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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사적인 신앙인 (행 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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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사적’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신사’라는 말을 gentleman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말은 원래 왕실에서 수종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문벌 좋은 집에서 태어나서 왕 앞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gentleman이라고 했습니다.
아주 좋은 예절을 갖추고, 고상한 지식과 품격을 갖추고 왕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gentleman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에 비신사적인 교인들을 구분해 놨습니다.
▲감투 교인, 직분을 감투로 알기에 마지못해서 나오는 교인입니다.
▲인력거 교인, 심방을 가서 끌어와야만 나옵니다.
▲핑계 교인, 교회 일 좀 하라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 이리저리 빠져나가고 변명이 많습니다.
▲꽈배기 교인, 설교가 조금만 길어지면 몸을 꼬기 시작합니다.
▲파장 교인, 설교 끝날 때쯤 들어옵니다.
▲고양이 교인, 쓰다듬어 주어야만 신앙생활 합니다. 안아주고 인정해주고 눈길을 주어야만.
▲염소 교인, 교인들 험담하고 비난하고 날카롭게 뿔로 들이받고 좌충우돌입니다.
▲오락 교인, 운동회나 야유회 때만 나옵니다.
▲벙어리 교인, 몇 해를 믿어도 기도 한마디 못하고 전도 한마디 못하는 교인입니다.
▲저기압 교인, 언제나 은혜 받지 못하고 시무룩합니다. 얼굴이 어둡고 건드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교인입니다.
▲채점관 교인, '목사님 설교가 몇 점짜리인가?' 채점합니다.
▲소풍객 교인, 주일날 갈데없으니까 ‘교회에 한번 가볼까?’ 하고 나오는 교인입니다.
▲묵상 교인, 예배만 시작하면 묵상합니다. 영적으로 다운된 상태로 아예 눈을 감습니다.
▲국회의원 교인, 언제나 가족 대표로 혼자 나오는 교인입니다.
▲가시 교인, 문제만 골라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자기 눈에 대들보가 있는 것은 모르고 남의 눈에 티는 너무나 잘 집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사람들일지라도 신사적인 성도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황무한 밭이라고 할지라도 돌을 캐내고 잡초를 뽑아버리고 보섭으로 찍어서 갈아엎은 다음에 거름을 두루 주고 비를 흡수하면 좋은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영국이 신사의 나라라고 하지만, 그들의 과거는 야만족이었습니다. 거기에 복음이 들어가면서 개간된 것입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핀란드, 노르웨이, 스페인 같은 나라들이 과거에는 바다에서 도적질 해먹고 살던 해적들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가서 그렇게 달라진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사적인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신사적인 신앙인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2차 선교 여행을 하던 중에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유대인들이 워낙 드세어서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깡패들을 사서 바울 일행을 방해하고 목숨을 위협함으로 바울은 밤중에 그곳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3주 만에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신사적이었습니다.

본문 11절에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 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모두 베뢰아 교인들처럼 더 신사적인 교인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을 - 헬라어로 ‘유 게네스’ 즉, ‘좋은 가문에 태어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어떤 사람은 못사는 가정에 태어난 것을 비관하고, 배우지 못한 부모에게 태어난 것을 원망합니다. 천한 직업을 가진 가문에 태어난 것을 열등감을 갖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사람들은 다 명문가문에 태어나고, 재벌가문에 태어났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못사는 가정, 못 배운 가정, 보잘 것 없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상업도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 장사하는 사람, 쇠를 달구어서 공작을 만드는 사람, 돌을 깨고 다듬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라고 했겠습니까? 그 이유가 있습니다.
베뢰아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고상한 지식과 품격을 가지고 아주 깨끗한 매너로 아주 멋지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사적인 성도들이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베레아 사람들이 왜 신사적인 교인이었습니까?

1.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신사적이라 해서 어떤 외모에서 풍기는 에티켓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적인 매너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신사적인 교인이라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열망, 말씀을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벧전2:1-3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순수함이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은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순수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도 가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순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체면이나 자존심이 가려져 있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에는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어야 합니다. 갓난아이가 엄마의 젖을 찾아 우는 것처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딴 생각을 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예배에 출석하지만 바른 믿음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이 말씀은 *** 가 들어야 하는데 . . . ’ 이런 태도는 안됩니다.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통하여 나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려는 것인지 진지하게 받아들어야 합니다.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한 결코 영적인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언제나 ‘아멘. 그렇습니다.’ 긍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신앙을 가지고 사십시오. 매사에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아멘은 확신의 표현입니다. "아멘"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아멘"이 살아있는 성도는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 아멘이 메말라 있으면 신앙도 메말라있다는 증거입니다.

