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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로 가는 길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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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한지 한 달 만에 700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을 한 것으로 나타난 영화 ‘왕의 남자’에 나오는 광대 공길은 실존 인물입니다.
“배우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다가 (…)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는데(君君, 臣臣)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君不君, 臣不臣)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고 말했다. 왕은 그 말이 불경하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 보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로서 왕은 광대의 그 말이 불경하다고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향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대 공길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오늘날 참 안타까운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은 눈이 있으되 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하며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아야 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만 보는 눈과 들어야 될 것은 듣지 못하고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만 듣는 귀와 해야 될 말은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만 하는 입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이런 안타까움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삼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내려가고 있는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야기들을 듣고 난 다음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토론하며 길을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집에 도착하도록 계속해서 함께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듣고 있으면서도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고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합니다.
“나사렛 예수와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이 정도 말씀을 들었다면 마땅히 그들의 눈이 열려야 하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이 가려졌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의 눈이 가려졌을까요? 그들의 생각이 예수님은 죽었다는 것으로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한번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살아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하시든지 다 믿을 수가 있었어도 이제는 예수님이 죽은 마당입니다.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여러 차례 말씀하셨어도 그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당연히 자기들의 보는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무덤에까지 장사 지낸 바 되었는데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를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이 자기들의 눈앞에 서서 말씀을 풀어주고 있는데도 그들에게는 그저 비슷한 어떤 사람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고는 생각도 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덤 앞에서의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앞에 서 계시지만 그저 동산지기인 줄만 알고 “누가 예수의 시체를 가져갔는지 알려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하고 있지를 않습니까? “마리아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마리아는 자기 앞에 서신 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신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물며 여기 제자들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진가 민가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향해 내려오면서 나눈 이야기들도 과연 그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일까? 아닐 거야. 아냐 어쩌면 진짜 살아나셨는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누가 본 사람이 있어? 마리아가 봤다고 하잖아? 그거야 마리아가 잘 못 봤을 수도 있잖아?” 이런 저런 말로 토론하며 길을 가던 중에 예수님과 비슷한 어떤 사람이 함께 길을 걸으면서 묻는데 그냥 길가는 나그네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지를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무섭습니다. 아니 어떤 선입견이라든가 편견에 한번 사로잡히게 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안 좋다 생각하게 되면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처음 인상이 좋다고 느끼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좋은 모습으로 생각을 하지만 처음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여전히 안 좋게 생각을 하더란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다고 생각하다가도 한번 실망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마음 문을 굳게 닫아걸게 되더란 말입니다. 마치 한번 입맛이 길들여지게 되면 그 입맛을 바꾸기가 쉽지 않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생각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으로 우리 마음을 바꾸게 되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우리의 생각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게 되면 모든 것이 안 좋게만 생각이 되더란 말입니다. 무론 우리의 생활 여건이나 환경이 우리의 생각을 좌우합니다. 안 좋은 여건에서 자라다 보면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가문을 보고 그래서 환경을 보며 출신 환경을 따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조차도 또 다른 편견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꿋꿋하게 자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좋은 환경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아주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사람을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요 동시에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 믿는다면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우리의 말하는 것이 항상 긍정적이고 믿음으로 가득한 말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여 우리에게도 부활의 아침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부활을 믿는다면 오늘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가 낙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고난의 풀무 가운데서 불러 내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이 그래서 유익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 중에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죽음이 있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주님만 바라보면서 날마다 믿음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어떻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주님이 풀어주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의 눈은 말씀을 들을 때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눈이 열어 보려고 해도 말씀이 없이는 믿음의 눈이 떠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듣지 못하고서야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되 듣고 흘려버리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가 날마다 듣지만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말씀은 믿음으로 연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우고 듣고 본 바대로 우리는 생각을 하려고 합니다. 말씀도 그렇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내 마음에 드는 말씀만 옳다고 여겨지고 그것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아닙니다. 