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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은 인내에서 (롬 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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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은 인내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장 22절-25절)

요즘 TV 나 방송이나 신문에서 한국의 핏줄을 이어받은 <하인스 워드>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제일 즐겨하는 스포츠 중에 <슈퍼볼>은 가의 열광적이라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대통령을 위시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운동이 있는 날에는 일찍 퇴근하여 거리가 한산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마치 우리 한국이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 때 전국이 들썩 거렸던 그런 흥분의 도가니인 것입니다.
그런 경기에서 최고 선수로 MVP가 되었으니 얼마나 장한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부시 대통령의 초청을 받기도 했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워드>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멸시, 천대, 따돌림, 가난을 극복한 인간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워드>는 미국의 흑인 아버지와 한국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마치 성경에 디모데와 같은 존재이었습니다. (헬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워드>는 어린시절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해 왼쪽 무릎 인대를 다쳐 한쪽 무릎의 인대는 없다고 합니다.
가난 중에 제대로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하여 인대 기능이 손실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신체적인 결함을 갖고서도‘울지 말자, 워드야, 나중에 슈퍼볼 정상에 올랐을 때 전 세계가 울고 있는 나를 보게 될 때까지...’이렇게 스스로 다짐하면서 참아냈다고 합니다.
(I told myself I wouldn't cry, but we just won a Super Bowl and world can see me cry now)라고 하면서 스스로 채찍질 하며 뛰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굳은 인내의 의지가 어디에서부터 기인된 것인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의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강한 아들로 키웠습니다.
그는 아들을 어떤 환경에서도 참아낼 수 있도록 인내로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들에게 겸손해야 함을 늘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영광이 있게 된 것이라고들 모두가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워드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시켜 보았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멸시, 천대,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히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 문제들이 닥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며 사업하는 분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부딪치며 장사하는 분들, 얼마나 괴로움이 많습니까?
저는 가끔 여러분들을 생각할 때 마다 참 머리가 숙여 집니다.

저는 목사이기에 으레히 구별됨이 있어야 하고, 목사이기에 으레히 말씀을 증거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지만,
여러분이야 말로 한 주일 동안 세상의 온갖 사람들과 상대하면서 부딪히며 살아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차라리 신부나 수녀복장을 입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갈데 못 갈데가 분명하지만, 여러분의 복장이야 말로 어디든지 가도 누가누군지 모르니, 그런 속에서 신앙인의 자세를 지키며 말씀으로 싸워 승리하려면 얼마나 힘들겠느냐 싶었습니다.

1.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주어진 환경과 모든 조건들을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크리스천들이라고 별수 없습니다.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원망하고, 포기하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랫동안 나오고, 성경 말씀을 아무리 공부하고, 매일 성경을 읽었어도 정작 어려운 고난과 환난이 닥치면 <말씀>으로 이길 생각은 고사하고 믿음 없는 사람들 보다 더 크게 울고, 방황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요즘 점점 더 나약한 신앙인들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여유 있는 가정에서 고생 없이 자란 자녀들처럼, 막상 세상의 어려운 문제들 앞에 부딪칠 때 이겨내지 못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지난 이야기입니다 마는, 제가 아는 모 교회의 집사님은 산 기도를 다니면서 방언의 은사도 받았고, 전도의 은사도 받아서 모든 교인들이 능력있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어느날 자살을 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소문인즉 자존심이 강하여 쌀이 없어도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지내다가 결국 가난 중에 그렇게 한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만일 올바른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절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에서도 참고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보는 믿음 가지고는 그 사람을 평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 닥치는 환경을 보아서, 그가 과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소유자인지, 아닌지 판가름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연단을 통하여 튼튼해집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연단은 도리어 감사해야 합니다.
연단을 통한 믿음의 성장은 우리 모두가 거쳐야 할 단계입니다.

2. 우리의 신앙이 튼튼해지려면 점술적인 신앙은 버려야 합니다.
요즘 어느 교회에서나 이상하게 믿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는 없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기도원에도 다니고, 금식기도도 하고, 좀더 잘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경우들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즉 점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점술적 신앙생활이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점궤처럼 그렇게 믿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지난번 연초에 우리도 말씀을 한 가지씩 뽑아서 말씀대로 새 출발을 해 보자는 뜻에서 말씀 받기를 하였지만,
그것을 점궤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려움이 올 때 <말씀>으로 이기지 못하고,<말씀>을 점궤처럼 보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어떤 교회에 실연당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 실연당해 본 분들은 알겠지만 목숨까지 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는 살 가치도 없고, 일할 보람도 없어 세상을 하직하려고 하였습니다.
‘나같은 놈이 무엇을 하겠는가?’스스로 자포자기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목매 죽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예수를 믿었으니 죽기 전에 성경이나 한번 다시 보아야겠다고 하여 성경을 펴보니 밑줄 친 부분이 있는데,  ‘유다가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5)는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어차피 나는 죽어야 할 놈인가 보다 하고, 한번 더 다른 곳을 열어보니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의 말씀이 보였습니다.
청년은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이럴 수 있나?’아무리 그래도 목매어 죽으라니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여 모든 것은 삼 세 번이라고 했으니 다시 한곳을 열어보니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 18:21)라는 말씀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이렇게 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야말로 점술적 신앙생활이란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점궤가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 얼마나 미신적인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건강한 교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 밭이 옥토로 변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옥토가 되려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으로 갈아 엎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할 때, 아픔을 경험해야 합니다.

즉, 말씀에‘남을 용서하라’하였으니, 그 말씀대로 남을 용서하려고 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픈 경우를 경험해야 합니다.
죽여도 시원치 않을 원수였는데, 그런 사람까지 용서하라고 하는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왜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노력하고 있습니까?
미운 사람은 미운 사람으로 대하고,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인사도 하기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예수님! 주여! 믿습니다! 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나와 직분을 받았어도, 남을 칭찬할 줄 모릅니다.
언제나 남을 깎아 내리는 말만 합니다.
남들을 한번도 칭찬하지를 못합니다.
회의를 할 때도 언제나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합니다.
모두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꼭 이상한 말을 하여 분위기를 해칩니다.
그러면서도 기도원이나, 이상스러운 곳에는 자주 찾아 다닙니다.
그렇다면, 그 마음이 아직도 옥토로 변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올 때 말씀이 아무런 효능이 없습니다.
그저 감정이 앞섭니다.

3.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은 인내로 다져진 소망이어야 합니다.
소망이란 꽃을 피우려면 인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인내로 다져진 믿음이어야 그 꽃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소망이라면 현 세상에서는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잠간이면 끝납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보이는 세상의 것에만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 구름 같고, 부귀와 영화는 한 꿈일세’라는 찬송과 같습니다.
소망도 만일 이룰 수 없는 소망이라면 그것은 구름 잡는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부끄러운 구름 잡는 소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룰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그것에 소망을 품고 산다면 그것이 부끄럽겠지만, 우리의 소망은 살아있는 산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산 소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본 것처럼 내가 다시 오리라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은 세세 무궁토록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면서 잠시 머물다 갈 이 세상에서, 우리는 외국인과 같이, 나그네와 같이 살다 가지만, 하늘나라에 거기에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인내를 통하여 주어지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잠시 받는 환난을 잘 극복하여 영광스러운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미천한 자리에서 천대받고 있던 흑인 <하인스 워드>가 대통령의 영접을 받게 되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이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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