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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부흥을 열망하라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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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말과 연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요나서를 통해서 새로운 각성과 도전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에게 허락하셨던 말씀들은 때로는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때로는 우리에게 크나큰 희망과 용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부터 로마서를 통해 주시는 교회와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맛보기를 원합니다. 로마서는 바울사도께서 세 번째 전도여행을 하던 중 고린도에 머물때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 특별히 핍박과 고난 중에서도 성도의 신앙을 지키고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AD 57년경에 기록한 말씀입니다.

새해 우리 교회의 표어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입니다. 우리 자신이 새 부대가 되기를 간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교회적으로도 새 부대가 되기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로마서는 놀라운 도전과 희망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는 냉랭한 심령에게 성령의 불을 지펴서 죽은 심령을 살리는 말씀이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죽은 심령을 살리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죄의 심각성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낭떠러지에 직면해 있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알려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얼마 전 맞벌이 부부의 집에서 아이들끼리 놀다가 화재로 인해서 3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소방서의 녹음테이프를 들어보면, 7살 짜리 어린아이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집에 불이 났어요. 우리 애들 밖에 없어요. 빨리 와 주세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출동한 소방관들은 불을 끄면서도 안에 아이들이 있는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안에 있는 줄 알았다면 좀더 강력하게 화재진압을 했을 터인데 말입니다.

으리는 이제 다시 말씀으로 돌아야합니다. 이 땅에 죽어가는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는 분명한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영이 죽어가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로마서를 통하여 우리가 죄 가운데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으며, 나아가서 그 죄에 크게 오염되어 있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장에 나오는 야채들을 보면 오래토록 싱싱해 보이라고 농약을 많이 뿌리고, 심지어는 색칠까지 한다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고추나 오이는 더욱 농약을 많이 뿌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추를 먹는 사람들은 안 먹을 수 없으니까 여러번 씻지만, 사실은 고추의 뾰족한 부분은 농약이 아주 농축되어 있는 부분이라고 농사에 밝은 어느 장로님께서 주의를 요하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채소들이 농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우리의 건강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조심해야 할 것은 다음 세대입니다. 농약이나 중금속에 오염된 환경에서 자란 다음세대는 정말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조금씩 생명에 대한 도전이 다가오지만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중독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로마서는 죽어가는 심령을 살리기 위해서 선포된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죽이는 결정적인 부분은 죄입니다. 이 죄 때문에 크게 쓰일만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들도 평신도들도 죄로 인해서 정말 아까운 인물들이 망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죽입니다. 죄는 기도의 사람을 죽입니다. 죄는 전도의 사람도 죽입니다. 죄는 충성스러운 사람도 죽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라는 여성을 취하기 위해서 죄를 짓고 나니까 결국 자신과 국가에 가장 충성스러웠던 우리아 장군까지 죽이게 된 것입니다.

중세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마틴 루터를 사용하셔서 부패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심령들과 교회를 살리시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마틴 루터가 중세교회를 살리는 불쏘시개로 삼았던 말씀이 바로 로마서 인줄로 믿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도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마틴 루터가 벌떡 일어났지요. 어떤 인간의 형식과 어떤 교회의 전통에 의해서도 인간이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지 아니하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95개 조항을 그가 가르티던 대학 정문에 붙여놓고 종교개혁의 깃발을 내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환영했습니까?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새로워지려고 하면 사람들이 반가워하기 보다는 힘들어합니다. 텔레비전 광고 카피중에 하나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주는 문구가 있습니다. "앞서 간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과 동시에 시기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 지려고 하면 이상하게 도전이 많아 집니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않고 죽어 있으면 우리 주변은 우리에게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 한번 해 보려고 하면, 전도 한 번 해보려고 하면, 세상은 극렬하게 우리를 향해 공격하기 시작하지요.

1738년 영국에서 요한 웨슬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뜨겁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무지와 부패와 질병으로 완전히 3류 국가고 전락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요한 웨슬리의 마음을 통해서 한 작은 집회를 통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 그 한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국을 살리고, 세계를 살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세계는 나의 교구라. 한 사람의 변화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물꼬를 트게 된 줄로 믿습니다. 죽은 심령을 살리는 말씀이 로마서입니다. 이 로마서가 영국을 살렸고, 독일을 살렸고, 한국을 살리고, 우리 평안의교회를 살리고, 바로 우리 자신을 살리는 말씀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는 묵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말씀입니다. 요즘 식당에 가면 오래된 김치를 내 놓는 식당이 있어요. 묵은지라고 그래서 묵은지가 맛이 있다고, 묵은지를 삼겹살 싸 먹으면 맛이 있다고 그래서 내 놓는 식당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어떤 부분의 문제가 있습니까?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래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사람의 삶을 이렇게 보아도 나이가 인생의 절반 정도 지나가면 약 40대 이후로 넘어가면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틀이 자기도 모르게 잡힙니다. 걸어가는 폼도 틀이 잡히고, 말하는 폼도 틀이 잡히고, 모든 사람들의 대화는 스타일이 틀이 잡힙니다. 그런데 내적으로도 틀이 잡힙니다. 고집도 생기고, 좋게 말하면 자기 주관과 철학도 생기고, 나이가 중년이 넘어간 사람은 무얼 가르치고 고치는 일이 너무 어려워요.