음식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하듯 하나님의 말씀도 어느 하나도 버리지 말고 그대로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 들인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어야 합니다. 길을 함께 가다가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들어가시기를 청합니다. 물론 모른 척 하고 그냥 헤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시기를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음에 새기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건 내 마음에 들고 이건 내 마음에 안 들고 하고 말씀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이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은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지나친 것은 없습니다. 단지 내가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입에 쓴 것이 몸에는 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말씀도 아멘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시어 들인 제자들은 예수님에 떼어주시는 빵을 먹다가 비로소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말씀은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듣고 배운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말씀이 생동력이 있고 그 말씀에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은혜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은사와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대로 실천할 때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주시는 빵을 받아먹을 때 눈이 열렸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실천할 때 우리 안에 놀라운 은혜로 충만하게 되고 그 말씀이 우리의 능력이 되고 거기서 주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다 우리를 찾아 주시고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이렇듯 주님은 우리를 보배롭고 귀히 여기시며 사랑하여 주십니다. 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사십시오. 이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오늘도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가면서 기도하게 될 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게 될 것이요 우리의 삶에 놀라운 능력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이렇게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아래 살게 될 때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지켜 주셔서 모든 거시 풍족하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역사가 우리 안에 있도록 항상 말씀을 듣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 말씀대로 실천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 아래 사는 성도들은 항상 곧바로 일어나 증거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빵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자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났다고 하는 사실이 믿어지지를 않을 정도입니다. 너무도 가슴이 뜨겁게 뛰고 있습니다. 그 감격이 얼마나 그들을 사로잡았던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서, 어두운 밤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합니다.

은혜 아래 사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감격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요? 말씀을 듣고 은혜로 가득하게 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뜨겁게 달아오르던 지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감격과 기쁨을 어찌 혼자서만 간직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나서 보니 은혜 아래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마음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예수님 내가 일게 된 진리를 나 혼자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들고 나가는 것이요 함께 이 진리 안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나서 보니 내가 누구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아니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랑으로 움직이시는데 그냥 미워하고만 살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더 이상 미워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강력하신지 그 사랑이 나를 그냥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사랑 앞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하려고 해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더 이상 내 마음에는 미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에 더 이상 미움이 자리 잡을 자리가 없습니다. 빛이 비추게 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내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고 나니 더 이상 어둠의 세력은 발붙일 자리도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미워하던 사람도 사랑스런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고 사랑으로 보게 되니 사랑의 고백을 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으로 감싸 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은혜로 가득하게 되니 말 한 마디를 해도 은혜로운 말만 하게 되고 은혜로 말하게 되니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체험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은혜로 우리가 충만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을 우리가 항상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가 못할 일도 없고 우리가 안 될 일도 없습니다. 내 안에 빛이요 진리가 되신 주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보고 난 다음 다른 성도들을 찾아 자기들이 보고 깨달은 바를 다른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그래서 은혜 아래 머물기 위해서는 믿음의 교제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요 또 함께 만나서는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 서로를 격려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나서 우리가 무엇을 합니까?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가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누게 될 때 그 은혜는 더욱 크고 놀랍도록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일이나 좋지 않은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함께 기도함으로 극복하고 견디어 나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도 우리는 더욱 말씀을 사모하는 자요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자요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귀한 성도들 되실 뿐 아니라 날마다 함께 모여 은혜를 나누고 또 함께 복음을 들고 나가서 말씀을 전하는 복음 증거자로서의 귀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주님은 지금 이 시간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십니다. 살아 계셔서 내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마음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그 어떤 말씀이 주어주든지 간에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귀한 삶을 사십시오. 어떤 말씀도 내 생각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주어진 말씀 중에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 말씀을 또한 나만 간직하는 자가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함께 모여 받은바 은혜를 나누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들고 나가서 아직 주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분들에게 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또한 우리는 뜨겁게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기를 원하시는지 우리 주위를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깊이 기도하시고 주님이 내 마음에 주시는 영혼을 마음에 담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가정을 넘어 이 강산에 넘쳐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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