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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눅 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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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 누가복음 13:10-21

요  절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하나님 나라”는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이루는 큰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국가를 구성하는 삼대요소가 무엇입니까? 영토가 있어야 하고, 백성이 있어야 하고, 통치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최초에 있었던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이 있었고, 아담과 하와가 있었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일시적인 나라였습니다. 아담이 사단의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순종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여자의 후손 가운데 그리스도를 보내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후손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후 하나님은 이 약속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 시대에 잠시 비슷한 나라가 세워지는가 했더니, 이스라엘이 또다시 우상숭배하며 하나님을 대적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다윗 왕국은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런 멸망의 과정을 겪으면서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라는 사람이 세우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워지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일 처음 전한 메시지가 바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귀신에게 잡혀 꼬부라진 한 유대인 여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꼬부라진 여인을 마귀의 권세에서 풀어주시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외적 특성과 내적 특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롭기만 한 정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사단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나라요, 그 세력이 전 인류에게 미치는 우주적인 나라요, 타락한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역동적인 나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배우고,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자유케 하는 하나님 나라(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십팔 년 동안이나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18년 동안이나 귀신에게 붙잡혀 앓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귀신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귀신이 욥을 쳐서 온 몸에 피부병이 발생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병마에 시달린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병을 일으키는 마귀라는 뜻이잖습니까? 이 여자는 등을 쳐서 조금도 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학자들은 등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병은 “기형성 척추염”입니다. 여기서 꼬부라졌다는 말은 “함께”라는 말로 “구부리다”라는 말의 합성어로 이중으로 꼬부라진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는 척추뼈가 굳은 덩어리로 뭉쳐지고 이중으로 꼬부라져 도저히 곧 바로 펼 수 없게 된 꼽추였습니다. 척추에 관한 병은 지독히 고통스러운 것이 특징입니다. 이 여자는 18년 동안이나 이 병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이런 병을 앓고 있으면 공중 예배에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안식일에 회당에 나왔습니다. 16절에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병으로 앓으면서 회당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병을 앓으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쉬고 싶은 마음, 병을 핑계하는 마음을 부인하고 예배에 나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어떻게 도와주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척추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 여자를 가까이 부르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대개 병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진해서 이 여자를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하고 안수하셨습니다. 놓였다는 말은 완료형으로 ‘완전히 자유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질병에 사용된 것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이는 이 병이 귀신에게 붙잡혀 생겨난 질병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병마에 시달리며 18년 동안 앓아온 이 여자를 질병의 고통에서 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며 그 여자에게 안수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곧 허리를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여자는 18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등이 꼬부라져 조금도 펼 수 없었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꼬부랑 할머니처럼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을 잘 때도 똑바로 누워서 잘 수 없었습니다. 땅만 내려다보며 인생의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 여자의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지만 결혼 전에 이런 병에 걸렸다면 시집도 못 갔을 것입니다. 결국 이 여자는 등만 꼬부라진 것이 아니라 인생이 꼬부라졌습니다. 그러나 회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 여자는 꼬부라진 등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 인생도 펴졌습니다. 이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을 볼 때 꼬부라진 마음도 펴졌습니다. 그 여자는 이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마귀에게 붙잡혀 괴로움을 당하던 여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이 여자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여자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덧입게 된 것은 일방적은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여자가 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회당에 나온 것뿐이었습니다. 병으로 몸이 쇠약해졌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안식일 예배에 나왔습니다. 그랬는데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이 여자를 불러 거의 평생을 앓아온 고질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여자를 향해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13:12)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에서 메시야로서 삶을 출발하시면서 처음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고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4:18).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예수님은 무언가에게 사로잡혀 꼬부라진 인생을 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코카골라 창업자 아사 G. 캔들러씨는 젊어서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술을 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써 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는 늘 술에 위한 상태 속에서 살았습니다. 한 번은 반쯤 취한 상태로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너는 너 자신을 포기해라. 너 자신을 거절해야 살 수 있어”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술을 먹지 말라.’고 하지 않고 너 자신을 포기하고 하실까?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당신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주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는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아내는 남편이 자기 노력과 의지로 술을 끊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 손을 잡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아내와 손을 잡고 기도하는 그 순간에 그의 마음에 자만심이 사라졌습니다. 자기 능력을 믿고 살아온 자신의 교만을 회개하고 갓난아이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와 아내는 한없이 울었고, 생애 처음으로 영혼의 평안을 느꼈습니다. 그후로는 술을 마시고 싶은 욕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또한 이기심과 돈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도 해방되었습니다. 수입의 사분의 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물질로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며 꼬부라진 인생을 펴주십니다. 아무리 오래된 고질병도 주님께서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저는 여동생이 둘이 있습니다. 둘째 여동생은 결혼 전에 대구 UBF에 좀 다녔습니다. 의정부에 사는데 슈퍼를 하느라고 교회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7,8년 년 전에 남편이 간경화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당신 같은 정도가 되면 큰 병원에 가 봐도 별수 없으니 돈만 없애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쉬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하여 집에서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물건 사러온 한 여전도사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가 매일 와서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슈퍼는 매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그럼 12시에 와서 기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밤 12시가 되자 전도사님이 왔습니다. 남편은 돌아누워 기도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남편은 한번도 교회에 나간 적도 없는 불신자였습니다. 그래도 강권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매일밤 12시에 2주 동안을 기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달 후에 병원에 가 보니까 간이 기적같이 좋아졌습니다. 의사도 놀랐습니다.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후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친척들 가운데 얼굴이 제일 훤하고 신앙이 제일 좋습니다.

