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굽고 삶고 간수하라(출 16:22~24, 눅 11:27~28)

  • 잡초 잡초
  • 431
  • 0

첨부 1


인도는 여행하기 힘든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공기도 좋지 않고, 냄새도 좋지 않고, 길도 좋지 않고, 비행기 시간도 좋지 않습니다. 델리는 제가 경험하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소음과 먼지가 많은 나라입니다. 아예 ‘경적을 울리시오’. ‘Please horn’, ‘Blow horn’이라고 차에 쓰고 다닙니다. 여행이 힘든 나라이기 때문에 선교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윌리엄 캐리, 스탠리 존스 그리고 최근의 테레사 수녀 등이 인도에 복음을 심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만큼 인도는 선교사적으로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번에도 가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세계선교회 팀은 의료, 이미용, 풍선 아트, 페이스 페인팅 팀들이 5회에 걸쳐서 아주 어려운 지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든 곳인지 화장실도, 목욕시설도 없어서 고생하였고, 펀잡 지역에 갔을 때는 방과 마당 사이에 커튼만 있는 방에서 침낭 속에서 내복 입고 양말 신고 잠을 잤습니다. 방 안에 닭이 들어와 닭똥을 싸기도 하고 길에는 쇠똥과 하수들이 함께 질퍽이고 있습니다. 과일 껍질이나 쓰레기도 차 안에서 창밖으로 자연스럽게 아무나 버립니다. 우리도 며칠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버렸겠습니까? 그걸 못하겠더라고요. 교육이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번에 특별히 펀잡에서 선다싱 기념교회의 기공예배를 드렸는데 저희들이 함께 참석하고 제가 기공예배에 설교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청년들도 굉장히 고생하면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지역 전도와 특히 대학교에 가서 복음 전파하며 지역 교회들을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여럿이 배탈이 나고 고생도 하였지만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 감사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 있는 청년 사역 팀들도 고생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고생만큼 많은 경험과 열매를 얻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인도와 중국에 뿌려놓은 작은 씨앗들이 많은 복음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도 요리를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리란 같은 재료를 가지고 하지만 나라마다 집집마다 손끝마다 맛이 다릅니다. 같은 재료이지만 인도음식은 커리를 사용합니다. 닭고기 요리지만 인도요리는 커리로 닭을 요리합니다. 한국은 닭도리탕을 합니다. 같은 재료이지만 음식의 맛이 다 다른 것은 참 재미있는 결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요리가 발달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중국은 못 먹는 게 없는 나라입니다. 기어 다니는 것이나, 날아다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것이나, 식물이나 무엇이든 중국인은 다 먹습니다. 최근에 가장 요리가 뜨는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지금 세계는 한국 요리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는 세계적 식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한류의 영향으로 비빔밥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 음식인 김치, 된장, 마늘 등이 새로운 세기에 세계적 요리로 부각될 것입니다. 발효음식의 맛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맛입니다. 최근에 와서 묵은지가 다시 유행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요리는 철저하게 요리사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합니다.

