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명나무를 취하라 / 창 2:9

  • 잡초 잡초
  • 288
  • 0

첨부 1


창세기 2:9(생명 나무를 취하라!)

  우리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오직 한 길은 바로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시되, 모든 것은 다 가하나 오직 선악과 나무는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며, 더욱이 먹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만들어 놓으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우리 임의대로 할 수 있게 하시면서 선악과 나무 만은 금지 시켰습니까 ?
물론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있겠으나, 분명한 공통적인 해석은 딱 한가지입니다.
즉 하나님은 선악과 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것은 곧 우리에게 고통이요, 저주요, 사망이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그리하면 왜 우리에게 고통과 사망과 저주의 상징을 우리 앞에 놓아두셨을까요 ?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는 우리를 존중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누구든지 우리는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고자합니다.
나를 업신여기는 사람을 좋아 할 리 만무이며, 더욱이 나를 기롱하고, 조롱하는 자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최고의 피조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는, 대접받고, 존경받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대접받고, 존경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무조건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내 중심대로, 이기적으로 산다고 해서 대접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누가 그런 자를 대접하겠습니까 ?
오직 ...함에도 불구하고 선택하였을 때... ..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였을 때..... ...함에도 불구하고
지킬 때.... ... 함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보았을 때..... ..함에도 불구하고 참았을 때... 등등.  "....함에도 불구하고" 행하였을 때 그 상대방으로부터, 또는 상대의 군중들로부터 대접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존중하였고, 우리를 대접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나무가 에덴 동산에 존재하게 된 동기입니다.
즉 선악과 나무에 대하여 하나님은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선악과 나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금지하라고 했기 때문에 금지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존중하는 행위였고, 하나님께서도 인격적으로 그가 결정할 수 있도록 해 둠으로서 그의 행위에 대한 신뢰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선악과 나무가 에덴 동산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금지하니,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는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그리고 의심치 않는 사랑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아담은 계속적인 생명 공급을 받았고, 그분 안에서 은혜와 축복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선악과 나무가 에덴 동산에 있었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중심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과 나무를 멀리하고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살았을 때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선악과 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 나무를 중심으로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생활하고 있었을 때도 분명 선악과 나무는 이전부터 그 자리에 계속해서 있었습니다.
결코 갑자기 선악과 나무가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고, 물론 생명 나무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생명 나무를 취하였을 뿐 선악과 나무는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땐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모든 의식주에서 자유 하였고, 그들이 사역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아주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늘 에덴 동산에 오셔서 그들과 교제를 하셨고, 그들은 그때마다 주님께 지혜를 구했고, 또한 능력을 구했으며,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으로 인해 그들에게는 늘 큰 기쁨과, 평안과 능력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 나무를 취한 데서부터 발생하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겼고, 또한 아담과 하와의 밀월 관계도 끊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의식주를 위해 일해야했고,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들, 그리고 그들이 다스렸던 모든 피조물들이 그들을 위협하고, 방해하며,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탓"문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바로 환경 탓이요, 상황 탓이요, 부모 탓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탓이며, 사회의 탓이요, 시대적 탓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은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도 참 너무하시지... 왜 선악과 나무를 에덴 동산에 심으시고, 그 약하고, 약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시나....  아예 그 곳에 두지 아니하였더라면 그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잘못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다 알고 계시면서 그렇게 행하신 하나님 탓이야....  그들의 연약함을 다 알고 계시고, 아담보다 어른이니 잘 알아서 하셔야지....
마치 꼭 세 살박이 어린이 옆에 뜨거운 불을 갖다놓고, 아이가 불에 데면, 아이를 막 혼내면서, 그래 불을 만지지 말라고 내가 그랬지 ??? 하고 혼내는 철딱서니 없는 무책임한 부모와 같잖아 !....!"

    여러분 !  이런 말에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자에게 어린이 취급을 하면, 반드시 성을 내면서 이렇게 말을 할 것입니다. "사람 대접을 해 줘야지... 누가 어린아인가... 사사건건 홀짝홀짝하게......"

    하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만드시고, 그 어린아이인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 나무를 금지시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을만한 지혜와 힘과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아주 건장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와 결정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아주 성숙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선악과 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 자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그 말씀을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그 말씀을 어겼고, 그만 선악과 나무를 취하니, 그들은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 그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문화.....  "탓 문화"
그로부터 엄청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아담의 후예들은 바로 이러한 문화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황인이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리고 부자든, 가난하든... 배웠던 아니 배웠던.... 건강하든, 아니 건강하든.,....

    모든 인생들은 선악을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옳은가, 당신이 옳은가.... 내 스타일인가, 당신 스타일인가...., 내 잘못인가, 당신 잘못인가....
내 마음에 드는가, 들지 아니한가.....  내가 너무했는가, 혹은 당신이 너무했는가.....
모든 생각의 페턴이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또한 선악 나무를 취한 이후, 아담과 하와의 삶의 변화는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식주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의식주 문제는 하나님이 해 주셨던 일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만이 아닌 거의 2-3백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나무를 취하자 그들은 스스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의식주 문제에 모든 에너지를 거의 다 소모해 버립니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결정 요인도 바로 의식주 문제에 두게 되었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풍족히 해결되면 행복한 것이고, 그렇지 아니하면, 불행한 것으로.....

    세 번째로 그들이 선악과 나무를 취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사실상 이것이 인류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 안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즉 에너지와 지혜와 능력과 부요와 행복함이....
그런데 그것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그때부터 우리 인류들은 필요한 것들을 땅에서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땅으로부터 에너지를, 지혜를, 능력을, 부요를, 행복함을.....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 지어졌기 때문에, 땅의 에너지로, 땅의 지혜로, 땅의 능력으로, 땅의 부요함으로, 땅의 행복함으로 만족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갈증난 사람에게 청량 음료라는 소다를 계속해서 마시우게 하면, 결국 더 갈증만 나는 것처럼...

