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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루는 교회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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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스 워드가 한국서 자랐다면? 

미국 최대의 프로풋볼 스타가 된 하인스 워드의 신화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한국계 혼혈아인 하인스 워드(미국)가 6일 열린 북미프로미식축구리그(NFL) 슈퍼볼에서 눈부신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고 최우수선수(MVP)가 되면서 세계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워드의 성공신화를 소개하면서 어머니 김영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성실과 정직, 사랑을 배웠다고 말하는 하인스의 효성과 김 씨의 헌신적인 모성애에 세계인들은 감동하고 있습니다. 역경을 겪으면서도 하인스에게“1등이 되기보다 겸손하고 감사하라”고 가르친 김 씨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이 뜨겁습니다. 하인스는“어머니는 나의 인생과 함께 한 사람”“어머니는 자신의 삶의 주요 요소”“어머니는 먼 한국에서 이곳 미국으로 와서, 정부 지원도 받지 못하고, 가족도 없는 이곳에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에게 옷을 입히고 나를 키웠다”고 말했고 또한 그의 어머니 김영희 씨는“아들아, 올라갈 땐 내리막 생각해야지”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땅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혼혈로 태어나 이산가족이 되어 아빠와 엄마 집을 두루 거치며 자란 그가 어떻게 4년간 260여억 원을 받는 스타로 변신했을까요? 그의 사례는 또한 인종 문제에 대한 미국 사회의 포용력을 보여 주는데 그것은 건강성과 개방성입니다. 지금도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 문제가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이 같은 성공 스토리쯤은 만들어 낼 역량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이 한번 자문할 것이 있습니다.“그가 만일 한국에서 컸어도 이렇게 환히 자랄 수 있었을까?” 다양한 인간들의 환경과 인격과 개성과 은사들이 모여서 아름답고 웅장한 인간세계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노라면 분명히 주인공이 있고, 또 조연급, 또는 단역 등의 연기자들, 엑스트라들도 있습니다. 연극이나 영화들은 본래 인간사회를 축소해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사회라는 곳은 언제나 그 중심인물이 있고, 그를 보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특이한 공동체입니다. 이 안에는 그 출신부터 성장 배경, 취향, 재능들이 다르고, 은혜 체험의 경험들이 각각 다른 이들이 모여서 교회의 몸이신 주님과 한 지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은 다양한 영광을 받으십니다.