  가장 다양한 요리는 말씀의 요리입니다. 가장 다양한 맛은 말씀의 맛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이 먼저 있은 줄 알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물밑에 말씀 이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 밑에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광야 밑에 심판의 말씀이 있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것은 하나님 말씀이 내리심을 말합니다. 모든 것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갖가지 요리가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배푸신 예수님은 완전히 배부르게 먹게 하신 다음에 맥 빠지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31에는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8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십니다. 49절에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고 하시고, 50절에는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적의 주 목적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만나라는 것입니다. 옛 만나는 먹어도 죽었지만 새로운 만나는 먹으면 사는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 같은 법궤 안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두 돌비가 들어 있었습니다. 만나는 선민을 보호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제사직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두 돌비는 지성소의 중심이며 이스라엘 신앙의 직접적 초점을 의미합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이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입맛대로 먹게 하십니다.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재료는 주시되 요리는 우리의 몫입니다. 재료를 가지고 우리가 요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말씀으로 먹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그의 책에서 독서의 본질적 방법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해석하는 것이고, 셋째는 평가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영적 방법을 잘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굽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가장 쉽게 하시려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유를 못 알아들으면 비유는 가장 어려운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13:13에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하십니다. 51절에는 “이 모든 것을 깨닫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성경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고 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내가 간다”고 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중국의 노신(魯迅)의 말입니다. “명망 있는 학자와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말을 할 때 군데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척해야 한다. 너무 모르면 업신여기게 되고 너무 잘 알면 미워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알아도 미워하지 않고, 다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다 알아 들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24:45에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이 이해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시편 119:130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나이다”고 합니다. 말씀을 열면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은 깨닫게 하고 이해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라. 이해하면 연금술사가 된다”고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면 말씀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말씀을 마음껏 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삶는 것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다음에 그 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의 뜻을 해석해 주십니다. 기적의 뜻을 해석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우리는 못 고쳤나요?”라고 합니다. 종말 현상을 말씀했을 때에 “언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하실 때마다 말씀을 해석해 주십니다. 말씀을 들은 다음에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해석은 잘못하면 말씀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클린턴과 일본 수상 모리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서가 모리 수상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클린턴에게 ‘How are you?’ 하면 ‘I am fine and you?’ 할 것입니다. 그러면 ‘Me too’하십시오”. 그런데 모리가 클린턴을 만나 “How are you?” 한다는 게 “Who are you?” 그랬습니다. 클린턴이 “I am Hillary's husband”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리 수상이 “Me too”라 그랬답니다. 말을 이해 못하면 이렇게 엉뚱한 결과가 옵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은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잘 해석해 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교회에 강독자(Rector)라는 직분이 있어서 말씀을 읽고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전에는 강도사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없지만 아직도 여러 교단이 강도사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대로 하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잘 해석해야 하는데 누가 잘 해석할 수 있습니까? 신령한 지혜를 가진 자가 잘 할 수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하고, 이성적이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지혜를 가진 자가 성령의 지시를 받는 자가 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말씀을 해석하는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해석’이라는 성경의 단어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니엘과 요셉입니다. 이 두 사람은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해석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해석은 진령한 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회의 역사에 토르케마다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5세기에 살았던 스페인의 도미니쿠스 교단의 사제입니다. 이 사람은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오래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제는 카톨릭 군주의 비호 하에 엄청난 종교적 횡포를 일삼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좁은 성경해석에 불복하는 사람은 핍박하고 고문하였습니다. 얼마나 그 악명이 높았든지 그의 이름은 종교재판소의 공포, 종교적 편협함, 잔인한 광기 등의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해석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2천명을 화형시켰습니다. 1만6천명의 유대인을 스페인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잘못된 성경해석은 이런 어마어마한 횡포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느헤미야 8:8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말씀의 힘입니다. 말씀은 바르게 해석되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말씀이 해석은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물론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는 유물론의 명제는 사실은 ‘올바른 해석에 근거한 세계 변혁’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방한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해석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셋째, 간수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간수하고 내 것으로 간직하는 것은 최종의 단계입니다. 왜 말씀을 이해하고, 왜 말씀을 해석합니까? 내 것으로 간수하려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간수하는 것은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묵상하면 간수됩니다.

  시편 1:2에는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영혼이 평안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에서 떠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악에서 떠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가 ‘말씀’인 것은 아시지요? 말씀이 주제인 시편 119편에는 묵상에 관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는 “주의 법도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27절에는 “주의 기사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23절과 48절에는 “주의 율례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78절에는 “주의 법도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97절에는 “주의 법을 종일 묵상”한다고 합니다. 99절에는 “주의 증거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말씀’이 주제인 장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말은 ‘묵상’입니다.

  말씀은 묵상되어질 때에 참 말씀입니다. 말씀의 힘은 묵상에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내 것이 됩니다. 말씀은 내 것으로 잘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일시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말씀을 잘 간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품으라는 말은 말씀을 두고 다니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을 품으면 분을 전합니다. 사랑을 품으면 사랑을 전합니다. 말씀을 품으면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을 품느냐 하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면 앙심을 품고 있다가 사고를 저지른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앙심을 품으면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스토킹 하다가 일을 저지르고 잡힙니다. 이메일로 악성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비난하기 위한 나쁜 의도에서 악성 리플을 다는 것을 ‘악플’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범죄가 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항상 좋은 것을 품고 다녀야 좋은 것이 나옵니다. 말씀을 품고 말씀이 몸에 배어 있기를 바랍니다.

  나폴레옹 힐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품고 신념을 가진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잘 품고 살면 그 말씀이 현실이 되어 말씀처럼 살고, 말씀처럼 은혜 받고, 말씀처럼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잘 간수하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 번 주십니다. 다니엘 8:26에는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환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고 합니다. 12:4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을 잘 간직하라고 하신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에는 “내 아들아 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말씀은 잘 간직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7에는 어떤 여인에 예수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28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몇 대 째 예수를 믿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잘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 연수, 직분, 관계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결론

  미국 어느 대학에서 종교철학을 강의하였습니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 여러 주 동안 안셀무스의 종교론, 칸트의 유신논증 비판, 아퀴나스의 우주론를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기간이 되었는데 교수가 시험을 연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어느 학생이 “하나님은 정말 있구나”하고 소리쳤답니다. 말의 해석은 중요합니다. 시험이 연기된 것을 가지고 그렇게 좋아할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 살아계십니다.

  요한계시록 2:17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승리하는 마지막 날에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통해 신령한 만나를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신령한 만나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불리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말씀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늘 묵상하는 신령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