언젠가 우리가 저 천안지역에 수련회를 갔을 때 위장병으로 한국인들이 많이 고생을 하는데, 그 건강을 위해서 전국을 다니면서 세미나를 하는 그 장로님, 그 농원의 장로님이 저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저 몇인데요.’ ‘그러면 목사님도 어렵겠네요.’ 그래서 ‘왜요?’ 하고 물었더니, 제가 농원의 수십만의 어린이와 어른들이 수련회를 오는데요. 제가 전국의 세미나도 가지만, 우리 농원에 오는 사람들도 세미나를 하는데, 제가 몇 회를 해 보면서 제가 한 가지 포기한 게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고 물었더니 사십이 넘으면 교육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식사 할 때 주로 식사하기 전에 물 한 컵 마시지요. 또 한국인들은 대개 밥에다가 국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국그릇에 한 그릇 다 퍼 담아 마시지요. 김치도 물김치가 있고, 찌개가 있고, 이것저것 국물 있는 것이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한국인은 식사하면 식사의 부피가 굉장히 많아집니다. 외국인들은 그냥 샌드위치 하나에 커피한 잔이면 끝나는데,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 수분의 섭취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이 위가 너무 부담이 됩니다. 그리고 식사 끝나면 숭늉 아니면, 물,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 마셔서 좋다고 마무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 소위 위는 물탕이 되어 버린다는 거예요. 윗 속은 음식물과 물로 그냥 물탕이 되어 버린다는 겁니다. 우리 안 봐서 그렇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묽을수록 위산이 나와서 소화 시키는데 애로사항이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식생활이 그러다 보니까 점점 위가 장애를 일으키고, 병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그 분은 식사할 때 가능하면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 식사하기 전에 반 컵 정도, 입만 축이고서 식사하고, 식사하고 반 컵 정도만 입만 축이고 활동하는 그런 식사를 하는데, 그 농원 식사 끝나면 마시는 음료수대 앞에 팻말을 써 놓았어요.

40대 이후는 그냥 드세요. 나는 처음에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장로님은 불러다가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스토리를 이야기 하는데, 자기도 이제는 중년 이상은 포기했다는 거예요. 젊은 어린이들 학생들 대상으로 가르친다는 거예요. 우리 신앙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제일 변화되기 어려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새신자 아닙니다. 오래된 교인들입니다. 아까 우리 1부 예배 때 손 한 번 들어보자고 그랬는데, 손 한 번 들어보실까요?

10년 이상 된 성도들, 우리 평안의교회 건 관계없이 통틀어서 신앙생활 한지 10년 이상 된 분 손 한 번 들어보세요. 번쩍 들어보세요. 20년 이상 된 분들 손 한 번 들어보세요. 자랑스러운 분들입니다. 우리 박수 한 번 해 주세요. 이게 원래 오래된 분들 칭찬하는 분위기 였으면 손을 더 번쩍 들었을 텐데, 눈치를 보니까 묵은지 이야기 하는 거 보니까 오래 된 거 들으면 안 되겠다. 그런 눈치가 있지요? 그래도 귀한 거지요.

30년 이상 되신 분 한 번 손 들어보세요. 감사합니다. 50년 이상 되신 분, 저 밖에 없어요? 저 뒤에 권사님 계시군요. 저도 참 오래된 묵은지입니다. 50년 되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오래된 사람에게 있어서 문제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거예요. 저를 포함해서 제가 제일 오래된 묵은지네요. 50년짜리 묵은 교인이니까 오래된 교인들의 문제는 변화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래서 제 자신이 묵은지가 안 되기 위해서 새로운 책과 새로운 말씀과 새로운 도전의 자리에 끊임없이 제 생각이 녹슬지 않도록 제 마음이 녹슬지 않도록, 제 육신이 녹슬지 않도록 합니다.

