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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토한 것 (삼상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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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건 뒤에는 여자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무슨 작가들이 소설을 쓸 때 잘 적용시키는 원칙이며 어딘지 여자를 낮추어 보는듯한 뉘앙스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지만, 또한 틀리지는 않는 말입니다.
  무슨 문제를 일으키고 일을 전개시켜 나가는 사람은 주로 남자라 해도 보통 애인이나 아내는 있을 것이고 아니면 최소한 어머니는 있을 것이니, 적어도 여자 한 명 이상은 모든 사건 배후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소위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남자이고 그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사의 배후에서 은근하게 발휘되는 여자의 힘은 오늘 본문 사무엘상 1장에서도 나타납니다.
  이 당시의 이스라엘은 사사 시대로부터 이제 막 왕정 시대로 넘어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사무엘서는 바로 그런 복잡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사사요 선지자요 또한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무게 있는 역사서인 사무엘서의 제일 첫 장이 매우 평범한 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란 바로 저 유명한 기도의 성도 한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실로 중대한 전환점이고 또한 어려운 고비이기도 했던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 이름 없던 한 여인의 기도를 그 시발점으로 삼아 그 실마리를 풀어나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한나의 기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오늘도 그녀의 본을 따라 하나님과 영으로 교통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1. 기도는 사람이 모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오묘하게 성취해 갑니다.

  본문 1절로부터 3절에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 /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사무엘의 아버지가 된 "엘가나"는 여기에서 "에브라임 사람"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말은 에브라임 족속이란 뜻은 아니고 그가 에브라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실제로는, 에브라임 지경의 성읍들을 기업으로 얻었던 고핫 자손에 속한 레위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그 "엘가나"란 '하나님께서 형성하신 자'란 뜻인데, 이름에 걸맞게 그는 상당히 신심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란 '풍성한 은혜'란 뜻이고 "브닌나"는 '홍보석'란 뜻인데, 이 두 여인이 어떻게 대조적인 인물들이었는지는 그 이름에서부터 이미 충분히 짐작이 갈만할 것입니다.

  문제의 발단은 한나는 "무자하고" 브닌나는 "자식이 있는" 여인이었다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결혼한 여자가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극히 부끄러운 일이었고, 실제로 남편 쪽에서는 이혼을 주장할 수 있는 합당한 사유 즉 옛날 우리나라로 치면 소위 칠거지악에서도 제일 첫 번째에 해당될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연히 한나는 그야말로 서럽고 한 많은 여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오히려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실로"에 있는 성소에 갈 때마다 자기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단순히 어떤 한 많은 여인의 개인적인 소원이 성취되는 정도의 수준에서 머무르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특별히 "만군의 여호와"라고 칭하고 있는데 이것은 전우주를 통치하시는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 절대주권자께서는 지극히 큰 일을 계획하고 계셨는데, 그 일이 바로 한나의 기도를 시발점으로 하여 개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그 당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성소에 있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 한나의 기도가 올려졌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한 가지 의미심장한 사실을 밝히는 말입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애굽식 이름들이었습니다.
  평범한 레위인 엘가나나 그 아내 한나만 해도 그 이름들이 그저 신앙적인 뜻들로만 가득 차 있는데, 소위 대제사장 집안의 아들들의 이름에서는 벌써부터 세속적인 냄새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엘리 제사장의 자녀 신앙교육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나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그 중대한 결정적 시기에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실 뜻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물론 한나는 그런 역사적인 큰 배경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그저 자기 개인의 슬픈 현실을 두고 간구하며 서원한 것뿐이었었지만, 그 기도는 한 여인의 소원 성취에서 끝나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 기도의 결과 태어날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와 역사를 위하여 가장 크게 사용하실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사사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사사가 되었으며, 타락한 엘리 가문을 청산하고 참된 제사장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를 연 첫 왕 사울을 세웠을 뿐 아니라, 최전성기의 왕이 된 다윗까지 기름부터 세운, 실로 역사적인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셨다"고 했는데, 이 말은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한나는 기도하게 되었고, 그 기도 중에 자기 아들을 위하여 나실인의 서원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 아들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 완전히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처럼 크게 쓰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나는 자기 아들이 그처럼 이스라엘 전체를 살리는 큰 일에 쓰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기도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그처럼 크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기도는 이처럼 엄청난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를 두고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지고 열을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교황의 대사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았던 그날 밤의 기도는 로마천주교의 1000년의 영적 암흑기를 끝장내어 버리고 종교개혁이라는 어마어마한 새 역사를 시작하게 만들었습니다.
  '스코틀랜드를 내게 주소서'라는 요한 낙스의 기도는 참된 개혁주의 장로교 신앙이 당시의 스코틀랜드뿐 아니라 오늘의 미국과 한국에까지 이르도록 하는 위대한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역사 뒤에는 한 성도의 기도가 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별로 서원하는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그 자녀를 들어서 지금은 우상종교에 매여 있는 한 민족 전체를 회개시키고 구원해 내는 엄청난 일에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내 민족을 공산주의의 마수에서 구원해 주옵소서.'라고 기도드리면, 하나님께서는 남북의 자유민주통일뿐 아니라 이 대한민국을 당신의 구속사의 마지막 대단원의 주역으로 높이 들어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한 가지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폭발적인 열 가지로 응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에도 우리가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큰 일에 그 기도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는 어떠하겠습니까?