요즘은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면서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가슴에 응어리진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그 응어리를 풀어주십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열등의식과 비교의식, 절망감으로 정신이 쇠약해진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나오면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시는 존재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게임 중독자도 고쳐 주십니다. 어떤 청년은 연삼일 동안 한 자리에 앉아서 게임을 하다가 기력이 쇠하여 사망한 경우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고쳐 주십니다.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꼬부라진 인생을 펴주시고, 근본적으로 치료해 주시는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를 본 회당장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14a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이 분을 냈습니다. 회당장이면 이 동네 어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랫동안 병마로 고생하던 자매가 고침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당연히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회당장은 도리어 화를 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안식일의 규례를 어겼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유대교의 엄격한 규례를 따르는 자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안식일 규칙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응급처치는 할 수 있지만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등이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 주신 것은 안식일 규례를 정면으로 어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를 내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 직접 항의하지 않고 무리를 향하여 말했습니다. 14b 절을 보십시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안식일 준수는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다시 세운 이후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전쟁을 하다가도 안식일이 되면 창칼을 놓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 와서 고침을 받으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병 고침을 받는 것도 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병 고침을 받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을 했습니다. 안식일 규례에 신명기 말씀을 꿰맞추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15,16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님은 먼저 회당장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거짓된 자들이요, 가면을 쓴 자들이요, 겉으로는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론대로라면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우물에 가서 물을 먹이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일이 아닙니까?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하고, 소나 나귀를 풀어내어 우물이 있는 곳에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는 것하고 어느 것이 큰 일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소와 나귀를 이 여자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문에는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이 문장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 여자가 아브라함의 딸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조상으로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을 맺은 족장입니다. 이 언약의 핵심은 그의 후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온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말은 이 여자도, 비록 등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이지마는 언약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너무나도 귀한 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을 보내서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택함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실 때 자기 짐승은 안식일에도 마구에서 풀어내어 물을 먹이면서 18년 동안이나 사단에게 매여 앓고 있는 여인을 풀어주는 것을 금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꼬부라진 여진을 고쳐 주시자 모든 반대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매우 포괄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해서 자기 뜻을 주장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만족을 채우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에 갇히게 되면 모순에 빠지게 되고, 그 모순이 드러나게 될 때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II.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18-21)

예수님께서는 사단에게 매인 여자를 자유케 하신 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사사건건 반대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온 무리의 가슴에 심겨지고 퍼져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외적 특성(19)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무엇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까? 19절을 보십시오.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겨자 나무는 코스모스와 같은 일년생 풀입니다. 요즘 들에는 코스모스가 한창 피어 있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푸른 하늘 아래 바람에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겨자씨는 씨 중에 가장 작습니다. 그렇지만 채소밭에 뿌려놓으면 왕성하게 자라서 3,4미터의 나무가 됩니다. 가지가 단단해지는 가을이 되면 온갖 새들이 찾아듭니다. 폭풍우가 몰아칠 때 새들의 피난처가 됩니다. 피곤한 새들의 휴식처가 되며, 뙤약볕으로부터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채전에 심은 겨자씨와 같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점에서 겨자씨와 같습니까?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 속에 엄청나게 큰 나무로 자라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도 처음 시작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큰 나무와 같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또 성경에서 큰 나무는 세계를 지배할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겔 17:22-24). 다니엘의 환상이나 에스겔이 본 환상 중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왕국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겨자 나무처럼 자라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강대한 나라가 될 것을 상징합니다. 또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든다는 것은 복음이 온 세계에 퍼지게 되어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하나님의 품속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단 4:20,21).

