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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 (요 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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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신학교 다니던 시절에 미국에 있는 어느 한인교회에서 대학부 담당 전도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그 교회의 유년부 담담 교역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지 어느 주일에 제가 설교를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일학교 학생들의 주일예배 시간에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느 남자 선생님 한 명이 설교 시간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혼자 일어서서 뒷짐을 지고 그 예배실의 좌우 뒤편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설교 시간뿐 아니라 아마 예배시간 내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학교 학생들이 예배시간에 떠들거나 장난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물론 그것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고 또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선생님의 태도나 표정을 볼 때 그 선생님의 마음은 오직 아이들 하나하나 감시하는 데만 다 쏠려 있고 그 예배실 안에서 드려지는 찬송이나 기도나 전해지는 말씀에는 그다지 집중되어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주일학교 선생님은 예배의'감독자'만 될 줄 알았지, 그 어린이들 앞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본을 자신이 먼저 보여 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예배는 두말할 필요 없이 기독신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의무입니다.
  신자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도 사실 경건생활이나 교회봉사나 헌금 등의 기본적인 의무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주일예배 출석만 하고 있어도 대체로 신자란 소리는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배가 그처럼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 의무이며 가장 일반적 행위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예배가 그저 습관적으로 무성의하게 행해지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다 하고 또 가장 자주 반복하는 행위인 생활인 까닭에, 그 예배를 항상 진정하고 참되게 드려야 하는 것에 대하여 긴장을 잃기 쉬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이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시면서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들이 어떤 마음과 자세를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서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과연 어떠해야 하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참된 예배자는 예배장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제일 먼저 '어디에서'라는 생각과 연결시키기 쉽습니다.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도 바로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19절과 20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4장 앞에서부터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던 중에,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그녀의 방탕한 남자관계를 정확히 들추어내셨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느닷없이 한대 맞은 듯한 기분이 된 그 여인은 "아이구 선생님, 알고 보니 선지자이시군요."라는 찬사로써 자신의 당황스러움을 무마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마 짐작건대 대화의 흐름을 자기의 부끄러운 사생활로부터 딴 곳으로 돌리려고 그랬는지, 새로운 대화의 주제를 끄집어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커다란 쟁점 중에 하나였던 예배장소의 문제였습니다.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조상 적부터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 왔는데, 당신네 유대인들은 예배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한다고 말하더군요."라고 그녀가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인이 "이 산"이라고 하는 산은, 사마리아 지방의 중남부에 자리 잡고 있는 그리심산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 산은 옛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축복의 산'으로 선포하신 곳으로서, '저주의 산'으로 상징된 에발산과 마주 보고 있는 산입니다. 구약시대에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의 침략으로 인하여 멸망했을 때, 그 곳에 살아남았던 이스라엘인들 중 일부가 이방 민족과 더불어 결혼하여 혼혈민족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마리아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조 유다도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멸망당하게 되고 그 중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었습니다.
  그러다가 칠십 년 후에 해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유대인들은, 이들 사마리아인들이 민족의 순수성과 종교의 정통성을 상실했다고 하여 멸시하면서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의 영토 안에 있던 그리심산에 따로 성전을 세우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역대하 6장과 7장에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명하신 말씀을 따라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에만 세워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독자적인 성전을 세우자 당연히 격분했습니다.
  그리고는 기회를 벼르다가 마침내 주전 128년경에 무력으로써 그 사마리아인의 성전을 파괴해 버렸던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사마리아인과 유대인 사이의 적대감은 예수님 당시 더욱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바로 그 핫이슈를 예수님께 제기하면서 과연 '어느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옳으냐?'라고 묻고 있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어떤 예배가 참된 예배가 되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요소는 바로 그 예배를 드리는 장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심산이냐 아니면 예루살렘이냐?' - 바로 여기에 예배의 본질, 예배의 핵심이 온통 걸려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 옛날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 했던 것처럼 서로 자기네 예배당만이 옳은 예배장소라고 싸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사고에 있어서, 오늘날의 신자들 역시 참된 예배를 성립시키는 최대의 요점이 바로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있다고 자기도 모르게 착각하고 있는 경우는 비일비재합니다.

  우리가 보통 '예배본다'라고 할 때 그 말 속에 담긴 개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매주일 아침 정한 시간에 이 예배당이라는 일정한 장소에 나와서 일정한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채우며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비록 그 한 시간 동안 머릿속에 온갖 잡념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할지라도, 어쨌든 예배 끝날 때까지 앉아만 있으면, 즉 주일 오전 11시부터 한 시간 남짓이라는 시간 동안 이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내가 앉아 있기만 하면, 일단 우리는 남들에게 "오늘 예배 보았다."라고들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여러분 중 한 사람에게 오늘 오후 쯤 어느 구역장이나 전도사님이 "오늘 주일예배 드리셨습니까?"라고 묻는다면, 한 명도 빠짐없이 누구나 다 "예, 저 오늘 교회 갔어요."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어쨌든 예배시간에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내 몸이 갔다 오기만 하면 그것이 곧 예배드리기 위한 모든 조건을 충족한 것이라고, 그것이 곧 예배행위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바로 이 사마리아 여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큰 착각입니다.
