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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 시대의 가다라인 (마 8: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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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한 마디 말씀으로 바람과 풍랑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귀신들이 스스로 떨며 굴복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예수님은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으로 가셨을 때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님 일행을 막아섰습니다(28). 그들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심히 난폭한 성격에 파괴된 인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29). 당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고, 제자들조차 ‘풍랑조차 잠잠케 하는 이분은 도대체 누구실까?’를 생각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 대면하는 예수님의 본질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과 상관을 맺고자 하지는 않고, 오히려 반항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라는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용어는 원래 생전에 한이 많아서 저승에 가지도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존재, 가끔씩 하얀 소복에 머리를 풀고 나타나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하는 존재를 지칭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귀신이라는 하면 음산한 음악과 시퍼런 조명 속에서 자욱한 연기와 함께 등장하는 죽은 사람의 혼령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악령’(evil spirit, demons)을 토속적인 우리 용어로 번역하다보니 생겨난 문제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사람은 죽은 후에 낙원에 가거나 지옥에 갑니다. 어떤 경우에도 구천을 떠돌지 않습니다. 죽은 조상귀신이 제삿밥 먹으러 오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사 중에서 1/3이 타락해서 악령이 되었고, 그 수효는 마지막 멸망 때까지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습니다. 원한 맺힌 사람이 죽을 때마다 귀신이 증가하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귀신같이 압니다. 그러나 반역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피조물들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하고, 그 지어진 목적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고, 그 생명을 파괴하려고 노력합니다.

악령은 본문의 두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철저하게 그 인격을 파괴했습니다. 예수님의 권세에 굴복하여 그 사람들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었을 때에도, 또 다른 하나님의 피조물인 돼지에게로 들어가 그 생명들을 몰사하게 했습니다(30-32). 그 후에는 다시 가다라 주민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예수님에 대해 자기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오신 분으로 여기게 하고 배척하게 했습니다(33-34). 귀신은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를 대항하기를 멸망하는 그 날까지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에게 귀신이 역사하면 예수님과 결코 관계를 맺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만큼 총명하다고 해도, 결코 그 뜻에 기꺼이 순종하지 않습니다. 마지못해 굴복하는 경우에도 예수님에 대해 ‘나를 괴롭게 하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공연히 ‘예수’라는 이름을 대적하며 과도하게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본문의 광인들처럼 됩니다. 이런 점에서 귀신에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단순히 뇌에 물리적인 이상이 생긴 정신 이상자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께서 귀신의 요청을 수락하셨을까요? 그 허락으로 인해 돼지 2,000마리가 죽었고 그 곳 주민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귀신들의 꿍꿍이를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왜 귀신들의 악한 계획을 원천봉쇄하지는 않으셨을까요? 귀신들은 곧장 지옥으로 보내버리거나 그 동네 바퀴벌레들에게 들어가게만 하셨더라도 동네 주민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왜 귀신에 사로잡히도록 그냥 두시는가?’, ‘왜 온갖 질병과 재앙이 우리네 삶에 닥치도록 방치하시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이런 문제는 신정론, 곧 악의 존재도 신의 섭리라고 보는 문제에 속합니다. 신정론은 욥기에서 잘 다루어졌는데, 욥은 자신의 삶에 닥친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불행 때문에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친구들과 많은 변론을 벌였고 하나님 앞에서 탄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욥기의 독자만이 천상에서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알뿐, 욥 자신은 끝내 자기 삶에 닥친 불행의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그 분을 신뢰하게 됩니다. 모든 이치를 깨달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겸손히 고백하고, 자기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이 있음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하신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꼭 악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불행이 닥치는 것은 아닙니다. 숭고한 뜻을 품고 주님의 일에 헌신했던 사람이 어이없는 사고로 죽는 경우가 있는가하면, 몹시도 사악한 사람이 평안하게 잘 사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여러 가지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특징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귀신들의 요청을 수락하신 이유에 대한 충분한 대답은 힘듭니다. 그러나 몇 가지는 분명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임의대로 쓰실 권한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같이 했다면 남의 양돈 사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친 것이 되겠지만, 예수님은 그 돼지를 창조하신 원래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있어서 예수님께 도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귀신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분과 접하는 사람들은 병에서 구원받았고, 폭풍 속에서 구원받았으며,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아직 아니’ 완성되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가 되어 그 나라가 완성되기까지는 어떤 모양으로든 귀신들의 세력과 그 영향이 잔존해 있을 것이어서, 이 땅에는 여러 가지 악한 일들이 계속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셨습니다.

셋째로, 귀신들을 사악한 정체를 폭로하셨습니다. 귀신은 마치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조용히 사람들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단히 사악하고 교묘한 귀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백일하에 폭로하셨습니다. 그 존재가 얼마나 파괴적인지도 분명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귀신만 나가면 광인도 다시금 정상적으로 회복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넷째로, 광인을 위해서 그리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사회의 암적인 존재로 여겼습니다. 스스로도 자기들이 쓸모없고 백해무익한 인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귀신의 세력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광인들이 그러한 희생과 그러한 사랑까지는 몰랐다하더라도, 자신들을 위해 돼지 2,000마리를 희생하셨다는 것, 그 만큼 자기들을 귀하게 여기신 사랑은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학하지 않고 자기를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돼지 치던 자들이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온 시내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동구 밖에 나와서 그 된 일을 보고 예수님으로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습니다(33-34). 그들은 사람보다 돼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미친 놈 두 명보다는 돼지 2마리가 더 소중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한 사람이 변화되어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양돈 사업에 있었습니다. 구세주의 구원에는 무관심하고 눈앞의 이익에 민감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 가다라 지방에 살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한국인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은근히 거절하는 이유는 그 분을 받아들일 때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가 부담스럽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 동안 나에게 즐거움을 주던 습관을 포기하고 짭짤한 수입에 손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내 삶에 방해 되지 않은 만큼, 내 돈에 손해가 안 생기는 만큼만 믿으려하고, 그 분이 삶의 중심에 들어오시는 것이나 내 삶의 전영역을 통치하시는 것을 꺼립니다. 그것을 괴롭게 여깁니다. 그 분과 직면하게 될 때 거룩한 삶으로 변화되는 것, 참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들에 무관심합니다. 그저 ‘아휴, 저 돼지 다 팔면 돈이 얼마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내 삶과 사업에 보탬이 되고 돈이 된다고 해야 예수님을 받아드립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고치시며 풍랑조차 잠잠케 하시고 귀신도 제압하시는 분이시지만, 아무 것에도 제약받지 않는 그 분의 전능하심은 이런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에 의해 제약을 받으십니다. 그들의 삶에는 더 이상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와 사랑이 또 그 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단지 배척을 당합니다. 사실 돼지 2,000마리면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가치관은 그 2,000마리보다 한 생명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가다라 지역 복음사역에 지장을 받으면서도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은 가치관, 예수님과 같은 긍휼, 예수님과 같은 관심, 예수님과 같은 희생이 우리네 마음을 지배하기를 간구합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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