막11:23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상실되고 자기 주관을 가지고서 비판하고 평가하기 시작 할 때는 벌써 순수함을 잃어버린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게 살아가는 삶이 신사적인 교인입니다. 신사적이지 못한 교인들은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고, 진리를 거스리고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 받아 신사적인 교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11절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베뢰아 교인들은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았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감동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 마음이 부드럽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간절한 마음, 진지한 마음을 가진 교인들입니다.
마음 바탕이 신사적이고 좋은 교인들입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신사적인 사람”이란 말을 “마음이 트인 사람”으로 번역했습니다. open mind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이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신사적인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 교만과 편견의 돌밭, 아집과 쓴 뿌리들이 뒤덮인 사람들 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말씀의 꼬투리를 잡습니다. 트집을 잡겠다는 마음으로 비판적으로 듣습니다. 듣기 좋은 말, 자기정서나 취향에 맞는 말만 골라 듣기도 합니다. 꼭 걸러듣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심성이 좋은 것은 참 복된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 마음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심성이 좋은 사람은 말씀을 듣는 자세부터가 다릅니다. 처음부터 듣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경청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전적으로 수용하며 받아들입니다.
무엇이든지 듣고 배울 때 받아들이는 마음이 매우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이란? 모든 열성으로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간절히 받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해주어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해서 주의를 집중해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듣고 주의를 집중해서 듣는 자세 !! 얼마나 신사적인 자세입니까? 공부를 하든지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든지 이렇게 집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책을 펴놓고 딴 생각이나 하고 있는데 공부가 되겠습니까?

베뢰아의 유대인들이 신사적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열등의식이 적었다는 말입니다.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말하기를 “시기심의 근본은 열등의식이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 마음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면 열등의식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 거하는 유대인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시기심이 많았으면 회당에서 바울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장 시기심이 발동하여 폭력배까지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좋은 말을 해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고 삐딱하게 듣습니다. 피해의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비비꼬여 있는 사람입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나쁘게만 받아들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으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성령의 불길로 태워주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더 은혜를 받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 있는 부흥사가 설교를 해도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별거 아니 것 같은 말씀에도 은혜를 받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느냐가 아닙니다.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존중히 여기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 말씀을 얼마나 존중히 여기느냐는 그 하나님을 얼마나 경외하느냐?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렘4:3) 하셨습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 밭을 기경하여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 부드럽고 온유한 옥토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읍시다. 그리할 때 믿음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아멘, 아멘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니 그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 . 구구절절 다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한 말씀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옥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음밭을 갈아 엎어야 농사가 잘 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은혜를 받고 백 배, 육십 배, 삽십 배의 심령의 복, 건강의 복, 가정의 복, 자녀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간절한 마음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고후8:16 “또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면서 간절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간절한 마음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시옵소서” 시편기자는 “하나님이여 시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시63:1에는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을 줄 안다고 하는 것은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겸손은 생명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습니까?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면 말씀을 잘 받습니다. (교만 - 삼상15:17-19) 언제나 ‘아멘’ 하는 분들은 겸손하신 분들입니다. 겸손하니까 시험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스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부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다시 목소리를 높여 요청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왔다”고 하십니다. 나와 관계가 없다고 거절하는 말입니다. 그래도 부르짖습니다. 그 때 어린아이의 떡을 개에게 주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때 그 여인은 “옳습니다. 옳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얼마나 겸손한 말입니까? 그 때 주님은 기뻐하시면서 “믿음대로 되어라”(마15:21-28).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때 딸이 나음을 얻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었습니다. 말씀을 받는다는 말은 바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믿음, 간절한 기도, 간절한 사랑이 넘치는 성도가 신사적인 성도입니다. 이런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기 때문입니다.

11절하 “이것이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신사적인 성도가 어떤 사람입니까? 다방면에 해박하고, 고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많이 배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까? 신사적인 사람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성도입니다.

“그러한가” 옳다고 인정이 되면 확신을 가지고 결단을 내리는 성경중심의 사람들이 었다. “상고한다” 는 말은 날마다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판단하고 구별하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하루의 모든 일을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취어 판단하고 결정하는 성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나는 것은 하지 않는 사람,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 얼마나 멋있는 사람입니까?

우리 모두 신사적인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사적인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교인 가운데 ‘후탁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평소에 하도 성경을 보지 않아 성경에 먼지가 쌓이면 주일날 교회에 갈 때면 성경의 먼지를 ‘후’하고 불고 성경을 ‘탁탁’ 털어서 교회 나오는 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 한 장 읽지도 않고 살다 보니 믿음은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마귀가 마음 속 깊이 들어 와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비신사적인 교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사적인 사람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또 궁금한 것은 탐구하고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신사적인 교인들이라는 칭송을 받았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베뢰아에 믿는 사람들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게 예수 믿는 성도들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베뢰아에서 하나님 말씀 전하여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까지 무리를 충동시켜 움직여 소동케 했습니다. 이런 무리들은 언제나 사단의 짓만 쫓아다니면서 복음을 방해 합니다.

바울이 어려움과 핍박을 당하자, 베뢰아 사람들은 불난 집 구경하듯이 구경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위험과 희생을 무릎 쓰고 바울을 몰래 피신시켜 바다까지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인도하여 아덴에 도착하게 하였습니다. 베뢰아에서 아덴까지는 320㎞ 대전에서 부산가는 거리쯤 되는데 그들은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바울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얼마나 용기 있고 멋지고 희생적인 믿음입니까?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믿는 이가 많아지는 게 교회의 소망입니다. 어떻게 하여 믿는 자가 많아졌을까요? 전도를 계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 보다 성도들이 아름다음 믿음을 가지므로 믿는 자의 수가 늘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적이 태도로 믿는 자가 많아지는 신사적인 교회였습니다. 진짜 전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베뢰아 교회는 전도의 사명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신사적인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적인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임경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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