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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축복 (창 48: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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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축복을 하면 과연 그 축복의 내용대로 그대로 실시될까요? 물론 아닙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축복은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 자신의 마음 먹은대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축복을 원한다고 축복을 받고 저주를 원한다고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저 복을 주면 복인줄 알고 복을 받으면 되고 저주를 주시면, 저주를 받을만해서 주시는 것을 알면 됩니다.

이리저리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습니다. 결코 우리가 하나님을 조종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도 큰소리칠 입장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원한다고해서 함부로 남을 축복해주었봤자 그것은 도리어 저주를 퍼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과 마찬가지로 오늘 이 본문에서도 야곱은 후손들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과연 하나님을 대신할 만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점을 보다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야곱의 아버지 이삭이 어떤 과정으로해서 야곱에게 축복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라든지 이삭이나 야곱은 보통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인생을 자신이 꾸려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창세기 12:1-3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복의 근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복의 근원'이 될만한 것을 따로 마련해 두시고자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입니다. 일단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았다면 다른 복의 근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말고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모두 저주로부터 지배받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복과 저주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저주 아래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입니다. 마치 한 사람만 1등이 되는 복권에서 1등 번호가 한 장 당첨되었다는 말은 나머지 모두가 자동적으로 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었다는 말은 그것으로 통해서, "아, 나는 저주받아야 될 자이구나"하고 깨달아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자가 되고 싶어 하나님께 힘쓴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택에서 아브라함이 뽑혔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인간도 복을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 빼놓고 나머지 모두 지옥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분명히 복의 근원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복이 어떤 식으로 전달될 수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 요한복음 5:21-22에서는 심오한 힌트를 줍니다.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여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복을 받는 것은 복을 받고자 하는 당사자들이 잘 알아서 선택하기 나름이 아닐까요? 만약 복을 받고자 하는 자들이 복을 얻고 싶어도 예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면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복을 주고 말고할 권리는 예수님에게 모두 일임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느 회사에서 사원들을 퇴출시킬지 아니면 새로 채용할지 하는 모든 권한을 사장님이 혼자 쥐고 있는 상황과 같습니다. 물론 일반 회사에서야 아무리 사장이 취직해 달라고 요청해도 본인이 싫다하면 그 직장을 그만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그런 반발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인간을 살리겠다고 하신다면 반드시 구원받고, 예수님께서 원치 않는자라고 마음먹으면 아무리 애써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어디까지 하나님의 나라이지 인간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창세기 시절로 돌아가 봅시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자가 되므로 말미암아 이 때부터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혜택입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20장에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하다가 졸지에 온 집안 여자의 태가 끊어지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저주가 복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그 추장을 위해 기도해주니 집안의 모든 여자의 태가 다시 풀렸습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의 근원자와 아닌 자를 구분하시고 복의 근원자를 보호하려는 겁니다.

창세기 24장에서는 아브라함이 본인의 나이가 많아지자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구하기로 합니다. 늙은 종을 아브라함 고향 땅에 보내게 되는데 어떤 여인이 간택될 지를 놓고 아브라함은 종의 환도뼈 아래 손을 넣고 특별한 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랬더니만 고향에서는 아브라함의 종은 순적히 며느리감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 며느리로 인해 태어날 자식은 아브라함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약속 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이삭이라는 존재는, 아무 것도 없는데서 새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즉 결코 아브라함 본인이 선택해서 얻어진 자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이삭의 존재는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처럼 복의 근원자는 항시 하나님의 개입으로 전개되는 것이지 인간들의 취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야 복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삭의 경우를 보면 이 점이 보다 확실해집니다. 이삭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복의 근원자를 결정짓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의 개인적인 취향을 물리치십니다. 만약 정말로 사람이 사람을 선택해서 복의 근원자가 될 수 있다면 애시당초 이삭으로 하여금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하도록 하면 아무런 복잡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삭으로 하여금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도록 하시고 더아나가 일방적으로 복의 근원자가 에서가 되도록 모든 일을 꾸미게 하셔놓고서는 결국에는 야곱이 강탈하는 형식을 취합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복의 근원자가 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아버지 이삭이 밀어주려는 에서의 것도 아니요, 또 억지로 형의 장자권을 쟁치하려는 야곱의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보여주고 함입니다. 이삭에서 야곱으로 복이 중심자가 옮겨가는 과정에서 이삭이나 야곱 둘 다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즉 인간의 애씀과 상관없이 복은 원래 받아야 될 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자식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자식은 곧 하나님께서 야곱, 자신에게 복을 내린 그 결과로 주어졌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그 복이 오게 되는 내력을 자신의 손자 둘에게 실으려고 합니다.

야곱이 잉태하기 전에 하나님은 라브가에게 이런 복을 내리신 적이 있습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바로 이 복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없음을 야곱은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주어지는 복을 그대로 후대에 전수해야 될 사명이 야곱에게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복을 내릴까요? 큰 아이 므낫세를 오른쪽에 세우고, 작은 아이 에브라임을 왼쪽에 세웁니다. 손이 있는 그 자리에서 안수하면 먼저 태어난 나이 순에 따라 므낫세는 장자가 되고 에브라임의 차자가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손을 어긋맞게 놓고 축복해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큰 자가 작은 자를 장자로 인정해서 섬겨야 되는 것입니다. 즉 복의 근원자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결코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더 휼륭하다든지 자질이 뛰어나든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담아내어야 될 인생 내용이란, 축복권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옛날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힘대로 따내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런 심보로 인해 그는 하나님에게 얻어맞았고 그로 인해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 야곱은 진정한 축복의 내용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21에 보면, 야곱의 이런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나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여기에 보면 분명히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본문에서 침상 위에서 축복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이 많아 육신을 가누기조차 힘든 상황이기에 야곱은 침상에서 축복했지만 그 실내용은 바로 지팡이 지면서 남은 일생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본 뜻에 있었습니다. 인간의 야심으로 인해 복의 근원자인 야곱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기 전, 야곱은 자신의 완력의 힘으로 스스로 살아가던 자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부터 그는 지팡이를 짚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지팡이 안에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자라는 뜻입니다.

이런 지팡이 축복에 후손들이 참여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빙자에서 거기서 얻은 힘으로 스스로 살아보려는 자는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천국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이요 참된 축복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어긋맞게 축복하는 그 식대로 나중에 예수님은 오십니다.

인간적인 축복을 기대하는 자들은 천국에서 제거되고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없이는 못살겠다는 자에게 예수님은 아주 천한 모습으로 그들과 만나십니다. 우리가 흔히 쓸데없다고 천하게 여기고 차버린 그들이 실은 우리의 실상에 합당한 은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리를 저면서 비로소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야곱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본 모습인 것을 받아드리는 사람이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천한 인간인 것을 알게 된 그것이 바로 축복인 것을 어디에 가서나 잊지 말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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