    하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금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생명을 다시금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리고 의식주 문제도 해결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선악과 나무를 중심으로 살아서는 아니 되고,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생명 나무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은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혹은 믿음이 연약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아직 성경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앙적으로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이러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아니 좀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자기의 상황이나, 현실을 이유"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아직도 선악과 나무를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그분의 생명을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들어오는 통로를 스스로 막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아직도 의식주로 인해 모든 에너지를 다 소비하며, 더 나아가 이러한 모든 탓이 바로 내가 아니라, 환경 탓이요, 상대방 탓이요, 연약하고 어린 믿음 탓이요, 교회에 나온지 얼마되지 못한 탓으로 돌립니다.
단지 돌릴 뿐 결코 그 탓을 제거하려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선악과 나무를 취하여 살면, 그 나무를 중심으로 살면, 이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나무를 취한 것과도 같은 삶을 살게됩니다.
즉 모든 에너지를 땅에서 얻어야하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며, 그리고 조그만 일에, 중요하지도 않는 일에,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리고 너무나도 어리석은 일에, 자기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삶을 묶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교회 시스템 때문에 등등 "때문에"가 등장합니다.
이는 매우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선악의 기본 원칙이 "누가 옳은가 !" "어떤 것이 나의 스타일인가 !" " 무엇이 마음에 드는가 !" 그리고 "누구 잘못인가 !"등등이기 때문입니다.
즉 선악의 나무 위에 있으면 이러한 생각과 사고 방식은 매우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이러한 사고 방식이나, 신앙의 자세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선악과 나무를 취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분명 누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지 아니하여도,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살때는....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누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아니하여도, 누가 더 큰 이익과 손해를 보는가를 따지지 아니하여도, 그들은 행복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께서는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겉 옷을 원하는 자에게 속 옷까지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실 내가 필요하지도 아니한데, 오리를 가기는커녕 1리를 가는 곳조차 귀찮고 싫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넉넉하게 십리까지 가라고 말씀하시고, 겉 옷을 원하는 자에게 오히려 속 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사는 삶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은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이 내 마음에 들고, 스타일인가를 따지며, 더욱이 그것을 옮기는 gossips을 하며 사는 삶이 아닙니다.
오직 따진다면 무엇이 생명인가를 따져서 바로 그 생명을 위하는 삶이 바로 우리네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처럼 오리 가기를 원하는 자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십리를 가며, 겉 옷을 구하는 자의 생명을 얻기 위하여 속 옷까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되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과연 여러분은 교회를 얼만큼 위하십니까 ?
아니 주님을 얼만큼 위하십니까 ?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위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님을 위하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1)
    어떤 남.녀 종이 있었습니다.
그 종들은 주인집 염소들에게 풀을 뜯어 먹이고자 데리고 들로 갔습니다.
그런데 남종은 주인에게 뱀을 잡아 드리려고, 여종에게 염소떼를 맡기고 뱀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염소 떼들을 지키던 여종은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기 위하여 나물을 캐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저녁이 되어서 염소 떼들을 데리고 집에 가고자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3마리의 염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결국 그들은 나머지 염소들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젠 드디어 주인의 추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자 남종은 주인에게 뱀을 잡아드리려는 충성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종은 저녁 찬을 준비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주인에게 충성을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염소 떼들을 돌보라고 했지, 결코 뱀을 잡아오라거나, 또는 나물을 캐 오라고 하지
는 않았다 ~  이 불충한 자들아 어서 내 곁에서 물러가라 !!!!"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교회를 위한다면서... 주님을 위한다면서... 선악 나무를 취하여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주님을 위한다면서, 행하지 않는 자는 게으른 자입니다.
말만 앞세우고, 그 탓을 남에게 전가시키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축복은 그러한 자에게 오지 않습니다.
축복은 주님의 뜻대로 비록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비록 고생을 하는 것 같지만, 비록 쓸데없는 짓 하는 것 같고, 비록 나만 열심히 일하는 것 같지만, 비록 비웃음을 당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얻기 위하여 믿고 행하는 자에게 축복이 임하며, 그런 자로 인하여 교회는 세워지고, 부흥되어 집니다.

    교회는 말로 세워지지 않고, 생각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손과 발과 열정적인 가슴으로 인해 세워집니다.
모든 스케쥴의 중심이 자기 중심적인 사람에 의해 세워지지 않고, 모든 스케쥴의 중심이 교회 중심적인 사람에 의해 세워지며, 바로 그러한 자에게 축복이 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주님을 위해 우리들은 얼만큼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습니까 ?
주님은 우리들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 주셨으며, 오늘도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아니하시며,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 하시고, 또한 우리와 우리의 가정과 자녀들과 사업체와 직장과 모든 일들을 지켜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듯이 어느 가정이든,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희생 또는 투자 없이는 가정이 행복하게 세워지지 않습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를 따짐으로 인해 사랑과 행복의 가정이 세워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희생과 투자가 있어야 올바른 가정이 세워집니다.

  이와같이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의 희생 없이.... 그리고 제직들의 희생 없이.... 더 나아가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희생 없이... 교회는 세워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우리의 인생은 오직 복음으로만 설명되어지고,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복음으로만....
비록 세상적으로는 어리석게 보여도, 답답하게 보여도,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보여도,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리고 종국에는 죽음처럼 보여도, 복음으로 해석하면, 그것이 바로 축복이요,
은혜임을 증거 하는 그런 인생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부터 생명 나무를 취하여,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생명 나무를 중심으로.....

할렐루야 !

시온교회/지양구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