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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믿는 이유 (요 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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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 혹은 “당신이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예수 믿는 이유를 성경에 근거해서 “나는 이런 이유로 예수님을 믿습니다”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믿는지 이유를 모른다면 서울행 기차를 타고서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지식은 몰라도 예수 믿는 이유만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사람은 누구나 멸망 받을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 가운데 첫 번째는 우리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흑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검은 피부를 갖고 태어나고, 백인을 부모로 둔 사람은 흰 피부를 갖고 태어납니다. 이는 태어나는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결정됩니다. 사람이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도 동일한 이치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했으므로 그의 후손들이 하나같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6일에 걸쳐서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엿새 되던 날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으므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어 아담의 배필로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름답고 풍요로우며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와가 간교한 뱀의 꾐에 넘어가서 선악과를 따먹고 그것을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함으로 둘 다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아담은 식물을 얻기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게 되었고,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사람의 영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이는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대로, 영이 죽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영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육신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이 세상에 사망이 임한 것은 아담이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사망은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모든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임했습니다. 이는 아담이 인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범죄하였고 그 결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이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예수 믿기 이전의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입니다(엡 2:1).
그뿐 아니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육신도 죽을 운명을 안고 태어납니다. 출생할 때부터 그 가슴에 죽음의 씨를 품고 그것을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생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한다고 죽음을 모면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병자는 자기의 병든 사실을 알아야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받고 살 수가 있지, 병든 사실을 알지 못하면 병이 깊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토록 죄에 대하여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은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왜 죄인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이지, 자신에게 부처가 있음을 발견하기만 하면 선량한 사람이 될 수 있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유교에서는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불교나 유교는 사람이 본래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소위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병든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세상 종교들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는 늪에 빠진 사람더러 제 힘으로 거기서 나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힘쓰고 애쓸수록 더 사정을 악화시킬 뿐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은 우선 자기의 노력을 멈추고 밖에서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죄의 깊은 늪에 빠진 인생들을 구하기 위해 보냄 받은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써 우리 죄를 사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마귀의 권세에서 풀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죄인이므로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자선을 베풀어도 그런 것으로 자신의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수양을 한 사람은 수양한 죄인이요, 도를 닦은 사람은 도 닦은 죄인이요, 자선을 많이 한 사람은 자선을 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중세에는 연금술이 유행했습니다. 연금술이란 철이나 구리나 납이나 아연과 같은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합니다. 값싼 금속을 가지고 황금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그처럼 매력적이고 수지맞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연금술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을 아무리 갈고 닦아도 진주가 될 수 없고, 유리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어디까지나 유리일 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없듯이, 죄인은 아무리 자신을 꾸밀지라도 죄인이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훌륭한 성현들이 적지 않게 출현하였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다 사망에게 삼킨 바가 되었습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죽었고,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도 죽었습니다. 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도 죽었습니다. 석가의 시신은 화장되었고 그의 몸에서 나온 사리들이 지금도 세계의 여러 유명 사찰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공자의 무덤은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으며 매년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냅니다. 마호메트의 무덤은 아라비아의 메디나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텅 비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참배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이 사망에게 삼킨바 되고서야 어찌 남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장사된 지 삼일 만에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는 유일한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예수님과 같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 누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말씀은 인간으로서는 감히 입 밖에 낼 수조차 없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써 그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죽어 사람들이 메고 무덤으로 가던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있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는 것은 곧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를 청산하셨음을 입증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애써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서 죽음 자체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뿐 아니라, 육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라고 했습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불못에 던지우는 것을 성경은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말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으며,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이 구약 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메시야시므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느냐?”는 질문은 곧 “예수님이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냐, 아니냐?”하는 질문과 같습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 내용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메시야 대망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이 땅에 오실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뱀은 계시록 20장 2절에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고 하신 대로 사탄 또는 마귀를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담의 원죄와 상관없는 무죄하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속하실 메시야는 죄가 없는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고 했는데, 이새는 곧 다윗 왕의 부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호칭할 때 “다윗의 자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법적으로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는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 35:5-6)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메시야께서 행하실 기적에 대한 예언입니다. 소경이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뛰게 되고, 벙어리가 말하게 되는 기적은 아무나 행할 수 없고 오직 메시야만이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기적을 일컬어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합니다. 이 같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보거든 그가 곧 메시야이신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그리스도의 표적은 현대 의술로도 고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불치의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는 기적을 셀 수 없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4절에 보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께서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마음이 병든 자들, 마귀에게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 어느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동리의 회당에서 이사야서 61장의 예언을 읽으셨습니다.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예언을 읽으신 후에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을 해방시켜 주셨으며, 죄와 인습에 매인 자들을 풀어주셨습니다. 멸시 받던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죄 짐을 지고 고생하는 인생들을 향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하시면서 천국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
이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의 장벽이 가로막혀서 감히 하나님께 나갈 수 없었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기상천외한 일이 일어나야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입니다.

성경은 구약시대에 살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보지 못했으나 멀리서 바라보며 기뻐했다고 증거합니다. 이처럼 구약의 신실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비교해 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의심 없이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성도들에 비하여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혹시, 교회는 다니지만 아직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혹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이유를 자신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그런 사람은 성경을 더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하고 그 분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비기독교인 가운데도 성경을 애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훌륭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찾아냅니다. 또는 성경에 나오는 탁월한 문학적인 표현에 감탄합니다. 또는 히브리 민족과 고대 근동의 역사를 연구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영생의 진리에 관해서는 캄캄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왜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는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처음 교회에 나올 때는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과 같이 믿는 친구가 좋아서 교회에 따라 나오기도 합니다. 또는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도 있고, 축복을 받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을 존경한 나머지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예수님께로 나온 것은 잘 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점점 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적으로 올바로 알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육신의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의 양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곧 영생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떡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장차 최후의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계시록 20장 11절 이하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각 사람이 최후의 심판대에 서서 두 가지 책에 의해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는 생명책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를 기록한 책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고 이름이 없는 사람은 영원한 불못에 던짐 받습니다. 행위록은 생전에 우리 각자의 행실을 기록한 것인데 그 책에 기록한 대로 상벌을 받을 것입니다. 생전에 선을 행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을 행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없으면 불못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다른 조건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믿지 아니했느냐에 따라서 영생과 영벌이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 사실처럼 위대하고 복 된 일은 달리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이 사실을 잘 말해 주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제 ‘예수 믿는 이유’에 대하여 누구 앞에서나 분명하게 대답하실 수 있게 되셨을 것입니다. 주 예수 강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믿는 이유를  불신 이웃에게 부지런히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양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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