제가 이렇게 둔해 보여도 하루에 훌라우프를 한 3000개씩 합니다. 훌라우프도 얇은 훌라우프가 아니고, 한 손으로 잡기도 어렵고 험한 훌라우프를 이용합니다. 그래야지 운동이 되기 때문이지요. 몸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묵은지가 안 되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어요. 요즘도 책상에도, 제 서재에도, 제 책상에 책을 다 벌려놓고, 이 자리에 앉으면 이 책을, 저 자리에 앉으면 저 책을 보면서 그 자투리 시간들을 더 보려고 하면서 새로운 책, 새로운 말씀들에게 제 생각이 젖어가도록 몸부림을 치고 있어요.

오래된 사람의 문제는 변화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냥 해요. 뭘 그냥 바꿔요. 그냥 그대로 합시다. 자꾸 그냥 옛날 거 그대로 가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오래 되다 보면 때가 생깁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 가시지요. 자주 가면 좋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열흘에 한 번 몸에 때가 생기잖아요. 그렇게 이태리타올로 비벼대도 또 때가 있어요. 이상하잖아요.

제가 목욕을 하면서 느끼는 거는 사람의 몸에서 가장 먼저 때가 붙는 부분을 발견했어요. 참 위대한 발견이예요. 거기가 어디면 발목 뒤꿈치 있는 부분, 복숭아뼈에서 발뒤꿈치 사이에 있는 그 뒷부분은 그렇게 때가 매일 저녁 발을 씻는데도 보면 거기는 이태리타올 없이도 손으로 밀어도 벅벅 빌려요. 거기는 이상하게 때가 잘 밀리구요.

요즘 제가 발견한게 있어요. 거기는 손으로 안 하고, 발로 해도 되요. 발로 그냥 비벼도 거기는 그냥 벗겨져요. 거기는 왜 때가 많이 생길까? 제일 먼저 생겨요. 제가 지난 11월달 5주동안 오른발 기브스를 했잖아요. 5주를 목욕을 못하고서 5주 만에 목욕을 하니까 목욕이 그렇게 좋은지 몰랐어요. 참 날아갈 듯 하게 놀랐어요.

근데 깜짝 놀란 것은 그 오른발에 때가 얼마나 많은지 더구나 그 뒤꿈치에는 거북이처럼 막 덩어리가 떨어져요. 그것은 이태리타올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요. 온탕에 갔다가 불려가지고 나왔다가 한 두 번 불려 가지고도 안 되요. 사우나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그렇게 한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요? 돌로 해야되요.

돌을 준비한 목욕탕이 있고요. 없는데가 있어요. 없는데도 요즘은 바닥이 대리석이기 때문에 반들반들하지 않고 거칠게 해 놓았지요. 그 거친 곳의 바닥에 발을 막 비비면 한참을 비비면 발등과 같이 고운 피부가 나옵니다.

그래야 핏줄도 보이고, 보들보들한 발등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발뒤꿈치가 나옵니다. 그렇게 우리가 묵은 곳을 닦기 위해서는 그런 수고가 필요해요. 푹 불려야 되고, 거친 부분에 비벼대서 그것을 닦아 주어야만 합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까 저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해병대 1사단 수색대대 병사들이 웃통을 다 벗고서 눈 위를 막 뒹굽디다. 현재 온도는 영하 10도를 가르키지만, 강원도에서 온도가 10도면 20도, 25도지요.

그런데 옷을 다 벗고서 눈에서 뒹구르면서 훈련을 받고 있어요. 그 침투할 때 고무보트를 가지고 막 빼앗기 훈련을 하고 있어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스키를 타고 내려 오면서 사격하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무적의 용사 해병대는 해병부대의 수색대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훈련을 끝나고 정장을 하면 각종 훈련을 받은 장식들이 화려하게 붙어 있고, 그리고 머리에는 녹색의 베레모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해병대는 바로 그 사람들이예요.

죄송하지만 일반 해병대는 해병대가 아니예요. 육군하고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수색대 안한 해병대는 너무 폼 잡고 다니지 마세요. 왜 우리가 그 사람들을 강하다고 그럽니까? 그만큼 훈련이 잘 받았다는 거예요. 남들은 추워서 벌벌 떨 때 그들은 영하 20도에 옷을 벗고서 눈에서 뒹굴면서 훈련하는 거예요.