이상에서 볼 때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비천한 구유에 한 아이로 태어나셨습니다(눅 2:6). 아무도 그의 탄생을 환영해 주지 않았습니다. 헤롯의 막강한 권력 앞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기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에 비하면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겨자씨와 같이 작고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무한히 큰 나무로 성장할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구유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는 갈릴리에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가지가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유다에서 사마리아로 퍼져나갔습니다. 안디옥을 거쳐 로마에 미칠 만큼 커졌습니다. 로마를 온 세상을 덮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어떻습니까? 영원히 망할 것 같지 않던 로마는 망했습니다. 로마는 폐허가 되었고, 관광객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그 가지에 깃들고 주님의 품안에서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 60억 중에 19역 3천만 명이 카톨릭을 포함한 기독교 인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하나님 나라에 보금자리를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외적 특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그 비전 가운데 갈릴리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한 사람의 회개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에 가장 힘써 이루신 역사는 제자양성의 역사였습니다. 젊은 청년들을 키우는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 촌사람 12명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들 대부분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많이 배우지도 못했습니다. 지도자가 되기에 합당치 못합니다. 이들은 너무 거칠고, 너무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장차 큰 나무가 될 것을 소망하고 키우셨습니다. 제자양성의 역사는 너무 보잘것없고 미미한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게 될 소망 가운데 제자양성을 하셨습니다(마 28:19,20).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장차 세계를 정복할 것이라는 확신 가운데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가 대형교회가 되를 원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보나, 우리의 출신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사람을 키우는 일을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큰 일은 할 수 없지만 사람 키우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2세들을 잘 키우고, 청소년들을 잘 키우고, 젊은 청년들을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로 키우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보실 때 가장 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일이 사람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도 않고, 별로 인기도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돕는 이들이 장차 큰 나무가 되고, 이들을 통해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합니다.

둘째,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내적 특성(20,21)

20,2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가루 반죽을 하룻밤 사이에 온통 다 부풀게 만듭니다. 반죽은 부풀게 해야 부드럽고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의 힘입니다. ‘넣다’는 말은 ‘감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여성이 밀가루서 말 속에 적은 양의 누룩을 몰래 넣었습니다. 가루 서 말은 매우 많은 양입니다. 한 말은 약 13리터입니다. 밀가루 서 말이면 160명을 먹일 수 있는 아주 많은 양입니다. 그에 비해 누룩은 극히 작은 양입니다. 그런데 하룻밤사이에 누룩은 서 말의 밀가루 반죽 전부를 부풀게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이런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내적 특성입니다.

이 누룩의 비유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복음이 심겨지는 것은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어떤 분을 보면 저 사람은 도무지 변화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꾸준하게 말씀이 심겨지고, 복음이 심어지면 변합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변합니다. 어떤 분은 너무 깍쟁이같이 생겨서 저 사람이 변할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변해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정말로 충성하는 일꾼이 되었습니다. 연변의 김요한 선교사님은 대학교 2학년 때 태종대여름수양회에 초청을 받았는데 성경책도 안 들고 수영복만 들고 참석한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수 선교사가 되고 박사가 되어서 중국 선교 역사에 귀히 쓰임 받고 있습니다. 복음은 누룩과 같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이처럼 개인도 변화시키지만 가정과 사회를 변혁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이 말씀은 한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고 변화된 삶을 살면 그 가족들도 영향을 받아 변화된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이 그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내 가족이 변하고, 내가 만나는 친구들이 변하고, 내가 속한 회사가 변하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기독교 인구를 8천만 명에서 1억을 잡습니다. 삼자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하교회 가정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1966년 모택동의 문화혁명 이후에 기독교의 씨를 말렸습니다. 모든 성경책은 다 불태우고, 기독교를 믿던 지성인들은 시골로 보내어 농사를 짓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30년 동안 중국에 기독교가 가장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특별한 지도자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이 있어서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경찰이 변해서 도리어 기독교인들의 보호자가 된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가장 경계합니다. 지금도 공식 TV에서는 기독교의 부정적인 면들을 정기적으로 방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매이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자기는 쇠사슬에 매였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고백한 것처럼 복음은 계속해서 13억 중국 사람들에게 전파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복음이 데살로니가 전파되었을 때에 사람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라고 했습니다. 이만큼 복음은 그 사회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누룩과 같이 온 천하에 퍼져나갑니다. 이번 주에 임신화 선교사와 최박일 형제 가정이 중국으로 돌아갑니다. 이 가정이 중국에 가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며 중국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가정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로 하나님 나라는 사단의 권세에서 자유케 되는 권능의 나라입니다. 이 자유는 우리의 행위의 대가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작은데서 시작되지만 성장하는 나라요, 온 세계를 품고 섬기는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새사람 되게 하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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