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교인 (딤전 4:10)

  • 잡초 잡초
  • 391
  • 0

첨부 1


1948년 루마니아의 한 목사가 공산당에 의해 투옥되어 16년 동안이나 이곳저곳을 끌려 다니면서 매를 맞고, 마취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악랄한 세뇌도 받았지만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수년간의 투옥 생활 후에 그는 거의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한번은 죄수들에게 가족의 방문을 요청하는 엽서를 쓸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세수와 면도를 하고 깨끗한 내의를 받았을 때 죄수들은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그 역시 면회실에서 몇 시간을 기다렸으나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의 엽서가 집에 도착되지 않았던 것을 그는 알 리가 없었습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큰 스피커에서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무도 이제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또 “그들은 더 이상 네게 관심이 없다!”라는 소리가 울려나왔습니다. 감방으로 돌아왔을 때 대형 스피커에서 “기독교는 죽었다... 기독교는 죽었다”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온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감옥생활이 그렇게 길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은 그곳에 홀로 있을 때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계십니다.

강인한 전쟁 영웅인 월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재물도, 위안도, 소망도 사라지나, 사랑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예화 뱅크-하나님은 늘 우리 곁에 있다)

  복음 때문에 현재 고통 받고 있는 신자들은 그들의 양심 가운데 하나님과 더불어 누리는 교제가 있고, 장차 즐겁고 복된 날을 소망하기 때문에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수고하고'(코피오멘)는 '힘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다'의 뜻을 가지며 '진력하는'(아고니조메다)이란 운동 경기에서 이기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싸울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수고와 고생을 참아냈던 것처럼 어떠한 어려움과 박해도 이기도록 인내하라는 권고를 합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삶뿐만 아니라 장차 영원한 삶을 확실히 보장하는 하나님의 약속 믿고 현재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다. 하나님과 진리를 위하여 힘을 다한 수고가 썩어져 없어질 이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결코 흔들림이 없이 맡은 책임을 위하여 수고하고 진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섭리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교인

(행 14:15)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이라

  생명이 없는 형상들을 숭배하나 그 형상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숭배할 것을 권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그 윗말 "헛된 일"(헛된 것이란 뜻인데 우상을 의미함)과 정반대로 확실히 계시고 모든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로서 창조된 만물을 보라고 합니다(롬 1:19-20). 하나님이 확실히 계신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시14:1, 53:1).

  어거스틴이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고 악한 삶을 살고 있었을 때, 그 어머니 모니카는 항상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아들에게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라는 권고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도저히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만 있다면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을 정말 믿고 싶었지만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방탕한 삶에도 진력이나 곤고해진 어거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신다면 믿을 수 있도록 보여 주십시오. 나도 믿고는 싶지만, 이해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이 진절머리 나는 삶에서, 주님께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던 어느 날 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파도가 철썩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 위로 그의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데, 한 소녀가 홀로 앉아 모래구덩이를 파 놓고는 하얀 조가비로 바닷물을 떠 담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얘야, 거기서 혼자 뭘 하고 있니?" "예, 아저씨, 바닷물을 이 모래구덩이에 퍼 담고 있는 거예요." "원, 바닷물을? 그래 그 바닷물을 얼마나 퍼 담으려고?" "저 바닷물을 다 이 모래 구덩이에 퍼 담을 거예요." "얘야, 바다가 안 보이니? 바다가 얼마나 넓고, 바닷물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은 조가비로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다 퍼 담을 수 있겠니?" "그렇지만, 계속 퍼서 담다가 보면 언젠가는 바닷물이 다 마를 것 아니예요?" "얘야, 그렇지 않단다. 저 큰 바다를 그 작은 모래구덩이에 담기란 불가능하단다. 네가 종일 퍼 담았어도 바닷물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잖니?" "그렇지만 아침부터 계속 물을 떠서 담았으니까 조금은 줄어들었을 것 아니예요?" "아니란다. 네가 퍼 담는 바닷물보다 강에서 바다로 흘러들어 오는 물이 훨씬 더 많은 걸. 또 네가 모래구덩이에 바닷물을 떠 담아도 바닷물은 모래 속으로 스며들고 말지 않니? 해가 저무는데 빨리 집으로 돌아가려 무나, 부모님이 걱정하신단다." 그 때 그 소녀가 어거스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아저씨! 저 바다보다 큰 하나님의 세계를, 조개껍데기보다 작은 아저씨의 생각으로, 모래구덩이 만한 아저씨의 머릿속에 담는 일이 훨씬 더 어렵지 않을까요? 아저씨의 인생이 저물고 있어요. 아저씨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어요." 그는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이 예사롭지 않은 꿈을 통해 자기의 보잘것없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였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방편으로든지 택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탕자 인생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고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을 소망하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역사 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교인.