  실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세계를 움직이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내게 기도할 일 한 가지, 기도할 이유 한 가지를 주실 때 그것을 결코 빼먹지 않고 곧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기도는 사람으로부터 위로 받을 길이 없을 때에도 참된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4절로부터 8절의 말씀에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 /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중에도 한나와 브닌나 사이의 불화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적"이란 '경쟁상대'란 뜻이며, "격동시키다"란 말은 '괴롭히다'란 뜻입니다.
  자식 못 낳은 여인이 자식 낳은 시앗에게 당하는 고통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들입니다.

  한나가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엘가나는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엘가나는 그녀에게 특별히 세심한 배려를 베풀어주었습니다.
  여기 "제물의 분깃"이란 것은 화목제를 드린 후에 제사 드린 사람들이 나누어 먹는 음식을 말합니다.
  그럴 때에 엘가나는 한나에게 특별히 더 많이 주었는데, 아마 더 맛있는 것을 골라서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나가 "울고 먹지 아니할" 때 엘가나는 "당신한테 아들 열 명 있는 것보다도 나를 남편으로 만난 것이 더 행복한 일 아니요?"라고 위로할 정도였으니, 그는 한나에게 각별한 애처가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이처럼 남편은 자기에게 더욱 애정을 쏟고 위로해 주었지만, 한나에게는 그것이 사태 해결에 아무 실제적인 도움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그런 문제를 어디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고통을 브닌나와 한바탕 싸워서 해결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 억울함을 남편 엘가나에게 원망하거나 바가지를 긁어서 해소하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기도로써 하나님께 탄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지혜로운 대응책이었습니다.
  나중에 17절과 18절에 기록하기를 "엘리가 대답하여 가로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자기를 사랑해고 위해 주던 남편조차 달랠 길 없던 슬픔을 당하고 있었던 한나가 그날 기도드린 후에는 곧 평안과 기쁨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선 엘리 제사장이 "평안히 가라"고 축복해 준 것도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문제 많은 제사장이기는 했지만 엘리의 축복 자체는 제사장으로서의 축복이었던 까닭에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엘리 제사장이 말해 준 대로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실 하나님을 그녀가 의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아직 이때까지는 아이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임신의 징후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로부터 무슨 태몽 따위의 계시로 약속을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일단 기도드린 후에는 이제 그 모든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훌훌 털어 맡겨 버리고 가벼운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은혜" 입혀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돌아왔으니 그녀에게는 더 이상 "수색이 없고" 그저 평안과 기쁨만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괴로운 것을 속에 넣어 두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으면 그것은 그야말로 한이 되고 독이 되고 말겠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놓을 때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기도의 재료가 됩니다.
  일단 기도드린 후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하는 믿음을 얻게 될 때, 그것이야말로 좌절과 절망에 대하여 기독 신자들이 누리는 최고의 특효약이며 틀림없는 해독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455장 찬송가 2절대로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라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근심이나 두려움을 그냥 내 속에 뭉쳐 놓고 끙끙거리고만 있으면 점점 더 많이 슬프고 아파질 뿐이지 그것이 해결될 길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런 인생의 괴로운 것들을 기도할 이유로, 기도드릴 제목으로, 그리고 기도의 눈물로 바꾸어버리는 것입니다.
  일단 그처럼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는' 성도에게는 곧 이어서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라는,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아무리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안위할 수 없던 두려움, 아무리 자기를 돕고 싶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내 해결해 줄 수 없던 한숨들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려질 때에는 그 심령 속에서 반드시 즐거움에 넘치는 찬송으로 바꾸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실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려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는 말씀은 틀림없는 약속입니다.
  아무도 도와주거나 위로해 줄 도리가 없고 내 스스로는 더 더욱이 해결할 길이 없는 고통과 슬픔을 당할 때마다, 그 모든 짐들을 기도를 통하여 십자가 밑에 내려놓음으로써, 세상이 알 수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체험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기도는 사람으로부터는 오해를 받을지라도 하나님과는 마음이 통하게 해 줍니다.

  9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그들이 실로에서 먹고 마신 후에 한나가 일어나니 때에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 /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 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10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한나는 그 마음의 괴로움을 여호와 앞에서 통곡의 기도로 담아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도는 그저 슬픔 중에 통곡하는 것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서원이 담긴 진실한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만일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면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는" 나실인으로 삼겠다는 서원이었습니다.
