의 주인공들도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예수님께 나귀를 제공한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없으며, 최후의 만찬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 귀신들린 딸을 고쳤던 수로보니게 여인, 동방박사의 이름도 모른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을 받은 사역자들을 전도한 사람은, 이름도 빛도 없는 교사였다. 무디를 전도한 사람은 ‘킴벌’이라는 사람인데,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또 스펄전의 회심을 도와준 사람은, 이름 없는 노동자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위대한 일을 했던 사람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는 성도들이, 바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름과 수고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나 아주 값지고, 가치 있는 역사를 만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성도들이었다.

1.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자.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 작은 사람이면 어떤가? 주님께 쓰임 받으면 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큰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다. 세상이 알아줘도, 주님께서 내가 도무지 너를 모른다면, 아무 소용없다.

  따라서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섭섭해하지 말라. 주님께서 알아주시기만 하면 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우리의 아름다운 헌신을, 주님께서는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갚아주신다. (마6:4)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행하시는 선행과 기도를 지켜보신다. 눈에 보이는 상급만, 상급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않는 상급도 있다. 하나님께서 충성됨을 인정해 주신 사실만으로도 상급이 된다. 또한 우리 마음의 보람 자체가 상급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란다.

  작은 야고보는 무명해도, 주님의 제자로 쓰임 받았다. 스페인 콤포스텔라까지 가서 선교하다, 돌에 맞았으나 죽지 않아,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한 충성스런 제자다. 작은 야고보는, 제2바이올린 주자에 비유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가 심포니를 연주하기 위해선 제2바이올린 주자가 꼭 필요하다.

  제2바이올린 주자라고 하니까, 이류라고 생각하지 말라. 제1바이올린 주자와 동일한 실력을 요구하고, 경우에 따라 제1바이올린 주자보다 더 어려운 부분을 연주해야 할 때도 있다. 제2의 바이올린 주자가 없이는, 훌륭한 심포니를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데 지휘자가 제일 힘든 일은, 열정적인 제2바이올린 주자를 구하는 일이다. 왜냐면 누구나 다, 제1바이올린 주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포니보다 더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야고보 같은 제2바이올린 주자가 많이 필요하다.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 베드로… 이들을 세워주고, 자신은 뒤에서 활동했다. 교회 안에도 동역자가 되어, 부사역자로 평생을 사역하겠다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래서 은사가 아닌데도, 개척을 한다.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일하려는 사람이 아쉽다.

  사람의 기억에 남으려 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억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쉽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유명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충성했는가?’로 평가하신다. 유명하다고 좋은 종이 아니고,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나쁜 종이 아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 큰 자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 앞에는 유명한사람이다. 짐 심발라의 ‘새바람 강한 불길’이란 책에, 잘 알려지지도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으로, 대각성 시기에 찰스 피니의 동역자인 다니엘 내쉬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뉴욕 부근의 목회자로서, 별로 유명하지 않았다. 48살에 피니의 집회를 위한 중보기도자로 자신을 드리기로 했다. 피니가 도착하기 3,4주 전에, 미리 그 도시에 와서, 방을 빌려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모아서, 중보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기 시작하였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실에서, 불평을 하지 않고 기도하였다. 피니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내가 어느 도시에 부흥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에, 하숙집을 운영하는 어떤 여인을 만났다. 그는 내게 내쉬를 아느냐고 물었다.

  ‘내쉬는 다른 두 남자와 하숙하러 와서, 3일 동안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들이 기거하는 방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만히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까, 무릎을 꿇고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3일이나 계속 기도했다. 무슨 일이 났다고 생각되지만, 들어가기가 그러니 좀 보시겠어요’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들은 지금 기도 중에, 해산하는 고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고 하였다. 집회가 시작되어도, 내쉬는 대게 참석하지 않고 골방에 숨어서, 성령님이 군중의 죄를 깨닫도록 계속 기도했다.

  1820년대의 어려운 상황에서, 대적들이 공격하면 피니는 내쉬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내쉬는 더욱 더 기도에 몰입했다. 1826년에 어느 도시의 갱단은, 피니와 내쉬의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불태웠다. 자신들의 행악이 이들 앞에서 드러나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1831년 내쉬가 죽기 얼마 전,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확신한다. 나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오순절에 강림했던 성령을 간구하고, 더 간구함은 의무이며 특권이다…, 나의 몸은 지금 고통 중에 있으나, 나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믿으면, 다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제 겨우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쉬가 죽고 4개월이 못 되어, 피니는 순회 전도 사역을 끝내고 뉴욕시의 한 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

  지옥문을 부수던 그의 친구는 먼저 갔다. 오늘날 그의 무덤은 뉴욕 북쪽으로 죽 올라가서, 거의 캐나다 접경쯤에 있다. 먼지 나는 도로 옆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 하나, 그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 “다니엘 내쉬, 기도의 용사, 피니의 동역자, 1775.11.17-1831.12.20”