  물론 우리가 정기적으로 공적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된 예배의 장소가 필수적인 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예배의 장소는 어디까지나 예배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배드리기 위한 여러 가지 필요조건들 중 하나에 불과한 예배장소를 두고, 우리는 마치 그것만으로 충분한 듯이 여기는 착각에 빠져 들기 쉬운 것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선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앉아 있기만 하면 예배를 드린 것이다.'라는 여기는 이 큰 착각부터 벗어버리고, 이제 '출석교인'이 아니라 '참된 예배교인'으로 바뀌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예배자는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예배의 유일한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내가 지금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라는 사실을 예배 도중 내내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라는 이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에 대하여 21절과 22절에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말씀을 주의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 둘 중에 하나는 당연히 맞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문했는데 뜻밖에도 예수님께서는 '둘 다 아니다.'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이어서 하실 말씀은 당연히 "그 대신 이러이러한 곳에서 예배 드려야 한다."라고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떤 '제3의 장소'가 언급되어야 할 순서에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의외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배에 대하여 '어디서'를 묻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처럼 '누구에게'를 대답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배의 장소는 아무 상관 않으시고 그 대신 예배의 대상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까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 문제를 끄집어내면서 그저 "우리는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라고만 말했지 '누구에게' 예배한다는 말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이 빼먹은 문장의 '목적격,' 즉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의 문제보다도 우선 자신이 드리고 있는 예배가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예배임을 단 한 순간이라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고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쓰고 있던 성경과 유대인들이 쓰고 있던 성경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 오경의 율법서를 비롯하여 기타 구약의 모든 역사서와 선지서와 지혜서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였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오직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사마리아인들은 비록 스스로는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너희들은 그 하나님을 모세 오경만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까닭에 모든 구약 성경을 통하여 폭넓게 계시된 참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전체를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까닭에 '바로 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네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대상이 어떤 하나님이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헛된 예배 생활하고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게" 되는 것도,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계시된 대로 하나님을 믿고 그 '참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참된 예배의 조건은 너무나도 뚜렷합니다.
  그것은 곧 '진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엉뚱한 우상 신, 사람이 제멋대로 머릿속에서 그려낸 상상의 신, 세상 철학이나 윤리에서 말하는 관념적인 신 - 이런 신에게는 백날 예배 드려 보았자 문자 그대로 헛수고일 따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참 신을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성경 말씀을 읽고 배우고 깨달음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참 하나님의 존재를 바로 알고 믿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신구약 66권의 성경 외에는 결코 없습니다.
  이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 그 아버지를 '알고' 그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만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참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모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누구 만나서 볼 일 볼 목적으로 예배드리러 와서는 정말 아니 됩니다.
  자꾸 전화해 주시는 구역장이나 권사님들께 인간적으로 좀 미안해서 '그저 얼굴이라도 비쳐야지.'라는 마음으로 나와서도 아니 됩니다.
  '예배란 목사의 설교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도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배 시간 중에, 지금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있음을 진정 믿고 계십니까?
  결코 어떤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신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진짜로 살아 계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 앞에 내가 지금 이 시간 경배하고 있음을 한 시간 내내 의식하고 계십니까?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약속 시간에 약속 장소에 나갈 때에 그 만나려고 하는 대상이 분명하게 있듯이, 우리가 주일에 예배당에 나올 때에도 역시 그 만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예배 시간을 통하여 꼭 그 하늘 아버지를 뵙고 만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참된 예배자는 성령과 말씀에 감동되는 것만이 예배의 올바른 자세임을 체험해야만 합니다.

  즉 '내가 지금 어떻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를 예배 중에 항상 스스로 살피는 사람입니다.
  23절과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만날 대상이 분명하면 그 만나는 자세도 그 대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른을 만날 때에는 어른을 대하는 자세가 있듯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그 자세 역시 세상사람 만날 때와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두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그 예배드리는 자세가 남다른 것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배의 자세란 곧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신령"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spirit)'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즉 예배하는 심령은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이 끊임없이 이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라는 번역 역시 '진심으로'라는 뜻으로 오해되기 쉬운데, 이 단어는 그냥 '진리로(in truth)'라고 직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 말씀의 진리를 통하여 하나님과 풍성하고도 깊은 지적 교통을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적어도 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세상의 딴 생각, 내 속의 못된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말고 하나님 말씀의 진리만이 나의 사고 작용을 온통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이처럼 '성령과 진리'를 통하여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가리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육'이 아니라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신 까닭에, 우리는 그 앞에서 사람을 만나듯이 예배할 수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인사하듯이 무슨 '삼천배' 따위로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이 예배가 될 수 없고, 무슨 사람을 식사 대접하듯이 제사상을 가득 차려 놓고 예배라고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른 예배의 자세는 오직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듯이, 예배 시간 중에는 오직 하나님과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영감 있는 찬송을 통하여 우리의 기쁨과 영광돌림이 하나님께 바쳐져야 하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감사와 간구가 하나님께 전달되어야 하며,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히 깨달아져야만 합니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성경 말씀의 계시만이 이런 예배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배 시간에 우리의 사고 활동의 100퍼센트가 이처럼 하나님과의 영적 의사소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예배본다'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 '보다'라는 말은 '무엇을'이라는 직접 목적어만을 취할 수 있지 '누구에게'라는 간접 목적어를 취할 수 없는 동사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예배를 본다."라고 말하면 문장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예배본다'는 말은 '하나님께'라는 예배의 대상과는 아무 관계가 없고, 그저 '본인이 예배 그 자체를 구경한다.'는 의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영적 예배생활이 전혀 없고 그저 예배의 방관자에 불과한 형식적 예배자가 오늘날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이 '예배본다'는 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자는 당연히 '예배보다'가 아니라, '예배드리다' 혹은 '예배하다'라는 표현을 써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예배를 '보러' 모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목사들이 그런 교인들에게 '쇼와 연기'들을 강단에서 '보여 주려' 하고 있습니까?