  엘가나는 원래 레위 족속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아들이 성전 섬기는 직무를 얻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자기 자식을 그저 혈통을 따라서 평범하게 성전 직원이 되도록 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헌신된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주의 종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자각을 가지고 그런 서원을 드렸던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가 그처럼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성취하고 자신의 심령에 놀라운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된 것은, 그녀의 기도가 이처럼 질적으로 차원 높은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저 '다고 다고 하는 거머리 딸들' 식의 기도가 아니라, 그런 간절한 소원 중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진실한 서원의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방적으로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영적 교통이 있는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 이하 16절의 말씀에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 /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한나의 기도의 질이 어떠했는지를 더욱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녀가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성막의 전 문설주 곁의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 제사장은 "그녀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교인이 와서 간절히 기도하면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이 제사장의 당연한 자세일 터인데, 엘리는 기도의 조력자가 되는 대신 기도의 감시자 노릇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한나가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않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술 취해 있다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도를 큰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였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엘리 제사장은 성도의 기도를 도우지 못하는 제사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성도의 기도하는 심정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한심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속으로 말하면서" 입술만 달싹거리는 기도를 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은 분명히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기도는 소리는 없었지만 그 내용은 똑똑한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 한나가 자기가 마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독한 술"이란 당시 곡식이나 과일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을 말합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말할 때 한나야말로 술 한 잔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자식 없는 부끄러운 몸이었고, 자기를 괴롭히는 여자와 남편을 공유해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남편은 이 문제에만큼은 어떻게 도울 길을 찾지 못했고, 대제사장이란 사람도 자기를 도와주기는커녕 엉뚱한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정말 웬만한 사람이라면 한잔 마시고 시름 잊고 싶을만한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한나는 술로 자기 슬픔을 잊으려 하는 대신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기도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이라고 할 정도로 똑똑하고도 분명한, 하나님과의 영적 의사소통이었습니다.
  그녀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쏟아내어 놓고' 아무 숨길 것도, 남길 것도 없는 깨끗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소리는 없었지만 의미는 분명한 정신 차린 기도였으며, 제사장은 오해했지만 하나님께는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정확하게 다 고했던 온전한 기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는 무슨 유창한 말의 기도가 아니라 이처럼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인격체이신 하나님, 최고의 지혜와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신 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도 모를 말로 장황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 듣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곁에 함께 기도하고 있는 교인들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기도하고 있는 진짜 대상이신 하나님을, 무슨 정신이 멍한 사람처럼 여기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해도 대충 흘려듣거나, 아무 말이나 해도 잘 못 알아듣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그런 정도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례히 대하는 기도이며, 사실 신성모독이 될 기도이겠습니까?
  기도는 적어도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더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조리 있는 내용으로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세리와 이방인'들도 흔히 구하는 의식주만을 위하여 간구하지 말고, 구원 받은 은혜에 넘치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바쳐드릴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을 하는 서원의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뜻도 없는 소리를 방언이랍시고 중얼대는, 절의 중들이 화두랍시고 끝없이 반복하는 것과 같은 그런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은' 기도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알아들으시도록 '진실한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묵상으로 하든지, 소리 내어 하든지, 함께 통성으로 하든지, 그 어떤 형식으로 드리든지 간에, 오직 자신의 심령을 진실하고도 뜨겁게 내어놓음으로써 늘 '하나님과 통하는' 기도를 드리고 응답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한 평범한 여인, 아니 엄청난 한을 품고 살아가던 한 여인의 기도였지만, 그 기도는 모든 신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 기도는 개인 소원 성취에서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간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그녀를 가장 사랑하는 남편까지도 위로할 수 없던 고통 중에서도, 오히려 완벽한 평안과 큰 기쁨이 주어진 큰 축복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사람까지도 오해했던 것이지만, 하나님과는 명확하게 의사소통이 된 진정한 영감의 기도였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들은 하수와 두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수와 두게 되면 자기 실력이 늘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그야말로 '불감청이나 고소원'으로 여깁니다.
  매사가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간에 자기보다 수준 높은 사람과 자주 만나고 대화하고 교제하고 배우고 해야 자기 수준이 점점 더 높아질 수 있는 것이지, 하수나 동수하고만 상대하면 항상 제자리걸음 인생이 될 뿐인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지 아니하면 어디에 머물러 있게 되겠습니까?
  그 생각하는 것이 매사에 이 세상 것들에 머물고 그 말하는 것이 늘 인간 수준에만 맴돌 뿐입니다.
  오직 기도하는 신자만이 하나님 뜻대로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말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가운데, 그 영적 수준이 점점 더 승화되고 그 삶의 질이 날로 향상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욕심 충족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고 조국과 세계를 살리는 일에 쓰이는 기도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개인의 한과 인생의 고통을 자기 속에서 썩히고 더 큰 병으로 만들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늘 아버지께 영적 탄식으로 아룀으로써 세상이 모르는 평안과 기쁨을 맛볼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 사람의 중보가 필요 없는 기도,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있으면 하나님께 곧 연결되는 이 '직통기도'의 영적 전화선을 마음껏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통하는 기도'로써 통하여 오늘도 자신이 서 있는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의 보좌와 영적 사닥다리를 잇고, 그 하나님의 크고 깊으신 뜻과 섭리의 응답을 개인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성취해 나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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