요즘에 우리 주변에 보면 장로님들을 일찍 은퇴시키는 그런 풍조가 일고 있습니다. 우리 감리교 법에는 70세에 은퇴하게 되어 있고, 65세부터는 자원해서 원하면 은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65세에 자원이 아니라 외형적으로는 그런 형태를 취하는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거의 강제적으로 ‘그만하세요. 물러나십시오.’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는 61세에 장로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런 교회들의 행위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작년에 우리 오래된 장로님 한 분이 저를 찾아 오셔서 목사님, 제가 1-2년 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후배를 위해서 길도 터주고, 제가 지금 헌금도 제대로 못하고, 봉사도 제대로 못하고 그러는데 괜히 목사님 목회에 걸림돌만 되는 것 같아서 일찍 은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인사치례인 줄 알았는데, 정말 마음을 먹고 오셨더라구요. 저도 정색을 하고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70세까지 하세요. 70세까지도 억울한데, 장로님 보니까 전국을 다니면서 활동을 하시는데, 70도 억울한데, 왜 먼저 은퇴하십니까? 제가 못하는게 많아서...괜찮아요. 지난 20년동안 할 만큼 하시지 않았습니까?

장로님 계신 것만으로도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제게 힘이 되고, 아마 우리 성도들도 그럴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목회를 하지만, 그러나 우리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엊그제 중진장로님들과 식사할 자리가 있었는데, 그게 화제였어요. 그래서 화가 나가지고,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비난을 하는데,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을 하시냐고 저한테 물어보더라구요.

저도 물론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도 제가 70세까지는 은퇴하지 않도록 본인이 원해도 제가 오히려 권해서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러나 바꾸어서 생각을 해 보세요.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할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져보지는 않았습니까? 60세가 되어서 그만 두라고 할 만큼 그만저만한 장로는 되지 않았습니까? 65세가 되어져서 그만 두라고 할 만큼 교회의 유익되지 않은 그저 묵은지 노릇만 하지 않았는지 바꾸어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래된 사람들의 약점은 바로 그것입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거지요. 교회 한 번 새롭게 해 보자면 헌금해야 되는데, 지금은 즐겨야 되는데, 지금은 부동산 투자해서 이렇게 저렇게 늘리는 재미도 느껴야 되고, 여기 저기 여행다니는 재미도 있고, 이제는 그런 재미 좀 누려볼까 하는데, 건축한다고 그러고, 땅 사신다고 그러고 괜히 짜증나고 싫은 거예요.

변화가 싫은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묵은지가 되어 버린 거예요. 그런 징조들을 여러 사람들에게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로마서는 묵은 그리스도인들을 변화시키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로마서는 부흥을 일으키는 힘이 있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부흥은 무엇으로 일어나냐 하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면 웨슬리의 마음 속에, 마틴 루터의 마음 속에 말씀이 들어왔을 때 그들이 뒤집어 지고, 그 나라가 뒤집어 지고, 세계가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영적변화의 첫 번째 현상은 예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달라진 성도의 두 번째 변화는 그들의 삶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삶은 그들이 세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곧 말씀으로 그들이 변화가 되면 세상이 변화되어지는 그러한 두 번째 변화의 연결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만 호랑이 같이 강한 교인, 그것 별로 도움이 안 됩니다. 세상에 나가면 고양이 되어 버리는 교인이 되지 마세요. 세상에 나가서도 강하고 담대한 호랑이 되어야지요. 교회 안에서도 호랑이라면 세상에 나가서도 호랑이 되어야 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띠즈 목사님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유람선을 타고다니는 구경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영적 전쟁의 시대에서 군함을 타고 가는 군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나님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로마서는 우리로 하여금 강한 군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 승리하게 만드는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학개 1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스알디엘의 아들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흥분시키시매 그들이 와서 만군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의 전역사를 하였으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마음이, 여호수아의 마음이, 그리고 거룩하게 헌신하겠다고 작정한 남은자들의 백성들의 마음이 흥분되어져 있어요. 새번역에 보니까 그 마음을 감동이라는 단어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지고, 여호수아의 마음이 감동 되어지고, 스룹바벨의 마음이 감동되어지고, 백성들의 마음이 감동되어질 때 교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부흥은 변화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로마서 말씀을 저와 함께 나누어 가면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묵은 자들이 변화되어지고, 연약한 자들이 강하여 지면서 이 시대에 부흥의 물꼬를 터가는 주역들로 바로 여러분들로 사용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903년 웨일즈에서 일어났던 부흥의 운동, 1907년 평양의 대 부흥운동을 기억합니다. 1/10도 안 되는 성도들의 주일성수운동이 평양시내가 다 문을 닫는 변화를 끼쳤습니다. 내가 스룹바벨이 되게 하시고, 내가 여호수아가 되게 하시고, 내가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이 시대에 부흥의 물꼬를 터 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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