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눅 13:22-35)

  • 잡초 잡초
  • 3815
  • 0

첨부 1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 누가복음 13:30-35

요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4절

여러분은 고등학교 시절에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앙드레 지이드 『좁은 문』을 다 읽으셨을 것입니다. 유년기의 제롬과 알리사는 사촌지간임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하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청년기까지 지속됩니다. 이들은 어린 시절 함께 교회당에 가서 목사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제롬은 알리사를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제롬은 알리사와의 사랑을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알리사를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당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알리사는 성경 말씀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사랑을 통해 행복을 얻기보다는 신령한 복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제롬에 대한 사랑을 단념했습니다. 남녀 간의 육체적 사랑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알리사는 세상 만물을 제롬을 통하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제롬을 생각하지 않고는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알리사는 자신을 청결하게 하기 위하여 제롬과 만나는 횟수를 차차 줄여나갑니다. 자기 주위에서 제롬을 생각나게 하는 모든 물건을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 알리사는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알리사는 거기에서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제롬은 알리사의 죽음을 통보 받고 너무나 슬퍼합니다. 그는 알리사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간직한 채 일생을 독신으로 보내게 됩니다. 알리사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좁은 길을 갔고, 제롬은 알리사를 위하여 좁은 길을 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 소설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천국은 참 들어가기 어렵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들어갈 수 없고 혼자 들어가야 하는 거구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막연하게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저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말해 줍니다. 구원의 문은 좁기 때문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하며(22-24), 그렇지 않을 때 문이 닫혀서 거절당하게 되고(25-27), 결국 천국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일을 갈게 된다(28-30)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땅에서,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힘써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을 심령으로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24)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예수님은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속 역사를 완성하기 위하여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더 상한 마음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을 것입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무슨 질문을 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민족 전체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와 달랐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많이 맞는다고 했습니다(12:47), 또 죄를 호리다도 다 갚지 않으면 결단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12:59). 또 망대가 무너진 비유나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회개치 아니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13:3-9).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은 민족 전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그렇다면 구원받는 자가 극히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소수의 사람들만 구원 받는다는 말이 참말입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서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은 좁다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 좁은 문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이 너무 좁고, 길이 너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누가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누가는 힘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찾는 이가 적어서 너무 안타깝고, 그 문으로 들어가야 구원을 얻고 천국 잔치에 참여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힘쓰라’는 말은 ‘죽을힘을 다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make every effort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권투시합이나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 선수와 싸울 때 죽을힘을 다해 싸울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구원의 문,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문제들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을힘을 다해 싸워야 할 대상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유혹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죄의 세력입니다. 이는 옛 사람이라고도 하고, 자아라고도 합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날마다 천국을 맛보며 성화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원이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셨을 때에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되는 것이지마는 구원의 완성은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이 노력도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 힘을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13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가끔 ‘나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까 내 맘대로 살아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셨고, 구원하신 자들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붙들어주실 것이니 지옥에 갈 염려는 없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계선교 열심히 안 해도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다 구원하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하이퍼 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이라고 합니다.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합니다.

앙드레 지이드는 그의 작품 『좁은 문』에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랑하는 사람과도 함께 갈수 없을 만큼 좁고 그 길이 협착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면 이처럼 인간적인 사랑을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찾는 이가 적어서 외롭고 쓸쓸할 때도 많습니다. 요즘 유명 연예인들이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10월 초에는 상주 자전거 축제 때 3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넘어지는 바람에 11명이 깔려 죽고 백여명이 다쳤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파하면 외면합니다. 비웃고 조롱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다 가 있습니다. 그래서 좁은 문을 찾는 이가 더욱 적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결국은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면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이렇게 좁습니까? 하나님께서 문을 좀 크게 만들어 놓으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좁게 만들어놓았을까요? 사실은 문이 좁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좁게 느껴질 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말씀은 신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기보다 불신자 유대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무슨 선한 일을 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께서 강림하시고 교회가 세워진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바리새인 출신 크리스천들은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행 15:5).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그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십니다(고전 1:21). 왜냐하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인과응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동양인들도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 의와 교만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좁은 문입니다.

또 구원의 문이 좁은 것은 회개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망대 비유를 통해서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회개가 어렵습니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그래, 내가 잘못했다’ 이 한마디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경험으로 알 것입니다. 심히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래도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남보다 착하게 살아왔는데 너는 죄인이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해라고 하면 누가 ‘그래 나 죄인이야. 예수님 믿을 께’ 하겠습니까? 가정복음화를 위해서 기도하지만 부모님들에게 전도하기가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자기 나름대로 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좁게만 느껴집니다.

또 앞에서 말씀 드렸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천국에 이르기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야 하기 때문에 좁은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 나오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액자가 있습니다. 이 액자를 보면 기독자가 장망성에서 나와서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그 문이 얼마나 좁고 길이 얼마나 험한지 알 수 있습니다. 유혹도 많고 시련도 많고 두렵게 하는 요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가면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십니다.