조화와 연합의 행복

교회 안에는 다양한 분들이 많이 모여 있습니다. 다양한 개성과 직업, 그리고 다양한 재능과 생각들을 가진 분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런 다양함 속에서 하나를 이루어 평화롭고 행복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영암교회의 모든 가족들은 생각도, 모습도 다르지만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인 구원공동체이면서, 같이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박수치고,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입니다. 아름다운 신앙의 연합은 힘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조화입니다. 다양한 개성, 다양한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가야 합니다. 마치 각자의 소리는 다르지만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어 가는 합창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소리가 크게 나면 합창은 망치는 것이며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소리를 잘 조절해야 합니다. 내 한마디의 말과 행동 때문에 화평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깨기도 합니다. 화목의 사람이 모여 행복을 만들어내는 곳이 교회입니다. 행복한 공동체를 이루려면 잘 협력해야 합니다. 협력이 잘 되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협력하면 힘이 납니다. 서로의 행복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협력하지 않으면 작은 일에도 피곤하고 짜증납니다. 사랑과 수고는 협력할 때 더욱 가치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서로 앞장서서, 같이 힘을 합쳐서 봉사를 해야 합니다. 교회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될 때에, 복음전도가 가능하게 되고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조화와 연합의 결과는 행복입니다. 이런 조화가 있는 교회, 연합에 앞장서는 교회, 그래서 행복한 우리 영암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아셨지만 베다니로 다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마련해 준 만찬의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나사로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받았던 그 가족은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대접했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동안, 예수님의 지위에 어울리는 존경과 감사는 마리아를 통해 표현되었습니다. 마리아는 500ml의 값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그분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소중한 향유였지만 마리아는 감히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 못하고 그분의 발에 물처럼 붓고, 수건 대신 자신의 머리털로 닦았습니다. 자신을 종보다 더 낮추어 예수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존귀하신 분인지 알았던 마리아의 행동은 존귀하신 주님께 어울리는 사랑과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께 사용한 것을 부적절한 용도에 허비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그에게는 마리아와는 달리 예수님의 존귀함에 대한 깨달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분에게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말 소중하게 보인 것은 그 향유와 향유의 값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구제’라는 명분을 내세워 자기 생각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그는 가난한 자를 구제한 일도 없고, 그런 일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히려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준 돈조차 횡령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사로와 같이 열심히 은혜 받는 사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표 격이 되는 사람은 나사로입니다. 왜냐하면 삼남매 중에 그가 제일 연장자이기도 하고 예수님을 위해 베푼 이 잔치는 그를 살려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잔치의 동기를 제공해 준 사람은 나사로인데 그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죽을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나는 것도 감격스러울 것인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으니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그런 때에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는 것은 하나도 지나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음도 굴복할 수 있습니다. 나사로는 이 은혜 때문에, 죽음에서 살려주신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도 나사로는 예수님 곁에 앉은 자 중에 있다고 했는데 그 시간도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것을 듣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기운이 있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는데 나사로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체험으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집안의 이야기인데 등장인물이 제일 큰오빠 나사로, 다음이 마르다, 막내는 마리아입니다. 그들은 각기 체험도 다르고, 신앙 생활하는 모습도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교회 안에는 나사로와 같은 체험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마리아와 같은 헌신적인 이들도 있고, 마르다처럼 일에 묻혀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살기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의 말을 들으면 온몸이 오싹해집니다. 그런데 그와는 반대로 생기 있는 말이 있는데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기운이 있는데 살리는 기운입니다. 그 기운에 살아난 나사로가 지금 그 기운을 쬐고 앉아 있습니다. "예수 곁에 앉은 자 중에 있다"는 말은 그분의 곁에서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특징 중에 하나가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시간 중에 거의 절반을 말씀을 증거하는 이유도 말씀의 능력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쏟아져 내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와 함께 앉은 자중에 있더라"는 이 간단한 문장은, "이제는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야 봉사도 기쁨이 되고, 헌신도 있지만 은혜 없이 매일 교회만 쫓아다니면 전부 짐이 될 뿐 기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인물이 나사로가 되었던 것처럼, 여러분은 이 교회의 한 중심에 들어와,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여러분의 자리가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우선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취해 있어야 합니다.

마르다와 같은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지금 이 잔치는 예수님을 위해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있었으니 도와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예수님 곁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나사로가 그를 도와주겠습니까? 당연히 마르다의 몫이었습니다. 지금 마르다는 예수님뿐 아니라, 마리아, 나사로 그리고 거기 있는 다른 제자들, 또는 다른 손님들, 심지어 가룟 유다의 몫까지 챙기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수고 때문에 다른  빛나는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눅10장에 보면 마르다가 길 가시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을 했습니다. 아마 오늘 이 집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신 마르다는, 정신없이 음식을 장만하고 집안을 치우면서, 도저히 바빠서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동생을 좀 보내서 일을 도와주게 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고, 오히려 자기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두둔하셨습니다.

눅10:41절에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은 섬김 자체가 아니라 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일꾼이었습니다. 일하는 이들의 장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은혜 받을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이 일꾼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까딱하면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동안 수고한 것이 다 쏟아지고 맙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 안 하셔도 그 사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누가 무엇을 했고, 어떤 수고를 했는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내 혼자 이렇게 고생하는 것, 어느 누가 알아주기나 하나?" 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알아주는 인간이 없어도 하늘에는 알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사실은 목회자들도 압니다.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거의 대부분 다 압니다.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느낌으로 압니다. 얼굴을 보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 압니다.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압니다. 그런데 주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일꾼이 되기 힘들거든 협조자라도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일꾼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에 말꾼이 많으면 자꾸 기우뚱거립니다. 구경꾼이 많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훼방꾼이 많으면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일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일꾼 되시기 바랍니다. 그날의 아름다운 사건 밑바닥에는 마르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날 마리아의 헌신도 마르다가 일하는 동안에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금 이런 일꾼이 필요합니다. 교회에는 이런 이들이 있어야 부흥됩니다. 여기서 일꾼이란 주님을 위해서 땀 흘리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전도할 일꾼, 기도할 일꾼도 필요하고, 봉사하고 가르칠 일꾼도 필요하고, 헌금할 일꾼도 필요합니다.

