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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도주일] 신앙이 우리에게 주는 것들 (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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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저희 교회에서 온 가족 훼스티벌이라는 이름으로 전도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는 처음으로 저희 교회에 오신 분들이 계신 줄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처음 오신 것 뿐 만 아니라, 아예 교회라고는 처음 오신 분들도 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 저희들의 초청을 받아들여 저희 교회에 처음 나오신 여러분들을 주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경영하시고 바라시는 모든 일 들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들이 여러분들을 저희 교회로 초청을 한 것은 저희 교회 구경 한번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아실 것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저희들과 같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먼저 믿는다고 하는 저희들이 예수를 잘 믿어서 구태여 이런 저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저희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생기게 해 드렸어야 하는데, 저희들이 부족하여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너무 죄송스럽고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오늘 이 시간 그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쉽게 말씀드리자면, 예수는 왜 믿어야 하는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인가?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하여 부족하지만 열심히 설명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어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고 건강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면이 있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우리 기독교 신앙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은 그 수준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것만이 전부이고, 그것이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귀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와 같이 귀한 것들을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셨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세상에서의 우환이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우환은 물론이고 병도 걸리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꼭 다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안 믿는다고 꼭 다 가난해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세상적으로 형통해지고, 안 믿는다고 세상적으로 다 어려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조금의 차이는 혹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말씀드려서 그와 같은 것들은 예수 안 믿어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를 믿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되고, 건강해 지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귀한 것들입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생명’은 그 저 이 세상에서 죽지 않고 건강하고 부자로 형통하게 사는 생명과는 좀 다른 차원의 생명입니다. 오늘 그 생명에 대하여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992년 올림픽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선배 목사님이 한국에 나오셨다가 저와 함께 식사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선배님이 숙소에서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한국의 아이들이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를 들을 신고 다니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라는 뉴스를 보시게 된 모양입니다. 지금도 10만 원은 만만치 않은 액수입니다만, 92년도에 10만 원짜리 운동화는 정말 비싼 것이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그런 운동화를 신는다는 것은 고사하고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학교에 다니고 있던 제 아이들에게 ‘세상에 10만 원짜리 운동화가 다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표 농구화가 10만 원이 넘는다고 아이들이 대답해 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아이들에게 ‘너희 학교에도 그런 운동화 신고 다니는 놈 있냐?’고 물었습니다. 아이들은 저에게 ‘우리만 빼놓고는 다 신어요.’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왜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아이들의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명료했습니다. ‘사달라고 해봤자 안 사주실 건데요 뭐.......’

아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 운동화 사 달라고 조르지 않아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맙다는 편지를 쓰면서 아이들에게 ‘왜 그런 운동화를 신으면 안 되는가?’에 대하여 나름대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쓸 데 없다’

그때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였을 때였습니다. 황영조 선수가 어느 회사 소속이었었는데 그 회사에서 황영조 선수를 위하여 1억 원이나 들여 황영조 선수의 발에 맞고 편한 운동화를 만들어 주었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그 황영조 선수의 1억 원 짜리 운동화에 대하여 이런 저런 말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황영조 선수의 운동화를 이야기하며 저는 황영조 선수의 1억 원 짜리 운동화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쓸 데 있다’

황영조 선수는 세계적인 마라토너입니다. 그에게 발에 잘 맞는 운동화는 메달의 색깔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달려 있는 것으로 1억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투자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얼마짜리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옳지도 않고 설득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하면 1억 원 짜리 운동화도 신을 수 있고, 필요가 없다고 10만 원 짜리도 안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 편지를 쓰면서 편지 중에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이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냐?’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너희들이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는 단 하나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면 단지 그것을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냐?’

그리고 아이들에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라고, 얼마나 자랑 할 것이 없으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고 신발을 자랑하겠느냐고, 자기 자신이 10만 원 짜리가 안 되니 10만 원 짜리 운동화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신발 자랑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당시 15살, 13살, 11살이었습니다. 그 편지 때문이라고 저는 확신하는데 신발 타령 별로 하지 않고 쉽게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소유에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많이 소유하면 잘 사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못 사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삽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소유가 적은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못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그리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소유가치에 있지 아니하고, 존재가치에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가 되느냐에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달려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과 실패가 달려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부자라고 하여도 존재가치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졸부라고 부릅니다. 저들은 부자일 뿐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때문에 자세히 저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성공과 행복은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너무 가난하고 너무 병들어 몸이 약해지면 사는 게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상에서 아마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아직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자가 되어가고 있는 나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세계에 불과 3-40년 만에 이렇게 경제적인 성장을 이룬 나라가 그 다지 많지 않습니다. 예전에 우린 참 가난했었습니다. 여러분 학교에서 일년 한 번 씩 조사하던 ‘생활환경 조사서’라는 거 생각나십니까?

