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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령이 가난한 자 (마 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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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5~7장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모인 무리를 향하여 교훈하신 말씀으로서 "산상보훈"이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

  인도의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영국과 싸우다가 2,338일을 감옥에서 지낸 사람인데 그는 비록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평생 산상보훈을 애독하였고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특별한 선물로 마태복음 5-7장을 다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말씀을 생활의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빚을 받으러 갈때는 이것을 읽고 갔다고 합니다. 인간으로 너무 못할 짓을 할까봐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면서도 그리스도의 교훈대로 살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인 우리가 산상보훈이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실천하지도 않고 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산상보훈을 좀더 잘 이해하고 묵상해서 우리의 생활 원리로 삼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산상보훈 중에서도 마태복음5장3-12절까지가 그 유명한 예수님의 팔복교훈입니다. 이제 팔복중에 제일 앞에 나오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오늘 아침에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팔복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히말리야와 같은 높은 산을 등반할 때 요소요소마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그 캠프를 하나 하나 지나서 정상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정상을 오르는데 필요한 8개의 베이스캠프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베이스캠프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 "심령의 가난"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심령의 가난이란 심령이 영혼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경제적인 궁핍을 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경제적인 가난이나 궁핍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인 빈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식의 부족이라든지, 지각의 부족 혹은 정력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류의 것을 다루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이라고 하지만 심령의 가난은 성령의 부족을 의미하는 것도 분명 아닙니다.

  분명 이러한 것이 가난한다는 것은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주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은 스캔달(scandal)입니다. 치욕이요, 수치스러운 것입니다. 난 여러분들이 이런 것으로 가난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가난, 질병, 고통은 축복이 아닙니다. 이런 것은 축복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축복에 이르는 통로와 방편은 될 수 있지만 그것이 축복의 정상이나 목표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야할 여정이며 과정이여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부요하기 위하여 잠깐 경험해야 할 몫인 것입니다.   
  가난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벗어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난을 면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해방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주여 해방시켜주시옵소서!  이 가난에서 이 질병에서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시옵소서! 여러분 기도하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평강주시기 위함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하게 하시기 위해서 가난에 처하셨습니다. 우리의 가난을 짊어지셨습니다.

  본문에서 '가난하다'는 헬라 말의 뜻은 '가난하다'외에 '무엇 무엇 때문에 고통스럽다' '무엇에 대하여 겸손하다' '비천하다' '파산되었다'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로 볼때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란 말이 아니라 영혼이 가난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고통스러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이 모든 고통이 풀어지리라 믿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지나칠 정도로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켜주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는 마리아를 기념하여 말구유 자리에 세운 기념 예배당이 있다고 합니다. 그 예배당은 꾀 큰데 출입구는 단 하나뿐입니다. 그것도 아주 좁고 낮아서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을 정도 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은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한 곳에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은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는 자와 함께 거하나니 (사57:15) 하셨고,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66:2)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비천함을 아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한 유대인 랍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쪽 주머니에 돌을 하나씩 넣고 다녀야 한다. 하나에는 '나는 티끌과 재에 불과 하다'라고 새기고, 다른 하나에는 '세상이 나를 위해 창조 되었다'라고 새겨 놓아라.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한 개씩 꺼내 사용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한쪽면에 치우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티끌과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속에는 죄밖에 없으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발견하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며 이제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갈수 없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나 노력이나 성취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심령의 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익함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비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가난은 그 자체가 가장 절실한 형태의 회개입니다. 그 예로 성전 한구석에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기도하던 죄 많은 세리를 들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죄 많고 반항적이며 하나님께 자신을 내세울 만한 아무런 도덕적 미덕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파산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마음의 가난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인간의 총체적인 고백이되며 또한 하나님께 의지하지 아니하면 전적인 무능력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전적인 겸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시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거인 골리앗 앞에 나서는 다윗은 사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서 싸웠습니다. 칼과 단창으로 나오는 거인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것은 사울이 준 칼이나 갑옷을 입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면 그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며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도 없는 존재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교만을 산산히 부셔뜨리고, 우리가 가진 모든 자원이 다 바닥나버린 사람처럼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이런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바클레이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비천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하나님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이다 고 말했습니다. 아직도 내가 세상에서 의지할 것이 많은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장이 많고 이유가 많은 것은 심령이 가난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려한 사람을 찾지 않으신다.
유창한 사람에게
의존하지도 않으신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능한 성도만을 쓰시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을 찾으신다.
주님의 십자가의 빛 안에서
자신의 어떠함을 본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이루기 원하실 때는,
자기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알고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자기의 자신감으로 삼는 사람을 취하신다.
- 아이런 사이드
       
  가난한 사람이 가지는 공통적인 특징 중에 하나가 가난한 사람은 늘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분명 결핍이나 부족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못보고 충만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배가 고픈 사람에게 음식이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고, 등록금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한 사람에게 공부하는 일이 귀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찾습니다. 구합니다. 두드립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가난은  신앙의 근본 이 되는 것입니다. 부자는 한술 밥에도 베부르지만 거지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안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심령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찾고 은혜를 찾아 헤멥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나한 자가 받을 복은 "천국이 저희 것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배부른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시17:10, 눅18:11).  요한계시록 3:17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 교회의 불행이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직물산업과 약제기술이 발달하였고 무역활동이 왕성했던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 부여하고 큰 도시에 세워졌던 라오디게아교회 역시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그렇지만 라오디게아 교회가 버림받은 것은 육적인 부유함으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라고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가장 심한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그렇지는 않지만 꼭 부자된 것이 좋은 것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자 되어도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누립니다. 그래야 영원히 삽니다.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을 때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칭찬을 듣고 성공의 궤도를 잘 달리고 있을 때 더욱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을 때, 이럴 때 나는 배부른 자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멸망의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하면서 우리의 심령이 가난하도록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악한  마귀 사단은 지금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잘 믿는 자라도 선택받은 사람들까지도, 사명자라도, 예외없이 마귀는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우리네 인생에게 있어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복이요 큰 보화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최고로 심령이 가난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러했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으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누리는 복을 다 누려야 할 줄 믿습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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