(히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그리스도의 구속은 성령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흠없는 자기를 드린 그리스도의 희생은 구속의 완전함과 자발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완전한 순종의 성취를 나타냅니다. 그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은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된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하나님과의 진정한 친교를 가지려고 할 때 요구되는 것은 내적이며 영적인 정결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이 깨끗함을 받아야 할 “죽은 행실”은 내적이며 영적인 더러움을 전염시키는 것입니다. 그 더러움은 그리스도의 행위로 말미암아  제거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내적인 속박에서 해방되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습니다.  새 언약을 통해서 양심이 깨끗해진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하에서 불완전한 속죄로 인하여 제대로 섬길 수 없었던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섬기게 하십니다.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셨던 사랑과 동일한 깊은사랑을 이방인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자리를 역사의 주변에서 역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을 구원하신 그 사랑으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고백하는 은혜 밖의 사람들을 오늘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섬기게 합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성도는 하나님의 도장이요 편지로, 불신자에게는 산 성경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고, 베드로를 본 자는 천국 소망을, 바울을 본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성도의 손과 발과 말과 행위를 보고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섬기게 합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하나님의 집이라고 할 때 일차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언약의 백성을 가리킵니다(민12:7; 호 8: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모두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집이요,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다운 전입니다(고전 6:16).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시되는 '진리'의 확실성과 견고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11시에 포도원에 들어와 충성으로 섬긴 포도원 일군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했던 사울이 다메섹 회심의역사로 순교적 자세로 선교했던 역사가 나나타나냐 합니다

주인을 떠난 종이 바울 사도를 만나 그리스도를 알고 무익 핬던 인생이 유익한 인생으로 변화되어 섬기는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섬김은 다양 합니다.  옛날에 일곱 형제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일곱 형제들 가운데 여섯 명은 일하러 밖에 나가고 막내인 일곱째만이 집안을 돌보았습니다. 여섯 형제들이 피곤한 몸으로 일터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집안을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며 식사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최상의 상태였습니다. 형제들은 매우 기뻐하며 일곱째 동생을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보다 이기적인 넷째형은 일곱 번째 동생을 게으름뱅이라고 부르면서 동생도 역시 일터에 나가 자기가 먹을 빵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형제들을 동요시켰습니다. 그래서 이제 모든 형제들은 일곱 번째 동생이 지금까지의 집안 일을 그만두고 모든 형제들과 똑같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형제들은 막내 동생을 일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일곱 형제들은 녹초가 되어 피곤한 몸으로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불이 꺼진 캄캄한 짐만이 그들을 맞이할 뿐 따뜻하게 빛나던 밝은 불빛도 없었으며 집안을 깨끗이 청소하는 사람도 없었고 저녁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또 문 앞에 서서 진심 어린 말로 맞이해 주는 형제도 없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그들은 막내 동생으로 하여금 집안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던가에 대해 깨달았습니다. 더구나 모든 잘못된 결과가 그들 자신들의 책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누구에게도 불평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후회하면서 막내 동생에게 다시 집안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일곱 형제들의 잃어버렸던 행복이 기쁨과 함께 그들에게 되돌아 왔습니다. 그 후 그들은 서로서로 단결하여 사이좋게 살았습니다.

