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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눔의 삶 (전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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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본문 전도서는 12장으로 되어있습니다.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그는 1장 서두에서 인생을 정의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그가 가난하였기에 인생을 비관하여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려본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솔로몬의 영화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이가 들고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지니 모든 것이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본서에서 왜 인생이 허무한지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나서 결론을 내리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결론 앞에 바로 오늘의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입니다. “너는 네 식물을 물 위에 던지리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애굽에는 나일 강이라는 큰 강이 있습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나일 강이 범람하면 애굽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강에 나가 강물에 씨를 뿌렸다고 합니다. 그리하면 얼마 후에 강물에 떠내려간 씨앗이 홍수가 몰고 내려온 주변의 옥토에 떨어져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바로 이 같은 고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의 농경 풍습을 염두에 두고 주어진 말씀입니다. 물 위에 식물(씨앗)을 던지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것은 풍성한 열매가 되어 던진 자에게 도로 돌아옵니다. 신앙생활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주는 것은 생명의 원리입니다. 인간의 신체 구조도 입구와 출구가 있습니다. 입구로 음식물이 들어가면 출구로 배설물이 나가야 합니다. 제아무리 산해진미라 할지라도 배설 작용 없이 먹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살지 못할 것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은 누구나 사해바다를 다녀오셨을 것입니다. 사해(死海)는 문자 그대로 죽은 바다입니다. 물고기 하나 없습니다. 물을 받아먹기만 했지 줄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죽은 바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위에 있는 갈릴리 바다는 고기가 득실거립니다.  물을 받아서 내보내기 때문입니다.

어느 마을에 옹달샘이 있었습니다. 물맛이 좋아 동네 사람들이 와서 퍼다 먹었습니다. 그런데 구두쇠 주인 영감이 그 옹달샘 주변에 울타리를 쳐서 남이 떠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혼자서 먹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니 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물이 완전히 말라 버렸습니다. 옹달샘은 물을 계속 퍼내야 나오는 법인데 그걸 모른 것입니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썩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는 훈련을 시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철저하게 이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소출의 첫이삭을 드리게 했습니다(출23:19).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게 했습니다. 쓰고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웃에게는 우리가 쓰고 남는 부분을 줘도 됩니다.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수확하면서 모두 거두지 말고 나그네가 따서 먹도록 얼마를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곡식 이삭도 다 거두지 말고 나그네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했습니다. 서로 나누어주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식물을 물 위에 던지면 언젠가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자에게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번 중국에 가서 동관에서 목회하시는 최목사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최목사님은 우리교회에 오셔서 심야기도회에 말씀을 주신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 30대 중반입니다. 자기 교회는 200여명 모이는 교회인데 주변에 10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분의 목회 철학은 결코 교회 재정을 남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교회를 개척하고 어려운 교회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남에게 주면 꼭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하여 교회 재정을 넘치도록 채워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국에서 온 사업하시는 교인이 최목사님의 신앙적인 모습을 보고 큰 액수의 헌금을 하더랍니다. 이것이 영적원리입니다.

오늘은 구정 설날입니다. 금년에도 귀성객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설날이 되면 집집마다 어른들에게 세배를 다녔습니다. 세배 돈도 받았지만 가는 집마다 떡국을 한상 받아먹었습니다. 하루에 몇 그릇의 떡국을 먹었는지 모릅니다. 하루에 다섯 그릇도 먹고 여섯 그릇도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땐 분명 지금보다 나누어 먹는 것을 즐겨하던 때였다고 봅니다. 일하는 날에는 장에 가는 사람들도 다 불러서 일밥을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당시엔 우리 사회가 나눔의 공동체였습니다.  서울에 올라와 돈을 번 자녀들이 명절이 되면 과일과 고기를 사가지고 시골 어른들을 찾아뵈었습니다. 아주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골에 있는 땅값이 올라 부모에게 잘 보여야 땅을 좀 얻을 것 같아서 귀성객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안 들은 것만 못하더라고요. 오늘 예배에 나오신 분들 예배마치고 빨리 시골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좀 뭐 받아가지고 올 것 아닙니까. 우리교회 증축하는데 헌금도 좀 하고요.

