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계 21:1~8)

  • 잡초 잡초
  • 1745
  • 0

첨부 1


더욱 슬픈 장례식

두 주 전 설교 때 장례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도 이 장례에 관한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은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보면 죽음이라는 상황은 똑같지만 장례식마다 참 느낌이 다르더군요. ‘호상’(好喪)이라는 말이 있지요? 말 그대로 ‘좋은 장례’라는 뜻입니다. 물론 세상에 좋은 장례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보통 장수하신 분이 편안히 돌아가시면 호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호상’에 비해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처럼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 더 슬프고 안타까운 장례가 됩니다. 또 어떤 장례가 특히 힘들고 더 슬플까요? 오랫동안 병들어 고생하다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이, 아내나 남편이, 가족이 병 때문에 정말 너무 고생하다가 눈물 많이 흘리다가 돌아가시면 그 장례는 특별히 더 슬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때 그 큰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에게 어떤 말씀이 가장 위로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얼마 전 한 장례식을 참여했다가 정말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저와 아주 가깝게 지내던 동기목사님의 장례식이었습니다. 동기지만 저보다는 나이가 많아 형님이라고 부르며 늘 따르던 따뜻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영주에서 개척교회 목회를 하며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폐암이었습니다.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저는 작년에 겨우 한번 영주로 찾아가 위로를 하고 왔는데 그만 며칠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장례식 날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영주로 달려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교우들과 목사님들이 많이 참석해서 이미 꽉 차 있었습니다. 장례식 설교 내용은 늘 그렇듯 고인이 천국에 간 줄로 믿고 슬픔을 꿋꿋하게 이겨내자는 것이었고 저도 가능한 한 의연한 자세로 임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장례예배 마지막 순서에 몇 주 전 녹화한 듯한 그 목사님의 설교 장면이 영상으로 나오는데 처음에 그 분인지 몰라보고 “아니, 왜 다른 사람이 나오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얼굴도 몰라볼 정도로 수척하고 머리카락이 다 빠진 말기 암 환자의 모습인데 잘 안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이렇게 설교를 합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시력이 2.0일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 오늘 아침에는 준비한 설교 원고가 보이지 않아 혼이 났습니다. 참 힘이 듭니다.” 바로 그 순간 저는 애써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엉엉 소리까지 내며 울었습니다. 제가 이런데 사모님과 두 딸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천국에 없는 것