저는 임신화 선교사님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분은 믿음이 어린 상태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거기에서 2년 동안 있으면서 OO 선교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OO 국적을 가진 분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 남편도 선교사님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한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이분들은 중국 내륙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가정을 보면서 이분들이야말로 정말로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유혹이 많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문화 자체가 넓은 길로 가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멸망의 길로 가도록 떠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깨어있지 않으면 떠밀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완성해 가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게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를 놓쳐버리면 들어가기를 구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25-27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II.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25-27)

25절을 보십시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주를 만들고 그와 그 가족들과 짐승들이 다 방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여호와께서 친히 그 문을 닫아 넣으셨습니다(창 7:16). 천국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 지나갈 때까지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문이 닫힌 후에 도착하여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주여, 열어주소서” 그러나 주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이 말씀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십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알지 못하십니다.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주를 시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를 시인하시고, 사람 앞에서 주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부인함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눅 12:8,9).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이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그들을 모른다고 부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그때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그 자리에 앉아서 떡을 먹은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동네 길거리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것을 구경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구경꾼들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말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방관자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천국 복음을 듣고도 회개치 않고, 믿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려 있을 때에 그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왜 예수님이 거리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보고 그냥 지나갔을까요?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바쁜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에게 적용시키는 일이 귀찮기도 했을 것입니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성경공부는 무슨 성경공부냐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에 바빴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황금같이 귀한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행악하는 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경꾼들을 가리켜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문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닫힐 때가 있습니다. 일단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피일 차일 미루게 되면 구원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고, 결국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엉덩이를 빼고 엉거주춤하게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고자 하는 자들을 악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의 동기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문화 속에 젖어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곧 닫힐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말세지말이라고 합니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그날이 구원의 문이 닫히는 날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오실지 내일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또 주님께서 늦게 오실지라도 우리 각 사람에게는 죽는 순간이 구원의 문이 닫히는 순간입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은 것은 순서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달에는 제 여동생 남편이 급성 폐렴으로 소천했습니다. 우리 형제들 중에서 제일 건강하고 나이도 적은 축에 속했는데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요즘은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도 많고, 암으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전 세계가 조류독감 바이러스로 인해 초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파되고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면 수천마리씩 죽어가는 닭처럼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건강하게 살아 있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순간에 구원의 문은 닫힙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믿음의 길에 들어서야 합니다. 피일차일 미루다보면 결국은 불법을 행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버마 선교사 저드슨은 죽기 전에 예수 믿으면 되지 젊어서 믿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친구의 말에 넘어가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친구와 서부로 여행을 하던 중 그 친구가 여관방에서 원인모를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때 그는 회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생동안 버마 선교사로 귀히 쓰임 받았습니다.

정영준 목자님 가정은 내년에 OO 선교사로 나가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은 요즘 젊은이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가정입니다. 남편은 공무원이고 아내는 교사입니다. 복스러운 세 명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 땅에서 안락한 삶을 즐기면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로 쓰임받기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서울을 오가며 선교훈련을 받았습니다. 이제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자식 다 키워놓고 가겠다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가고자 하는 이분들의 믿음의 결단을 통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OO 선교 역사에 귀히 쓰실 것을 믿습니다. 주 안에서는 항상 현재가 중요합니다. 현재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현재적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III 구원 받은 자와 쫓겨난 자(28-30)

2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을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유대인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마지막 심판의 날에 천국에서 쫓겨나서 슬피 울려 이를 갈게 됩니다. 그 받을 형벌이 너무나 크고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들과 그들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 있는데 자기들만 거기에서 제외되어 버렸습니다. 이들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과 근본적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모든 선지자들은 다 오실 그리스도를 멀리서 환영하고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그리스도께서 직접 오셔서 거리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도 영접하지 않고 구경꾼들처럼 대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슬피 울며 통곡을 하지만 영원한 형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동과 서에서, 또 남과 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여길 만큼 이방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동서남북에서, 전 세계에서, 땅끝에서 몰려와 천국 잔치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 얼마나 분통이 터질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30) 이 말씀은 누구보다 먼저 출발해서 하나님 나라에 가장 가깝게 와 있는 너희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으면 땅 끝에 있던 이방인들이 먼저 그 천국 잔치에 먼저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복음을 영접할 기회가 먼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영접하지 않았으며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결국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가 넘어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생활을 늦게 출발했지만 빨리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라 하고 영적인 게으름을 피우며 안일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완성을 향하여 힘쓰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자도 있습니다. 최종적인 판다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맛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이 문은 회개하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고,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단체로 들어갈 수 없고 혼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문은 생명으로 가는 문이기 때문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열려 있는 동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영접할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 여기에서 믿고 주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피일차일 미루는 것은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 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순례의 길에서 한 사람도 낙오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