집에 라디오 있냐? 전화 있냐? 냉장고 있냐? 텔레비전 있냐? 피아노 있냐? 그런 것들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우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집에 전화 있으면 우선 부자였습니다. 텔레비전은 동네에 몇 대 있었습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있다는 것은 그 집이 큰 부자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가용은 재벌이나 타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는 다 큰 부자입니다. 큰 부자를 넘어서 거의 재벌 수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그때보다 분명히 더 행복하십니까? 그때는 여러분, 하도 못 먹고 살아서 배 나온 사람이 부자고 사장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는 중요하지만 우리의 생각처럼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없으면 힘들고 어렵지만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유가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가치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치 있게 될 때 그것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존재가치가 높아져 나라고 하는 존재가 가치 있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삶의 만족을 느끼게 되고 넘치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존재가치가 바로 예수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유가치는 높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는 절대로 존재가치가 높아질 수는 없습니다.

존재가치는 존재목적으로부터만 오고,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 자체로부터 오지 아니하고 그것을 존재케 한 분으로부터 만 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가 사용하고 있는 이 마이크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이크의 가치는 마이크의 존재 목적에서부터 옵니다.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작은 목소리를 크게 확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마이크는 그 목적대로 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때가옵니다. 고장이 나서 고칠 수 없는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 이 마이크는 존재가치가 없어지게 되고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되고 말 것입니다. 존재의 가치는 존재의 목적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므로 행복한 그리고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존재의 가치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존재의 목적은 존재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결정합니다. 마이크의 존재 목적은 마이크가 만들지 아니하고 마이크를 만든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칙입니다. 존재가 스스로 존재의 목적을 결정하는 것은 세상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외의 모든 피조물은 존재의 목적을 존재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김동호의 행복과 성공은 소유에 있지 아니하고 존재에 있습니다. 제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저의 존재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혀내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제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목적은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부자도 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한다면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절대로 자신의 존재목적을 찾아 내지 못할 것이고 때문에 당연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목적 없이 태어나는 존재는 없습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컨베이어 벨트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그런 물건이 아닙니다. 아무런 목적과 기대 없이 우연히 태어나는 그런 존재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단순한 피조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우리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우리 부모의 온 기대는 자식에게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를 충족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투자를 자식에게 합니다. 하나님이 꼭 그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하나 하나에게 기대하시고 그 기대를 이룰 수 있는 각양 좋은 은사를 주십니다.

제 짧은 경험에 의하면 그 은사대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또 성공의 확률이 높습니다. 저는 어려부터 교회가 좋았습니다.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를 직업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잘 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이 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목사도 자가용을 타고, 직업적으로도 세상에 뒤지지 않는 직업이 되었지만 제가 신학교에 갈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택할 수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택했습니다. 저의 선택을 아주 탁월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정확히 선택한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저보다 부요한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제 삶에 만족하고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 자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어 버리면 나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평생을 나그네처럼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압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압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압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압니다.

학생 때 마이웨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마라톤 선수인 주인공이 넘어져도 또 일어서고 넘어져도 또 일어서며 끝까지 목표를 향하여 달리는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보며 이렇게 마음으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것이 인생이다.’ ‘인생은 경주할 때 아름답다.’

신앙은 우리에게 달려갈 길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답게 사는 법(진리)을 가르쳐 줍니다. 저는 그것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미디 중에 출산드라라는 코미디가 있습니다. 뚱뚱한 여자 게그우먼이 나와 뚱뚱교 교주라며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래의 가사가 아주 웃깁니다. ‘먹다 지쳐 잠이 들면 축복이 있으라’

지금 우리에게 그 노래는 코미디입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그것은 코미디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코미디가 아니라 말 그대로 축복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북한에서는 이 노래가 코미디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저들의 가장 큰 소원이고 꿈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국민소득 만 불을 조금 넘었을 뿐인데 먹다 지쳐 잠이 드는 것은 이미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와 같은 삶엔 아무 의미도 생명도 없습니다. 참 생명의 의미는 그냥 먹다 지쳐 잠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 없이도 얼마든지 먹다 지쳐 잠이 드는 정도의 축복은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예수 없이는 절대로 경주할 수 없습니다. 달릴 푯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푯대 없이, 목적 없이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나그네처럼 방황하는 삶에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없습니다.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맞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으로는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없고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른 세상이 있습니다. 다른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하고,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 생명에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있습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 풍성함 삶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 구원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세상 명예와 지위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 분의 길과 그 분의 식대로 살아 오늘 성경이 약속해 주신 참 생명의 축복을 받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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