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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갈, 벧엘, 여리고의 선지학교들 (왕하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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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교단의 총회 직영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76년 3월에 당시 동자동에 위치하고 있던 경향교회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는 경향교회도 개척된 지 겨우 몇 년도 채 안 되었고, 예배당도 '기독교 여성 절제회'라는 단체의 건물을 월세로 빌려 쓰고 있던 형편이었습니다.
  그처럼 셋집 살이 하는 교회에 겹으로 셋집 살이 하면서 시작된 고려신학교였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초라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아직 등사, 즉 파라핀 종이에 철필로 글을 쓰고 그 위에 잉크를 묻힌 롤러를 손으로 굴려 복사해내는 인쇄 방식이 흔했고, 저도 SFC 일을 하면서 그런 등사를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려신학교가 첫 번째 전형 시험을 칠 때, 국어 시험 문제지는, 물론 문제는 제가 낸 것이 아니지만, 바로 제가 직접 등사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볼품없이 시작되었던 고려신학교는 그야말로 성장일로의 가도를 달려 왔습니다.
  몇 번 장소를 옮긴 후, 1991년에 경기도 파주군에 수만 평의 부지를 가진 아름다운 캠퍼스를 세우게 되었고 오늘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학생에게 학비를 면제할 뿐 아니라 무료 기숙까지 제공함으로써, 신학생들로 하여금 오직 경건생활과 학문연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최선의 후원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운영되는 신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오직 고려신학교만이 그러합니다.
  또한 국내외의 유수한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신학공부를 하신 교수님들과, 또한 학생신앙운동 시절부터 본 교단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고 학위를 받은 교수님들이 함께 사역하기 시작함으로써, 교수진 역시 점점 더 알찬 진용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21세기에 필요한 신학교가 되고자 했던 웅대한 꿈이 벌써 눈앞에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 교단에 속한 교회들은 처음부터 이 신학교 후원을 위하여 전력을 다해 왔습니다.
  교단 산하의 모든 지교회가 매년 교회 경상비 예산의 3퍼센트를 의무적으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비로 납부하기로 하고 실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 고려신학교를 졸업하여 현장 목회를 시작한 선배 목사님들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운동입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각 교회마다 따로 고려신학교 후원회를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후원헌금을 드리면서 신학교 운영을 돕고 있는데, 이와 같은 후원회를 조직하는 교회 역시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결코 자랑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우리 교단의 교회들이 신학교 후원을 위하여 이처럼 일사불란하게 또 꾸준하게 잘 협조하며 정성을 다하는 것은 다른 교단에서 보기 힘든, 정말 멋진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처럼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그저 한 교단의 좀 유별난 모습 정도일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의미 깊고 또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과 함께 이 '고려신학교 주일'을 특별히 지키면서, 옛날 북조 이스라엘의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세워졌던 선지학교들을 되새겨 보면서, 왜 우리가 이 고려신학교를 적극적으로, 또한 전력을 다하여 후원해야 마땅한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고려신학교 후원은 종교혼합주의가 팽배하고 있는 조국 교계 내에 참된 복음진리를 지켜내는 일과 직결됩니다.

  본문 1절로 6절에 기록하기를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엘리야 선지자가 이제 곧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아 하늘로 올리움을 받으려 할 때의 일입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자기 후계자가 될 엘리사와 함께 "길갈"에서 출발하여 "벧엘"을 거쳐 "여리고"로 가는 장면이 여기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거기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번역한다면 '선지자의 아들들'이란 말이 되는데, 곧 '선지자의 제자들'이란 뜻입니다.