  섬김의 평가는 나타납니다. 밀턴이 그의 청년기 시절 6년 가량을 중서부의 한 작은 도시에서 보냈었는데, 거기서 그는 정신 지체를 갖고 있는 마이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 시기는 마이런에게 있어 무척이나도 우울해 보이는 시기였고 집 이외에는 갈 곳이 없었던 것 같다. 그는 거기서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고 도시 근교에서 할 수 있는 특이한 일을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식물을 키우는 재능이 유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일하는 곳은 아주 잘 알려져 있었다. 잔디 깎기, 우거진 관목, 그리고 울타리를 치는 것과 꽃을 키우는 일 등은 세심한 주의와 기술 그리고 사랑이 필요한 것들이다. 마이런은 그런 일들을 자원해서 했다.  그는 과부나 스스로 일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잔디를 깎고 잎사귀를 긁어내며, 꽃들을 심곤 했는데 그가 아니었더라면 그곳은 아무도 찾지 않을 그러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기름 통"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는 항상 그의 뒷 주머니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조그마한 기름통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다가 삐걱거리는 문이나 돌쩌귀, 그리고 대문 같은 곳이 있으면 마이런의 기름통을 "공짜"로 발라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일에는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가기 때문에 그는 아무 곳도 가지 않았다. 그래서 꼬마 아이들은 그를 놀려대곤 하였다. 하지만 그는 아주 낙천적이며 유머기질이 뛰어났고 아주 침착했기 때문에 아무도 마이런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이런은 밀턴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곳을 떠난 지 몇 년 후에 죽고 말았다. 시간을 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밀턴은 그의 장례식을 보러 갔다. 그는 자기가 보았던 것에 대해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하지 않았다. 그 도시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나 장례식에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으므로 그 장례식에는 다른 사람의 배나 되는 인원이 참석했다. 왜냐하면 밀턴처럼 아주 먼 거리에서 그 곳에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마이런은 그 작은 도시에서 정말로 중요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아니, 그는 유명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존경을 받지도 않았다. 로빈 리치는 그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노동자였고 낙관론주의자였으며 "긴장을 풀어주는 사람이었고"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다. 또한 자신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섬김의 정신덕분에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이 되었다.

재능대로 섬기는 자에게 바른 평가를 하심을 알고 하나님 섬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모두가 됩시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교인

(히 12:22-24)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은 동의어이며 하나를 가리키는 다양한 표현입니다. 시온 산은 예루살렘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불렸으며 이스라엘 지파들이 만나던 장소였고 영광스러운 하늘 도성의 기초로 불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온 산이라 불린 '하나님의 도성'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은유로서 새 언약 하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미래에 완전히 소유할 나라임과 동시에 이미 소유하고 있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입니다.

새 언약에 의해 성도들이 이미 다다른 곳임과 동시에 후에 이를 곳은 하나님의 산인 시온 산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로 경찰서에 끌려갔었다가 1930년 7월에 나온 후 평양 산정현 교회 주일예배 때 5종의 나의기도 라는 설교 중에 하나가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라는 내용으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 길 수 있으나 오래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 면할 수 없는 형벌이라면 할 수 없이 당하지만 한걸음만 양보하면 그 무서운 고통을 면하게 해주고 도리어 상 준다는데 많은 사람들이 넘어갑니다. 말 한마디만 타협하면 살려준다는 말에 용감한 신자도 넘어가게 됩니다. 하물며 나 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내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직면하사 그 받으실 고난을 인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시고 십자가상에서 그 혹독한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수년간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영원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 영화의 몸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신실한 삶 그것이 바로 그 거대한 영광의 준비과정임을 기억하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불러서 몸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모두가 됩시다. (강성찬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