바로 이럴 때 가장 위로가 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특히 4절이 정말 위로가 됩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 이루어질 새 하늘 새 땅, 천국의 모습을 말해줍니다. 천국은 어떤 곳이냐? 거기에는 네 가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눈물이 없습니다. 두 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눈물이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너무 큰 문제가 생겼는데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눈물이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다음에 나온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 눈에서 눈물을 씻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우리가 이 땅에서 슬퍼하며, 눈물만 흘리다 갔을지라도 천국에 이르면 주님이 친히 우리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나아가 천국에는 아예 눈물 흘릴 일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아픔이나 고통이나 절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오직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천국에는 사망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죽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반드시 죽습니다. 아무리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나 심지어 갓 태어나 너무도 귀여운 아기들도 언젠가는 다 죽습니다.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한계상황, 누구도 피해 갈 수 없고, 누구도 극복할 수 없는 가장 고통스러운 운명이 죽음입니다. 이렇게 죽음만 생각하면 오직 절망뿐입니다. 어떤 회의주의 철학자가 말한 대로 우리 인생은 ‘마치 사형 날짜를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와 같습니다. 하지만 천국은 이 인간의 최대 고통인 죽음이 없는 곳입니다. 왜냐? 천국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천국에서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천국에는 장례식도 없고 묘지도 없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도 없으니 따라서 눈물 흘릴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천국에는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야 애통하고 곡을 하는데 방금 설명한 대로 천국에는 더 이상 죽음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애통이나 곡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없는 것이 특별히 눈에 띕니다. 뭐가 없습니까?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그렇습니다. 천국에는 아픈 것이 없습니다. 고통(pain)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질고가 다 사라집니다. 특히 이 모든 고통 중에서도 질병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고 약도 없습니다. 병으로 고생하며 누워있거나 죽는 일이 절대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땅에서 우리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해도 천국에 가면 그 병은 다 사라집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가 이 땅에서 장애가 있어 고생을 했다 해도 천국에 가면 더 이상 육신의 장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팔이나 다리가 하나 없었으면 두 팔 두 다리 멀쩡한 모습으로 회복되고, 시각장애인이었으면 눈이 환하게 보이고, 큰 상처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면 아주 깨끗한 몸으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제 동기 목사님처럼 암에 걸려 치료 받느라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그 건강하고 아름답던 모습이 몰라볼 정도로 수척해져서 세상을 떠났다 하더라도, 그래서 유가족들이 그 상한 모습을 보고 더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천국에서는 너무나 환하게 건강하게 회복된 온전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주장할 근거가 성경에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 근거가 성경에 있을까요?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다가 20:4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읽을까요?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천국에 가면 순교자들이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목 베임을 받은 자’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전설에 의하면 로마에서 도끼에 목이 잘려 순교했다고 하며 수많은 성도가 믿음을 지키다가 목이 베이거나 손발이 잘려 잔인하게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들은 이 천국 보좌에서 어떤 모습으로 왕 노릇을 할까요? 이 땅에서 목이 잘렸으니 목이 없는 상태로 천국에 있을까요? 손발이 잘린 상태 그대로 보좌에 앉아 있을까요? 당연히 아니지요. 분명히 목도 손발도 그대로 있는 온전한 모습으로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근거로 천국에 가면 우리의 상한 몸이 다 회복된다는 주장이 맞다고 봅니다. 정확한 사실은 우리가 나중에 천국 가보면 알겠지만 오늘 성경을 통해 모든 장애나 상처를 입은 분들도 깨끗하게 회복된 상태로 천국에 거할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 너무 아파서 고생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 유가족들이 큰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이 말씀에 의지하여 사랑하는 고인은 더 이상 눈물도 죽음도 애통이나 곡도 특히 어떤 질병도 상처도 없는 곳으로 가셨다고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이 어디 있겠습니까?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까지 ‘치유의 말씀’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섯 번에 걸쳐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지난 다섯 번의 설교에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가 육신의 질병과 질고를 주의 이름으로 치유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한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명하고, 예수 권세 의지하여 질병을 물러가게 할 능력이 있고, 마귀사탄과 귀신을 항복시킬 힘이 있고, 모든 문제와 고통을 해결한 권세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질병을 고친다 하더라도 이 땅 위에 사는 한 우리는 또다시 병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실패를 이겨내고 극복해도 또다시 실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땅 위에서의 삶이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국을 맛보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한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이 땅 위에서는 또다시 질고와 고통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천국만 바라보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여기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주님의 권능을 체험하며 능력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마지막 때 천국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이루어지고 1절 말씀처럼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없어집니다. 또 계시록 20:11부터 보면 최후 심판을 통해 마귀 사탄과 모든 악한 세력은 불 못에 던져져 둘째 사망에 이르고 영원히 멸망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와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문제는 다 영원히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성도와 함께 거하심으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시게 되어 4절에서 말한 대로 모든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곡과 아픈 것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치료와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날에 마귀 사탄과 악한 세력은 어떻게 될까요? 불 못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러므로 이 날에 모든 불신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죄인들은 다 마귀사탄과 함께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지만 여러분, 두려워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때가 되어 마지막 종말이 이르게 되면 우리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며 우리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완전히 해결되는 순간을 맞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을 두려운 마음이 아닌 소망과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종말은 똑같은 날인데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날이 되는데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감격적이고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의 클라이맥스, 역사의 클라이맥스

이제 오늘로 치유의 말씀은 끝이 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여섯 개의 성경말씀 외에도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치유와 회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적어도 수백 개가 넘습니다. 그 모든 말씀이 다 구구절절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치유의 말씀, 회복의 말씀의 최종 결론은 무엇이냐? 그 결론이 바로 신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그것도 제일 마지막 장인 21장과 22장입니다. 21장, 22장은 성경의 가장 클라이맥스요 하이라이트가 되는 본문으로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즉 종말 때 오는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엄한 교향곡이 맨 마지막 악장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가슴 벅찬 감격을 주듯 성경이라는 교향곡의 가장 클라이맥스가 되는, 가장 가슴 벅찬 감격을 주는 본문이 계시록 21장, 22장입니다. 바로 이 계시록 21장 4절에서 천국에는 눈물도 죽음도 애통이나 곡하는 것도 질병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런 다음에 9절부터 보석같이 빛나는 새 예루살렘, 즉 우리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천국의 찬란한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 다음에 22장 2절에서 바로 이 말씀대로 주께서 정말 오시겠다고, 속히 오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최종 결론인 22장 20절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말은 재림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아람어로 이렇게 고백하곤 했습니다. ‘마라나타!’ 마라나타가 바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땅위에서 결코 편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박해 받고 핍박 받았습니다. 네로 황제나 도미시안 황제와 같은 폭군의 박해를 피해 몰래 지하 묘소인 카타콤에 숨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 처참하게 죽어야 했습니다. 이 땅에서의 신앙생활이 결코 순탄하지 않은 고난과 질고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유일한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라나타’,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재림과 천국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키고 심지어 순교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이 땅 위에서 내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가 얻고 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빼앗아가지는 못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마라나타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이, 때로는 한없는 아픔과 상처가 우리를 몹시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마라나타 신앙’이 있습니다. 마라나타가 이루어지면, 우리가 이 땅에서도 치유와 회복과 문제해결을 체험하며 능력 있게 살아갈 수 있지만, 나중에 새 하늘 새 땅 천국에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만 가득한 삶을 살게 됩니다. 특히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이 마라나타 신앙을 기억하십시오. 오늘도 이 땅에서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하며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하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