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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라합의 놀람 이야기 (히 11:31, 약 2:25, 수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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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사랑하는 성혜진 어린이가 작년 1월 15일 저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방명록에 올린 일이 있습니다. 그 글의 제목은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목사님이 지난 주에 설교말씀 중에,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목사님을 남한으로 보내셨다고 하셨잖아요. 그때 초등부 전도사님의 설교 말씀이 생각 났어요. 예수님도 놀라실 만한 믿음이 있다라는 말씀이 생각이 났어요. 목사님의 어머니도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목사님을 남한으로 보내셨고, 목사님은 하나님이 목사님을 지켜주실 거라 믿고 남한으로 무사히 오셨을 거에요. 그래서 목사님의 어머니의 믿음은 하나님을 아주 놀라게 하셨을 것 같아요. 저는 아직 하나님을 놀라게 할만한 믿음은 없지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고 저와 함께 하실 것을 믿어요. 왜냐하면 제가 무섭거나 두려울 때, 저에게 용기를 주시는 것 같아서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하나님께서 놀랄만한 믿음을 가지고 싶어요. 목사님 안녕히 계세요. 2005/1/15/토요일 성혜진 올림♡”

  저는 즉시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방명록에 올렸습니다. “사랑하는 성혜진에게, 혜진이는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는 눈과 귀와 마음이 맑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글 쓰고 표현하는 솜씨도 뛰어 난다. 어른 예배의 설교를 그렇게 잘 들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와 혜진이의 착한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목사님의 어머니의 믿음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목사님의 믿음이 예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혜진이가 가르쳐 주어서 생각하게 되었다. 고맙다. 하나님께서 혜진이에게 더 큰 믿음과 깨달음과 은사들을 많이 베풀어주실 것이다. 많이 사랑한다. 2005년 1월 15일 저녁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에는 여호수아를 놀라게 했고 하나님을 놀라게 한 그리고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기생 라합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기생 라합을 생각할 때 여러 가지로 놀라게 됩니다. 기생 라합의 이름이 어떻게 히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인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음에 기록되어 있는가를 생각하며 놀랍니다. 또한 기생 라합의 이름이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에 나타나 있는가를 생각하며 놀라게 됩니다. 기생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 중 11번째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마1:5,6).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라합의 놀람 이야기”입니다.

