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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근심의 유익 (고후 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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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도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믿음에 의한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

성도의 삶은 행복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행복한 삶입니다. 미래를 보장 받은 행복한 삶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과 자유와 평강은 세상에서의 일과 사역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더 많은 일과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골 1:24에서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참된 성도의 삶은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기뻐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는 삶”입니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행복과 기쁨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한 행복과 기쁨입니다. 세상의 압력과 갈등을 이겨내는 행복과 기쁨입니다. 점점 더 우겨 싸이며 괴로운 환경이 엄몰하여도 미래의 보장된 천국과 하나님의 상급에의 소망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누리는 삶입니다. 미래의 보장된 삶을 누리는 자로서 땅에서는 이웃의 행복을 위해 사는 고난의 삶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으로 구원받은 후 괴로움의 기쁨과 고난의 즐거움 속에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감당하며 사역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마음이 복음에서 멀어졌습니다. 믿음에서 떠나 은사와 사역에만 치중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드러나기보다 자신과 자신의 사역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열심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공동체의 행복과 기쁨보다 자신의 은사 사용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역들이 범람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복음과 믿음에서 멀어진 각종 사역 활동으로 인하여 다양한 문제 속에 빠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각종 갈등과 분열과 타락 속에서 기쁨을 상실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과 믿음을 회복하여 모든 활동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도록 몇 번씩이나 권면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래도 정상적으로 회복하려들지 않는 그들에게 고린도 후서의 서신을 보내며 고후 13장에서 마지막 경고와 인사를 전합니다.

고후 13:1은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갈 터이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라고 하며 성도들의 책임을 묻고 징계하겠다고 명시합니다. 고후 13:2의 하반절에서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고후 13:3-4에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착각을 지적합니다. 바울이나 그리스도나 육체적으로는 약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정도까지 약하십니다. 하지만 영혼을 향한 영적인 부분은 강한 자이며, 그 강한 능력으로 믿음을 저버린 책임을 묻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이러한 삶이 아닌지 돌아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 성도는 자신의 삶이 믿음의 삶인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

고후 13:5의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질문은 충격적입니다. 과연 우리의 현재의 삶이 믿음에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삶이 과연 믿음에 있는 삶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천국 백성으로 불러 주셨다는 것을 믿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라면 세상의 버림받은 양을 위해서 주님으로부터 보내진 자의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게 하십니다. 만일 그렇게 살았다면 그 증거는 무엇이고, 그 표적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심각한 물음입니다. 보냄 받은 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짧은 한마디만 하여도 그 속에 보냄 받은 자의 냄새가 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역을 하고, 많은 활동을 하고, 많은 말들을 하고, 많은 계획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과연 그 속에서 보냄 받은 자의 냄새가 날까요? 우리의 생활 속에서 그러한 냄새가 날까요? 교회설립 5주년 기념주일을 앞두고 있는 지금은 우리가 믿음에 있는지를 점검할 시기입니다.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리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고전 12:20-21에 보면,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 등등의 타락한 삶을 회개치 아니하는 것을 보면서 경고합니다.