  이 '제자들'은 나중에 7절에 보면 여리고의 경우 50명이나 모여 있었고, 더 나중에 4장 이하에 보면 단체생활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이때 선지학교, 오늘날로 치자면 신학교를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도 한 군데도 아니고 세 곳에 일종의 분교들까지 세워진 상당한 규모의 선지학교였습니다.
  이 선지학교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세운 것이었고, 이제 곧 엘리사 선지자가 이어받아 운영하게 될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 선지자는 어떤 동기로 이 선지학교를 세우게 된 것이었습니까?
  그것도 한 군데도 아니고, 그 별로 크지도 않은 땅에 세 군데에서나 말입니다.
  오늘 같으면 그야말로 '신학교 난립'이란 비난 듣기 딱 좋을만한 일인데, 왜 엘리야는 그렇게 좁은 지역에 여러 개의 선지학교들을 세웠던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당시의 북조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비추어 볼 때 그 대답을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최악의 길을 치닫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우상 숭배자인 이방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하나님과 금송아지 우상을 함께 섬기는 혼합종교로 이미 타락해 있던 북조 이스라엘은, 그 이세벨이 들여온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설상가상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와중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저 유명한 '갈멜산의 제단'을 통하여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 계신 참 신이심을 증거해 보이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 선지자들을 진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모든 것이 순탄치는 못했습니다.
  이세벨은 더욱 악독하게 나왔고 엘리야는 목숨의 위협을 느껴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호렙산에서 '세미한 소리'로 나타나셔서 그를 격려하시고 끝까지 진리와 사명을 위해 싸울 것을 명하셨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 직후에 엘리사를 만나 그를 제자로 삼게 됩니다.

  이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학교들은 바로 이때를 즈음해서 설립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갈멜산 사건이 있었던 당시에 오바댜란 숨은 성도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나타나서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 '일백 인'을 몰래 숨겨 먹여 살려 왔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어쩌면 그들이 이 선지학교의 제1기 생도들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엘리야 선지자는 그런 이방 우상 종교, 혹은 금송아지 숭배의 혼합 종교들과 본격적으로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서는, 이전에 갈멜산에서 했던 것처럼 자기 혼자서만 해서는 안 되고, 이제 이 진리 사수 투쟁에 뜻과 힘을 같이 할 참된 선지자들을 많이 키워내기 위해서는 선지학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사무엘 선지자가 자주 사역했던 길갈, 당시 금송아지 숭배의 중심지인 벧엘,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까운 요지인 여리고 등을 골라서 선지학교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이 곳 선지학교에 있던 선지생도들은 모두가 하나 같이 이제 곧 엘리야 선지자가 승천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영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즉 엘리야의 선지학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참된 진리를 선포하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온 나라가 우상과 이단으로 가득 차 있는 가운데서도 바로 이 세 선지학교들이 세워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리가 바로 보존되어지고 하나님의 계시가 밝히 선포되어지고 되었던 것입니다.

  고려신학교 역시 그와 꼭 같은 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선지학교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시작될 때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금송아지'와 '바알'의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소위 토속신앙이라는 것들과 결탁된 기독교는 일찍부터 기복주의적 사이비 이단들을 만들어내었습니다.
  일제 때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시작된 자유주의 신학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이 나라의 기독교계를 영적으로 더더욱 혼탁하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소위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단의 목사들까지도 자유주의적 교회들과 장로교 통합운동을 함께 전개하는가 하면, 천주교의 이단성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가르치기는커녕 강단에서 '테레사 수녀'를 칭찬하는 등 어처구니없는 꼴들을 보이고 있는 현실입니다.

  조국의 교계에 이처럼 횡횡하고 있는 우상숭배와 혼합종교를 대항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바른 진리를 목숨처럼 지키는 신학교의 존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물론 그처럼 성경 중심의 참된 신앙, 깨끗한 개혁주의 신학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신학교가 고려신학교 하나뿐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참된 신학교들을 당신의 필요에 따라서 이 땅의 여러 곳에 세워 놓고 계십니다.
  하지만 고려신학교는 그 중에서도 휴전선을 바로 지척에 둔 가장 북쪽에 세워짐으로써 조국 통일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또한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에 교통적으로 편리한 요지에 세워짐으로써, 조국과 세계를 향한 진리의 등대가 될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신학교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이 조국의 기독교계 안에 섞여 있는 금송아지 추종자들과 이단 교파들과 혼합종교 운동에 대하여 항상 그 입장이 분명하고 소리가 뚜렷한 신학교는 바로 고려신학교인 것입니다.

  대한민국에 수많은 신학교들이 있지만, 사이비 교단과 자유주의 신학과 천주교의 이단성에 대하여 문제가 발생하고 사건이 터질 때마다 즉시 개혁주의 신앙의 성명서를 내면서 진리 투쟁의 선두에 섰던 것은 바로 고려신학교였습니다.
  실로 이 학교는 이 나라에 난립된 많은 신학교들 중에 하나가 결단코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셔서 세우신 선지학교인 줄로 깨닫고, 이 고려신학교를 후원함으로써 이처럼 조국의 기독교계 내에서 복음 진리를 깨끗하게 사수해 내는 귀중한 사역에 더욱 힘써 동참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고려신학교 후원은 선배 순교자들의 대를 잇는 신실한 복음 전도자들을 파송하는 사역으로 직결됩니다.