  첫째, 라합의 믿음이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어 여리고를 정탐하게 했습니다. 두 사람이 여리고를 정탐하기 위해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그곳에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집이 여리고 성 성벽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수2:1). 그런데 기생 라합의 집은 창녀들이 모여 살던 부도덕한 장소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던 위험한 장소였습니다. 게모스 밀곰 바알 아세라 신들을 섬기던 우상숭배로 가득한 부패한 장소였습니다. 여리고 성과 함께 조만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저주의 장소였습니다. 기생 라합은 윤리적으로 부도덕한 곳에서 살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곳에서 살고 있었고, 종교적으로 부패한 곳에서 살고 있었고, 심판을 받을 저주의 장소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이 녹고 온 몸과 정신이 뒤흔들리는 뜨거운 믿음의 고백을 발견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2:8-11).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너무나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히11장은 라합을 소개하면서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와 같은 기생 라합의 믿음의 고백을 들은 두 정탐꾼은 너무나 놀랐을 것이고, 두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도 너무나 놀랐을 것이고, 라합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도 너무나 놀라셨을 것입니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향해 그런 뜨거운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는데, 홍해를 육지처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향해 그런 마음이 녹아 내리는 뜨거운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기생이, 어떻게 창녀가, 이런 뜨거운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중심이 뜨거워지시는 감동을 받으셨을 것입니다(욜2:18). 물론 그 당시 기생 라합을 비웃고 멸시하고 정죄하는 소위 도덕적인 군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도 기생 라합을 비웃는 소위 도덕적인 군자들이 교회 안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생 라합을 내려다 보시던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의 계획에 수정을 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선민들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의인들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도덕한 죄인들을 사용하는 것이 인류 구원의 사역을 위한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의논을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셨고, 죄인인 한 여인을 죄 사함 받은 사람의 대표로 보여주셨고,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으로 사용하셨고, 이방인 고넬료를 가이사랴 복음화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닌가? 저는 여기까지 설교문을 쓰다가 제 가슴과 눈에서 탄식의 소리가 흘러나오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처음으로 기생 라합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부도덕한 죄인들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믿음의 어머니 라합이시여, 그리고 부도덕한 죄인들이 구원의 도구들로 사용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신 믿음의 어머니 라합이시여, 당신께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라합은 두 정탐꾼과 여호수아를 놀라게 한 여인이었고, 하나님을 놀라게 한 여인이었으며, 우리들을 놀라게 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이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둘째, 라합의 행동이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왕이 군인들을 자기 집에 보내기 전에 이미 두 정탐꾼을 자기 집 지붕에 숨겼습니다. “그 여인이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수2:4).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겼더니”(수2:6). 기생 라합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고 믿은 두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의 손길을 폈습니다.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기서도 라합이 두 사람을 숨기면서 안 숨겼다고 거짓말을 했으니 잘못을 범했다고 쓸데 없는 비난의 말을 하기를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저자는 두 정탐꾼을 숨긴 라합의 행동을 아주 높이 평가했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옳은 것이긴 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 구원의 윤리와 죄인 구원의 도덕입니다. 기생과 창녀를 받으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더 높은 차원의 하나님의 윤리와 도덕입니다. 하나님의 윤리와 도덕은 모순되는 윤리와 도덕이고, 역설적인 윤리와 도덕이고, 불가해한 윤리와 도덕입니다. 두 사람을 지붕 위에 숨기고 안 숨겼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 말일 수도 있으나,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을 자기 집에 숨긴 것이 하나님의 윤리와 도덕에서는 얼마든지 받아 드려질 수 있는 행동이었고 칭찬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라합이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자기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접대하는 것을 보면서 두 정탐꾼들은 너무나 놀랐을 것이고, 두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여호수아도 너무나 놀랐을 것이고, 이들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계시던 하나님께서도 너무나 놀라셨을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 10장에서 나그네들을 사랑하라고 그렇게 가르쳤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그네들을 사랑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기생이, 어떻게 창녀가,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나그네들에게, 내가 보낸 사자들에게, 자비와 도움의 손길을 펼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땅을 내려다 보시면서 중심이 뜨거워지시는 감동을 또 받으셨을 것입니다(욜2:18). 믿음에는 반드시 나그네들을 향한 자비의 행동이 따라야 하는데 라합의 믿음에는 나그네들을 향한 자비의 행동이 따랐습니다. 믿음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냉정한 지성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Sola fide’ 즉 ‘믿음으로만’ 이라는 모토를 내 세웠는데 그것은 잘못된 모토였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5:6).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결핵 약이 필요한 북한 사람들에게 결핵 약을 보내주고, 학교가 필요한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학교를 지어 주고, 생활비가 필요한 중국에 있는 고아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보내주는 것이 믿음이 있는 증거입니다. 기생 라합은 믿음과 함께 자비의 행동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2:25). 우리는 믿음과 함께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약2:24). 기생 라합의 행함이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셋째, 라합의 친족 사랑이 하나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12,13). 기생 라합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게 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자비와 도움의 손길을 펴면서 자기 가족과 친족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되 찾게 되었습니다. 수가성 여인처럼 라합도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수가성 여인처럼 라합도 가족들을 이미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생 라합의 가슴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가성 여인의 가슴에 변화가 일어난 것처럼, 기생 라합의 가슴에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피차 버리고 버림을 당했던 부모와 형제와 친족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인간성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부모애와 형제애와 친족애가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완전히 타락하고 부패하여 인간성이란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기생 라합의 가슴 속에 부모와 형제와 친족에 대한 인간애와 인간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또 한 번 중심이 뜨거워지시는 감동이 일어났을 것입니다(욜2:18). 황폐해진 기생 라합의 가슴 속에 형제애가 싹트는 것을 바라보신 하나님의 마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깊은 감동과 놀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라합의 가슴과 입에서는 저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기도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수2:12,13). 라합은 자기의 부모와 형제와 친족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기도를 했습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자기와 가족들을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그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했는데 지금 기생 라합은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기생 라합의 가슴에 일어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바라본 두 정탐꾼은 놀랐을 것이고 하나님도 놀라셨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 얻기를 뜨거운 마음으로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기생 라합이 지금 가족과 친족들의 구원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놀라시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오랜 후에는 수가 성 여인이 수가성으로 달려가서 수가성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놀라셨고, 이방 사람 고넬료가 자기의 가족과 친족과 이웃을 다 불러다 놓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다시 놀라셨지만, 지금 라합이 가족과 친족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 크게 놀라셨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기생이, 어떻게 창녀가, 가족과 친족 구원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놀라셨을 것입니다. 두 정탐군은 라합에게 이렇게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희를 너를 대우하리라”(수2:14).

기생 라합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과 친족이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모두 무너져 망하던 바로 그 순간 붉은 줄을 창에 매었던 라합과 그의 친족들이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창에 매었던 붉은 줄은 십자가를 상징했습니다. 십자가 아래 모였던 라합의 친족들은 모두 구원을 얻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수6:25). 기생 라합의 운명은 바뀌어졌습니다. 기생 라합은 후에 살몬이라는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해서 보아스를 나으므로 다윗의 조상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살몬은 두 정탐꾼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놀람의 역사입니다. History of surprises 입니다. 그런데 그 놀람의 역사 가운데는 하나님을 놀라게 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기 저기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놀람의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도덕적 군자들에게 비난과 멸시를 받던 기생 라합이 바로 그 놀람의 주인공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묵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함부로 입을 열어 쓸데 없는 멸시나 비난의 말을 하지 말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묵상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너무 쉽게 남을 멸시하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사생아나 혼혈아는 물론 탈북인이나 외국인들을 너무 쉽게 멸시하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소위 의인들보다는 차라리 죄인들에게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사도 바울처럼 죄인 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5). 기생 라합이 지녔던 믿음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생 라합이 지녔던 자비의 행동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생 라합이 지녔던 친족 사랑을 지닐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생 라합처럼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있는 믿음과 행동과 사랑을 지닐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생 라합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운명이 바뀌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의 이름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 하나님, 의인으로 자처하는 우리들의 위선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옵소서!” (김명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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