본문 2절입니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 ‘일곱에게나 여덟’이란 단순히 숫자상의 7이나 8을 의미하지 않고 많은 수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많이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낚시를 간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 갔더니 낚시를 가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미국에 있는 호수엔 고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크고 작은 고기들을 낚아 올리는데 제 경우는 전무였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렁이를 아끼지 말고 미리 물 속에 많이 뿌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고기떼가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낚시를 해도 많이 뿌려야 많이 거두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땐 만화를 많이 읽었습니다. 그때 인기 있었던 만화가 홍길동전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도둑입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양반집에 쳐들어가 주인의 손과 발을 묶어 놓고 재산을 강탈해 갑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는 홍길동은 많은 권문세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런데 홍길동은 도독놈인데도 존경받는 의적으로 행세하고 인정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빼앗은 것을 착복하지 않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줬기 때문입니다. 근래엔 드라마에서도 홍길동, 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이 방영되었습니다. 의적 가운데 유일하게 장길산은 잡히지 않았습니다. 지금 왜 이런 사람들이 관심을 모읍니까? 생각해 볼 일입니다. 도둑질 하는 목적도 제 주머니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하면 의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돈을 버는 것도 바르게 벌어야 하고 쓰는 것도 바르게 써야 합니다. 부적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으나 바르게 쓰는 사람이 있고, 적절한 방법으로 돈을 모았으나 바르게 쓰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절한 방법으로 많이 벌어서 많이 나눠주고 살아야 합니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정에 가면 고딕식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파이퍼 홀(Pfeiffer Hall)입니다. 파이퍼 부부는 미국인으로 이화여대 건축 당시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낸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기념하는 뜻으로 파이퍼 홀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들은 1919-1939년까지 20년 동안 세계 각국의 교육과 전도 사업을 위해 그 당시 1,600만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대단한 액수의 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렵게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파이퍼 씨는 젊었을 때 약국 사환 노릇을 했고, 파이퍼 부인은 양복점 직공 노릇을 했습니다. 그들은 부자가 되어서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전차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미 그들은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세계 도처에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가지고 있을 때 많이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제가 신학교 시절 존경하는 장로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장로님은 병원 원장님이었습니다. 큰 병원 건물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부인 권사님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그 권사님이 영적으로 분명한 분이었습니다. 자기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 교육은 얼마든지 시켜준다. 대학원을 가고 싶으면 대학원까지 공부시켜준다. 그러나 유산을 받을 생각은 버려라. 나도 부모에게 유산 물려받은 것 없다. 내가 하나님 잘 섬겨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이다. 너희들은 너희들 믿음으로 축복을 받아라.  그러니 내 생전에 내가 받은 복 하나님을 위하여 모두 다 쓰고 갈 것이다. 그런 줄 알아라.”  참으로 멋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도 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들들은 의사가 되고, 딸들은 교수가 되고, 며느리도 의사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엘리어트의 단편 가운데 「실라스 마너(Silas Maner)」란 작품이 있습니다. 실라스 마너는 황금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돈만 생기면 금을 사서 모았습니다. 밤이 되면 촛불을 켜고 그 촛불에 반사되는 황금빛을 바라보며 감탄하며 도취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 마너가 모아 놓은 금을 몽땅 도적질해 갔습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돌아버렸습니다. 도둑을 찾아 길거리에 나갔다가 굴러가는 금덩어리를 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금덩어리가 아니고 금발 머리를 가진 소녀였습니다. 금발머리가 금덩어리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녀는 집 없는 소녀였습니다. 마너는 그 소녀를 양녀로 삼아 키웠습니다. 그 소녀의 모습을 보면 금덩어리를 보는 것 보다 더 빛나는 그 무엇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독백합니다. “황금빛은 허무한 빛이지만, 그러나 이 아이의 금발 빛은 미래로 빛나고 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돈을 벌면 사람을 키우십시오. 고아를 키우고, 신학생을 키우고, 선교사를 키우십시오.

여러분, 가진 것 있으면 나눠주고 사십시오. 돈이 있으면 돈으로, 재능이 있으면 재능을 이웃을 위하여 쓰십시오.  우리교회 어느 자매는 미용 기술이 있어 외국으로 단기 미용선교를 하러 갑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의사들은 배운 의술을 가지고 가끔은 외국에 단기 의료선교를 가서 배운 기술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쓰고 와야 합니다. 저는 제 아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의술을 가지고 너 돈 버는데만 쓰지 말고 꼭 어려운 나라에 의료선교를 다녀오라고 합니다.  저도 어려운 개척교회나 시골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면 사례비를 받지 않습니다.

지난 성탄절에 몸을 남에게 떼어 주는 이웃사랑에 관한 보도를 보았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콩팥과 간을 떼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준 사람도 울고 받은 사람도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간이식수술의 성공률이 50%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성공률이 70%라고 합니다. 간이식수술은 우리나라가 더 앞선다고 합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눔의 삶을 모본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콩팥과 간을 준 것이 아니라 온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눠 주는 삶을 배우고 닮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만찬 예식을 가지면서 주님이 주신 몸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감동적인 사건인데 우리는 아무런 감동이 없다면 그것도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눔의 삶에 모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여러분 모두 나눠 주는 사람, 나눠 주며 사는 사람, 나눠 줄 것이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는 심정으로(마 10:8)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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