  7절 이하 14절 말씀에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대로 엘리사는 자기를 그만 따라오라고 뿌리치는 엘리야 선지자를 끝까지 붙들고 따라갔습니다.
  왜 엘리사가 그처럼 고집을 부렸습니까?
  그의 심정에는 정말 간절한, 정말 절실한 한 가지 소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엘리야 선지자에게 있던 영감보다 '두 배 더 많은' 영감을 엘리사가 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 말하는 "갑절"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어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유산의 몫'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의 그와 같은 말은 바로 자기가 엘리야 선지자의 영적 장자가 되어서 그 엘리야와 꼭 같은 신앙과 능력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런 엘리사의 실제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승 엘리야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엘리사의 곁을 곧 떠날 형편에 있었습니다.
  엘리사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도 하고 또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 또한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엘리야 선지자는 그야말로 "내 아버지" 즉 자기의 영적 스승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 즉 이스라엘의 존망을 좌우할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 위대한 선배 선지자가 이제 세상을 떠나려는 때에, 엘리사는 바로 그 엘리야의 영력을 이어받을 후배 선지자가 꼭 필요함을 절감했습니다.
  즉 엘리사의 그와 같은 요청은 결코 개인 욕심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조국의 장래를 생각할 때 그 무엇보다도 엘리야 선지자의 그와 같은 영력이 여기서 끊기어서는 결코 아니 되겠다는 실로 간절한 자각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사의 소원을 두고 엘리야 선지자가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라고 한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은 엘리야 스스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만약 하나님께서 자기를 하늘로 취하여 가시는 것을 엘리사가 볼 수 있게 되면, 하나님께서 엘리사의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실 징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실제로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목도하게 됨으로써 그 소원은 성취되었으며, 그것은 그가 엘리야의 겉옷을 가지고 요단강을 쳐서 건너가게 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입증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주셨던 신앙과 영력과 사명감과 능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던 것입니다.

  고려신학교 역시 바로 우리의 위대한 선배들의 신앙과 생활, 그 정신과 사역이 1대로 끝나버리지 않고 이 조국에 오고 올 후배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세워진 선지학교입니다.
  우리는 정말 훌륭한 선배들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까?
  100년 밖에 안 되는 이 짧은 기독교 역사를 가지고서도 이처럼 조국 교회가 크게 성장한 것은, 초기의 신앙 선배들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훌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파송된 초대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들의 순교의 피와 함께 이 땅에 뿌렸습니다.
  조국에 기독교가 조금 자리를 잡게 되자 말자 일제의 탄압과 함께 신사참배라는 우상숭배와 한바탕 큰 전투를 치렀고, 해방의 기쁨도 잠깐 곧 공산주의라는 이 엄청난 무신론 세력을 대항하여 연이어서 피투성이의 영전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배 목사님들은 그런 힘든 전쟁들을 둘 다 이겨내었습니다.
  온갖 환난과 박해와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저 엘리야의 '갈멜산의 승전'에 조금도 못지않은, 너무나도 멋있는 승리를 거두셨던 것입니다.

  그런 순교자의 정신이 이 조국 교회의 미래에 끊기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순수한 신앙이 '출옥성도라는 영광을 등에 없고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이라는 냉소 한 마디에 의하여 완전히 가리어져도 좋다는 말입니까?
  그런 결백한 신앙이 '분리주의자'라는 어처구니없는 판결, 일제의 우상숭배에 가담했던 진짜 배교자들의 주객전도격의 비난에 의해 파묻혀버려도 괜찮은 것이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영적 '아버지'로 모시기에 더 이상 바랄 수 없을 만큼 훌륭하신 선배 목사님들, 문자 그대로 자신의 피로써 이 민족을 우상숭배와 무신론으로부터 지켜낸 이 조국의 '병거와 마병' 되었던 순교자들을 두고서, 그 자손들이 그분들의 '영감을 갑절로' 이어 받으려 하기는커녕 이렇게 함부로 매도해도 정말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몰상식한, 실로 염치없는 짓일 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가 약하고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가 짧아서 그렇지, 객관적으로 볼 때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그야말로 전 세계의 교회사에 길이 남기에도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는 위대한 '아버지'들이요 '선지자'들이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신앙을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빼앗길 수 없는 '갑절의 유산'이요 특권일 뿐인 것입니다.

