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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과 제사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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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 그 분을 잘 믿고 따른다는 것이 어떤 삶을 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동일한 말씀이 마가복음 2:13-17절과 누가복음 5:27-31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고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13a절의 말씀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납니다. 이 구절은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마태는 ‘긍휼’ 곧 ‘자비’라는 단어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며, 그 분을 잘 따르는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후에 세관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마침 세관에서 “마태라는 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참조하면, 마태는 세리였고 본명이 레위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에 바칠 세금을 거두었고 정한 세 이상을 거두어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아주 싫어하고 멸시했습니다. 죄인 중에서도 아주 지독한 죄인을 보면 ‘저건 사람도 아니야’라고 말합니다. 당시 세리가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에 ‘세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 로마에 빌붙어 살아가는 매국노, 정직하지 못한 더러운 놈, 탐욕에 빠진 죄인으로 취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자신의 소명 사건을 회고하면서 예수께서 마태라 하는 “사람”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르실 때, 한 인격으로 대우해 주셨음을 생생하게 기억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더러운 죄인이라는 선입관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직업과 과거 때문에 사람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껏 마태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은 그를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외롭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다른 이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셨고, 아무 조건 없이 제자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은 마태를 향한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 곧 자비였습니다.

마태는 “나를 좇으라”하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합니다. 관련 영화를 보면 마태가 돈 자루를 한 번 쳐다본 후에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마태의 삶은 돈을 좇아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이겠지요. 사실 마태는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수한 비난과 멸시를 받을지라도 돈을 추구하며 세리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돈을 좇기보다 예수님을 좇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 결단은 안정된 직장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기꺼이 결단합니다. 이날의 결단은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어놓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태의 결단력에 놀랍니다. 대단한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마태의 결단력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절망합니다. 제자로 살기 위해서는 마태처럼 단오하게 결단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그만한 결단력이 없는 자기는 예수님을 제대로 좇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술과 담배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에 못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 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엇을 결단함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태가 세리의 삶을 지속하고 있을 때, 말하자면 여전히 담배피우고 술 마시고 있을 그 때에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결단도 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마태가 결단했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먼저 제자로 불러주셨기에 마태가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먼저 있었고, 그것을 마태의 지성이 깨닫고, 감성은 감동하고, 의지는 결단하는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결단과 헌신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이전에 먼저 주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주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마태가 예수님을 좇을 수 없었을 것이고, 주님의 긍휼이 없다면 우리도 주님을 바르게 믿고 좇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자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을 통해 발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긍휼이 먼저 깨달아지고 감동된 후에야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결단하고 헌신하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결단하고 헌신하려는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먼저 잘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절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후에 마태가 예수님과 친구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세리 생활을 마감하는 마태의 송별회 같기도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11) 바리새인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대단히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로서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매주 이틀씩 꼬박꼬박 금식을 할 정도로 종교적인 열심이 많았습니다. 대단한 결단력과 실천력의 소유자인 셈이지요. 그들이 생각하기에 세리나 죄인들은 도무지 상종할 수 없는 존재들이며, 선택받은 하나님 백성에 도저히 포함될 수 없는 부류들이었습니다. 가급적이면 배척하고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 부류들과 예수님이 어울리는 보고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실망했습니다. 경건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죄인들과 어울리는 상종 못할 수준의 사람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12)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심을 병자들과 함께 있는 의원에 비유하셨습니다. 참된 의원이라면 병든 자를 배척하거나 비방하지 않습니다. 병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고쳐주기 위해 그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합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교제를 하신 것은 그들의 망가진 삶을 고쳐주시려는 긍휼의 표현이었습니다. 주님의 일방적인 긍휼을 입은 사람들의 누리게 될 풍성함이 가시화 된 것이 주님과의 식탁교제였습니다. 늘 지탄받고 멸시받던 세리와 죄인들은 한 인격체로 대해주시는 주님과 식사하면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우심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주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13a)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호세아 6:6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원래 제사란 도저히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죄인들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방편입니다. 제사 제도를 주신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제사도 있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미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다시 교제할 수 있는 방편을 고려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좋은 제물이 바쳐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죄인과 다시 교제 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 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제사의 근본정신은 긍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사의 근본정신인 긍휼은 잃어버리고 제사 자체만 열심히 드렸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제사 드리는 신앙’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 부지런히 결심하고 그 결심에 지키기 위해 열심을 내었습니다. 양념으로 쓰는 나물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계산해서 헌금 드리고, 부지런히 기도하고 구제 했습니다. 말씀을 달달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그런 열심히 있어야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런 열심히 하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바리새인들을 아주 모범적인 신앙인이라 생각고, 바리새인 자신들도 그렇게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근본적으로 잘못된 신앙생활을 지적하셨습니다. 긍휼이 없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남을 판단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자기들이 열심히 금식할 때는 금식하지 않는 자들을 판단하고, 자기들이 열심히 말씀 읽고 기도할 때는 말씀 읽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을 판단했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까지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이 주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긍휼을 원하시는 하나님’부터 배우라고 하시면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1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모든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자주 절망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자주 교만해지는 죄인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게 죄를 짓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속으로 은밀하게 죄 짓는 죄인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살지 못하는 죄인이 있는가하면, 거룩하지 못한 자들을 판단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도토리 키 재기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영접을 받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없이 바르게 신앙생활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지 못한다면, 객관적으로 훌륭한 신앙인처럼 보일지라도 자기 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밖에는 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나 가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서로에 대해서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내가 옳다고 해서 상대방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올바르다는 확신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기 때문에 상대방에게도 긍휼이 베풀어지기를 간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을 바르게 깨닫고 감성적으로나 의지적으로나 바르게 반응하고 있는 삶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시는 자비로 인해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단지 제사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배우는 삶, 하나님의 긍휼을 기뻐하고 즐기는 삶, 긍휼에 바르게 반응하슨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최동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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