  내쉬는 그 당시에 유명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존귀한 용사였다. 여호수아가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싸워 이겼으나, 모세가 뒤에서 기도하였다. 여호수아의 승리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모세가 있었음을 말한다. 승패는 이미 중보기도에서 나타났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바로 내쉬와 같은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베드로, 모세, 찰스 피니, 이들처럼 무대를 빛내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내쉬처럼 무명의 용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유명과 무명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께 쓰임을 받은 사람이 되느냐가 중요하다. 주님은 다 아신다. 이런 사람은 세상에는 무명한 자 같으나, 하나님 앞에는 유명한 사람이다. 세상의 책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늘의 책에는 잘 기록되어 있다. 세상의 박수와 칭찬은 없었으나,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을 위해 헌신하고, 쓰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2. 작더라도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1) 질적으로 성장하라.

하나님의 관점은 우리가 성숙한 사람인가? 미숙한 사람인가를 보신다. 작다 크다는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따라서 작아도 성숙한 사람이 되면 된다. 성숙은 자기 희생과 섬김, 또한 겸손이 들어 있다.

  희생과 섬김, 겸손이 없으면, 절대로 성숙 하다고 말할 수 없다. 건물을 지을 때, 처음에는 철근과 콘크리트가 들어간다. 집을 얼마나 튼튼하게 짓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 기초공사에 달렸다. 그러나 공사를 하다보면, 철근 위로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벽지가 붙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철근이 보이면, 완성된 건물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끝까지 철근이 보이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은 벽지까지 가야한다. 이처럼 성숙한 성도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직 주님만을 나타낸다. 다른 사람을 세워줄 줄 안다. 성숙한 사람이 큰 사람이다.

  성숙한 사람은, 섬김과 희생과 겸손의 자세로 나간다. 무명의 사람이라도,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우리 교회는 작아도,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가족의 역할이 있고 사랑의 교제가 있고,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되기 바란다.

(2) 작은 일에 충성하라.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한다. 또한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일본’은 제2차 대전에 참전하여 패전국이 되고도, 경제를 부흥시켜 선진국이 된 나라다.

  세계가 확대를 중심으로 성장했을 때, 일본은 반대로 축소를 지향하면서, 그들의 세계를 만들었다.

일본은 작은 것에 관심을 두고, 성실할 때는 번영했지만, 큰 것에 욕심 낼 때는 망했다. 공룡은 입의 길이가 180cm나 된다. 이빨 하나가 30cm 이상이나 된다. 몸무게가 80톤이나 된다. 지금까지 지구에 있었던 동물 중에서, 가장 큰 동물이지만, 그 동물은 지금 화석만 남기고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주 조그만 바퀴벌레는 지금도 살아 있다. 큰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이 강하다.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진짜와 가짜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 멀리서 보면 다 똑같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면, 뭔가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작은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만 원짜리 전기면도기를 샀다. 잘 깎였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피가 흘렀다. 왜냐면 살까지 깎였다. 그래서 좋은 전기면도기를 샀더니, 살을 깎아먹는 일이 없어졌다. 예수님은 (눅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하셨다.

  작은 일을 시켜도 충성하지 못하는 사람은, 큰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일류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할 첫 번째 일은, 작다고 생각되는 일을 철저히 해내야 한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하게 여기지 말라. 하찮은 일 속에 위대함이 담겨 있고, 영원이 담겨 있다.

(3)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사람이 되라.

야고보는 항상 혼자 나오는 법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함께 나온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인물은,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이다. 위대한 일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셨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하실 때도,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 전도하러 보내실 때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함께 일할 줄 몰랐기에, 예수님을 떠났다. 예수님과 함께 살았지만 함께 하지 못했다.

  홀로 생각하고 홀로 걸었다. 예수님과 뜻과 마음을 같이 하지 못했다. 보조를 같이 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이유는, 사역의 효율성 때문이다. 우리는 혼자 일할 때보다 함께 일할 때 훨씬 큰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함께 일할 때 상승효과가 나타난다.

  다른 사람과 함께 동행할 줄 알고, 함께 일할 줄 아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할 줄 안다. 더불어 일할 때 혼자 일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

(4)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완벽히 갖추고 난 다음 우리를 쓰시지 않는다. 여전히 부족해도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쓰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우리가 부족할 때 더욱 깊어진다. (고후12:9)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자신이 가장 약해 있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가장 강했고, 자신이 부족하다 했을 때, 오히려 많은 일들을 했음을 깨달았다.

  그러면 왜 성도는 약할 때가 더 강한가? 그 이유는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고후1:9)에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자신을 비울 때 강해질 수 있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붙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론입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 작은 자라고, 기죽지 말고, 질적으로 자신을 성장시키고, 작은 일에 충성하자. 다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우고, 주님께 엎드려, 주님의 능력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란다. (이건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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