마리아 같은 열심히 헌신하는 사람

마리아는 막내였는데 그는 상당히 귀한 향유였던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머리털로 향유가 흐르는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자기의 머리털로 씻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여성의 머리카락을 귀중하게 여겼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공석에서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유대인 풍속에서 큰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런 것을 돌아볼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여성의 머리카락은 여성의 영광인데 그것으로써 발을 씻는 수건으로 대용했다니 그 여자의 희생심이 얼마나 큽니까?

"순전한 나드"라는 말이 나옵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향유입니다. 한 근이라고 했는데 다른 성경에는 한 옥합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부피로 따지면 한 옥합이고, 무게로 보면 한 근이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옥합에 담아 가지고 와서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고, 마가복음에는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것은 마리아에게도 물론 최선이었지만, 예수님도 일생 동안 그렇게 진지한 헌신을 받아 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히 "이 세상에 복음이 증거 되는 어느 곳에도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록하여 전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부었지만, 그것은 예수님에게 일생 동안 잊혀 지지 않는 감동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이제 일 주일 후면 예수님은 죽으십니다. 그래서 시비하는 유다에게 "가만 두어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막14장에는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밀 준비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드린 향유는 결국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소중한 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하나님 앞에 수고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주님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념비적인 헌신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움을 주어야 할 사람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지금 주님의 교회가 당하고 있는 절실한 어떤 문제는, 이 기회가 지나가면 다시는 그런 일에 드리고 싶어도 드릴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기회, 헌신의 기회, 충성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아무 때에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는 이런 저런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는 좀 하는데 일은 안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일은 좀 하는데 기도는 안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전도를 안 합니다. 다 잘하는데 헌금을 안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난이 아니라, 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든 충성을 다 받으십니다. 교회는 한 가지 일만 잘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물질로 예수님께 봉사했다면 마르다는 몸으로 헌신 봉사한 것입니다. 봉사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에 따라서 각기 다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를 놓고 누구의 봉사가 더 훌륭한가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은혜 받으려고 앞에 앉는 사람도 필요하고, 그들이 밥 먹도록 준비하는 이들도 필요합니다. 받은 은혜를 물질로 섬기는 이들도 필요하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도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일이나 찬양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필요로 합니다. 청소하는 이들, 모든 교인들이 질서있고 은혜롭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안내하는 분들, 차량부, 새가족부에서, 각각의 사역의 현장에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분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처럼 보이는 곳에서 수고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숨은 봉사자들이 모여 3중주, 4중주, 5중주, 나아가서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하모니를 이루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낭비나 소비가 아닌 헌신자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모든 것을 낭비하거나 소비하거나 헌신을 합니다. 낭비는 필요하지 않는데 사용하는 것이고 소비는 필요하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헌신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혹은 예수님께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비나 소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헌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시대를 초월하여 헌신자를 찾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몸값으로 세우신 교회마다 마리아 같은 헌신자를 필요로 합니다. 자원적 헌신 자, 최선의 헌신 자, 어떤 것도 아까워하지 않는 자, 비방을 이기는 헌신자, 시험을 이기는 헌신자, 순수한 헌신자,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는 헌신자입니다.

영암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예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또한 예수님의 종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나의 언어와 감정을 통해 드러나는 나의 가치관과 관심사들은 무엇인지? 내가 예수님보다 더 소중한 것처럼 반응하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의 중심에 주님을 가장 먼저 모시고, 향유 옥합을 드린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는 신실한 주의 자녀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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