  고려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들과 선교사님들이 바로 그런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지금도 이 땅의 구석구석과 온 세계 땅끝을 향해 힘차게 사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데려가신 선배 순교자들의 가슴에 타오르고 있던 구령과 구국의 열정은 바로 이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다음 세대의 '엘리사'들에게 그대로 전수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려신학교는 이처럼 귀한 영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선지학교인 것을 깨닫고 더욱 힘써 후원함으로써, '엘리야'의 영감과 능력의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차세대의 복음 사역에 '병거와 마병'으로 쓰일 큰 일군들을 조국과 세계에 계속 파송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님 여러분, 이 2장 끝부분의 23절부터 25절에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젊은 아이"라는 말은 '어린 아이'도 될 수 있고 '청소년'도 될 수 있는 말이고,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은 좀 더 실감나게 번역하자면 '대머리야, 꺼져 버려라.'는 욕입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그들을 향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했고, 그러자말자 곧 수풀에서 암콤 두 마리가 나와서 그들 중 사십 이명을 찢어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참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사건입니다.
  '뭐 애들이 그 정도 놀린 것 가지고 너무 심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아이들의 철없는 장난 정도로 여길 사건이 아닙니다.
  아까 잠시 언급했듯이, 벧엘은 당시 금송아지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 동네에서 자란 아이들이었으니 그들은 평소에도 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지극히 깔보고 있었습니다.
  즉 당시 금송아지와 우상 숭배에 빠진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배역하고 그 말씀을 우습게보고 있었는지를 그 아이들의 조롱이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개인적으로 모욕을 받았다는 감정 때문이 결코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조롱하고 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저주한 것이었고,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즉석에서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다른 이방 나라도 아닌 바로 이스라엘 안에, 아브라함을 위시한 위대한 신앙의 선조를 모셨던 이스라엘 안에, 출애굽을 체험하고 십계명 돌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안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와서 다윗과 솔로몬에 이르러 최고의 신정 국가를 이루었던 바로 그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의 선지자를 조롱하는 젊은 세대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북조 이스라엘이 망국의 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겠습니까?
  선지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곧 그 선지자가 선포하는 계시의 말씀을, 그 선지자를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그 계시와 영감의 주(主)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가볍게 보는 교인은 이미 참된 신자일 수가 없으며, 선지생도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교회는 이미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는 '고려신학교 주일'이란 이름으로 이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웬만큼 다른 교회에서 교회생활 오래 해 보신 분이라 해도, 무슨 신학교를 위해서 특별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아마 상당히 생소하게 보이실 것입니다.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의무적인 후원금을 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특별 후원회를 교회마다 각각 조직해 놓고, 게다가 주일까지 하나 따로 구별해서 지키고 있으니, '참 별난 교단도 다 있구나.'라는 생각도 어쩌면 들 것입니다.

  선교 사업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는 많지만, 신학교 후원 역시 선교 후원 못지않게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이처럼 강조하고 실천하는 것은 사실 좀 별나 보일 수는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올바른 일입니다.
  아니 신자와 교회가 꼭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대한 일입니다.
  아니 꼭 해야만 할 필수적인 의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는, 성경의 참 진리를 선포하며 가르치는 사령부 역시 꼭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은, 이처럼 이단과 자유주의를 대항해서 싸우는 진리의 요새를 지키는 일이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지상(至上)명령인 선교 사업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처럼 선교의 최전선에 나갈 복음의 장교들을 배출해 내는 사관학교 역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은, 앞서 가신 순교자들, 이미 빛나는 승리의 전적을 남기신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는 미래의 복음의 전사들을 양성하는 일이 됩니다.

  고려신학교를 후원하는 것은, 이처럼 조국 기독교계라는 공간 안에서 진리를 비진리로부터 구별하여 지키는 성별사역인 동시에, 과거의 정통신앙을 미래로 연결하는 시간적인 신앙계승운동이 됩니다.
  이처럼 선지학교를 후원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는 주의 종들을 귀히 여기고 이들을 더욱 정성껏 모심으로써,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상에 동참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해 왔듯이 앞으로도 이 고려신학교를 귀히 여기고 위하여 기도하며 더욱 힘을 다해 후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진리 수호와 선교 사명에 체험적으로 자신의 삶을 함께 헌신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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