  모든 교인들은 목사의 인도에 '끌려가는' 예배가 아니라 각자가 '참여하는' 예배를 드릴 줄 알아야 하며, 목사는 예배 사회를 하면서도 그 모든 순서 하나하나를 통하여 자기 자신부터 먼저 예배드리는 자세를 지킬 줄 알아야 마땅합니다.
  예배의 구경꾼이나 예배의 연출자가 아니라, 성령의 뜨거운 감화감동하심과 성경 진리의 밝은 계시를 통하여 예배 그 자체에 깊이 동화된 가운데 그 예배의 대상되신 하나님과 끊임없는 영적 교통을 나눌 줄 아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우리는 과연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자신의 심령은 아무 관계없이 그저 몸만 이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한 시간 동안의 지겨움을 참고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예배가 끝나면 후련한 듯이 바삐 떠나면서 '오늘 예배드렸다.'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이 주일예배 시간만큼이라도 참 하나님과 진정한 영적 교통을 나누는 신령과 진정의 산 제사를 드리고 계십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참된 예배가 어떤 것인지를 이처럼 명백하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본문 23절 하반절에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참으로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덧붙이고 계십니다.
  "이렇게" 즉 "신령과 진정"이라는 올바른 예배 자세를 갖추고, "자기에게" 즉 "하나님 아버지"라는 참된 예배의 대상을 향하여 바른 예배드리는 자들을 그 성부 하나님께서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왜 이다지도 안타까운 어조로 "아버지께서 이런 예배자들을 찾고 계신다."라고 말씀하시는지 의아스러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배자들을 굳이 '찾으셔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지구상에 주일만 되면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이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모여 있을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셔야만 하겠습니까?
  뭐 이리저리 찾아다니실 필요 없이 큰 교회 단 한 군데만 골라 가셔도 바로 그 한 자리에서 수만 명의 예배자들을 한눈에 볼 수 있으실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마 모르기는 하지만 참된 예배자들의 숫자가 겉보기 보다는 훨씬 적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비록 이 지구상에 숱한 교회가 있고 수많은 교인들이 예배에 출석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참된 예배자의 숫자는 우리의 짐작보다는 훨씬 적기 때문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예배시간에 예배당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예배자로 인정하시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오늘 주일 바로 이 시간에 전 세계에서 통계적으로는 엄청난 숫자의 교인들이 '어디선가' 모여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겠지만, 그들이 다 참된 예배자는 결코 아닌 까닭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 수많은 예배출석자들 중에 과연 누가 '이렇게' 그리고 '자기에게' 예배하고 있는지를 살펴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니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 중에서도 그 누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바로 지금 이 시간에도 분명히 찾고 계실 것입니다.

  지난 주일이 설날 연휴와 겹치면서 주일예배 출석교인들이 쑥 줄어든 것을 보고 목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디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든지 간에, 정말 참된 예배를 드렸는지 아닌지 그것만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경향교회당에' 모여 예배드린 수자는 줄었지만 '경향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께 참된 예배드린 수자는 실제로는 조금도 줄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지난 주일에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 교인들 중에서도 진짜 예배를 드린 수자는 목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적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수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주일 그 어느 곳에서 드리는 예배에서든지 간에, 단순히 예배 출석자, 예배 관람자, 예배 감독자들에 불과한 자들을 정확하게 구별해 내시고, 오직 참된 예배자들만을 찾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오늘 이 경향교회의 주일예배 출석자들 중에서는 과연 몇 명의 참된 예배자들을 찾아내셨을 것 같습니까?
  그 숫자가 몇 명일까 하고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한 사람 자신이 꼭 그 수에 들어가 있어야만 합니다.

  '어디서'가 아니라, '누구에게'와 '어떻게'가 참된 예배를 결정짓는 진짜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보고' 오는 교인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어야 하며, '앉아 있다' 오는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며, '듣기만 하는' 교인이 아니라 '그 진리의 말씀에 성령으로 감동되는' 예배 참예자가 되어야 합니다.
  정해진 날과 시를 따라 이 경향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바로 이 순간에도 찾고 계시는 이 소수의 귀중한 예배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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