만약 고린도 성도들이 바울의 세 번째 방문 때에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분명히 강력한 징계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최후의 경고입니다. 동일한 사건들에 관하여 몇 번의 권면과 경고를 하였음에도 회개치 않는 그들을 향해 불타는 마음으로 거룩한 분노를 표현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라고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하실 때, “너희”라는 단어가 여섯 번 나옵니다. 바울이 지적하는 것은 공동체에 뿌리 깊게 만연되어 있는 죄악들입니다.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는 선고를 들을 때, 교회 공동체에 속한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이 말씀이 우리들을 근심케 하고 있습니까? 그 근심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자신의 영육간의 순결함을 변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아니면 공동체를 향한 의로운 분노를 일으키게 합니까? 다가올 심판을 두려워하게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게 합니까? 열심을 더하게 합니까? 공동체의 불의를 징벌할 마음을 갖게 했습니까? 우리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근심이 이러한 근심이라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한 자들입니다. 고후 8:8-11에서 그러한 근심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 후회할 것이 없는 근심이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근심은 자신과 공동체를 살리는 근심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마음에 반응이 없다면 바울의 경고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을 시험하고, 자신을 확증해야 합니다. 고후 13:5에서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에서 “시험(페이라제테)”이라는 단어의 한 뜻은 “어떤 일이 될 수 있는지 어떤지를 시험해 보다”라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의 뜻은 “그의 특질이나 그가 생각하는 바 혹은 그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확인할 목적으로 실험해 보다”라는 것입니다. 즉 신분, 수준, 능력, 동기 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먼저 자신을 점검하여 믿음 안에 바로 서도록 노력하라는 적극적 권면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에서 “확증(도키마제테)”이라는 단어는 “자세히 조사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자세히 조사하는 것입니다. “확증하다”는 단어는 본래 제련소에서 금과 불순물을 선별할 때 쓰는 용어로서 “시험하여 인정받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이 믿음을 인정받는 삶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받아야 할 시험의 결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다(에피기노스케테)”라는 단어는 “철저히 알다, 정통하고 있다, 정확히 알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삶과 자신의 사역의 동기와 목적과 그 생각, 특질들을 살필 목적으로 실험해 보고,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선별하여 철저히 알아보라는 명령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계셨음을 발견하고 정확히 아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3. 성도는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확증하는 자는 주님 때문에 악한 행동을 깨닫고 근심케 되며 회개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합니다. 요일 5:11-12은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라는 결론은 이미 우리 안에 확증되었던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안에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요 14:20에서 장차 성령이 임하시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부터 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내주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은혜의 계약 하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가 계약을 맺어 하나님의 양자로 입적된 것입니다. 계약은 계약을 통하여 서로를 소유합니다. 우리는 이 계약의 특권으로 하나님의 것을 소유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안에 내주한다는 것은 그곳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은 객이 아닙니다. 주인은 그곳의 책임을 집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일을 자기 책임 하에 처리합니다. 주 안에 내주한다는 내주 의식이 없는 사람은 교회 공동체의 주인의식이 없습니다. 주인의식이 없는 사람은 또한 그곳의 책임 의식이 없습니다. 책임이 있는 주인은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합니다. 투자의 우선순위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주 의식이 없어서, 주인의식이 없고, 그래서 책임 의식이 없는 자는 그곳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는 일은 추상적이며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확신은 “내가 확신한다”라는 말의 반복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며, 우리의 수고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나라에 내주하고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나라의 주인으로서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그 나라에 대해서 책임의식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 나라를 위해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조만간 우리의 삶을 결산할 날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몸 된 교회의 공동체라는 지체 안에 내주하며 주인의식으로 책임의식을 갖고, 투자하였는지 결산할 날입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근심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서 깨닫게 하심을 느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버리운 자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후 13:5에서 “버리운(아도키모이)”이라는 단어는 부정접두어 “아”와 시험받다는 의미의 “도모스”의 합성어로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거절되어진, 공인되지 않은, 가치 없는”등의 뜻을 지닙니다. “그 자체로 당연히 그러한 것임을 입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반복되는 경고에도 근심의 반응이 없고, 회개함이 없는 것은 그와 같이 버리운 자라는 경고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경고의 말씀에 예민할까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처럼 둔감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교회는 참으로 풍성합니다. 많은 활동들이 넘칩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선포되는 경고도 듣기가 힘듭니다. 바울의 경고의 목적은 또 한 번의 회개를 촉구함에 있습니다. 바울은 이 시험의 결과가 좋게 나오기를 강력히 희망하면서 경고합니다. 바울은 먼저 고후 13:6에서 “우리가 버리운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라고 하며 자신의 공동체가 시험에 합격한 공동체임을 확신하며,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러한 성도가 되기를 힘썼습니다.

“바라고”는 강력한 희망의 표현입니다. 고후 13:7-10에서 그 희망의 강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강력한 소망은 그들이 회개하여 온전하게 됨으로써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자라는 사실을 알고 확신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향해 근심케 하는 명령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소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확증된 공동체로서 세상의 버려진 영혼들을 믿음으로 확증케 하는 믿음의 근심의 유익을 주는 공동체이길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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