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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상하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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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에 미용실을 운영하시는 새 가족이 있습니다. 그분은 미용실을 시작하면서 주일에는 문을 닫기로 하였습니다. 그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좋다는 주위 사람들의 권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좀 힘들더라도, 손해를 보더라도 주일을 지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복된 길임을 깨닫고 주일에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손님 중에는 주일에 머리 손질을 하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분이 주일 오후 3시에 머리를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주일에는 안 된다고 하는데도 계속 요청을 하였습니다. 주일 오전에는 예배드리고 오후에는 문을 열면 되지 않느냐고 하면서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님은 갈등을 느끼면서도 그분과 약속을 하였고 약속대로 주일 오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약속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우리 성도님은 이것을 주일에는 문을 닫으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얼마 후에 또 한 분이 주일이 머리 손질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성도님은 또 다시 갈등을 느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갔더니 이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다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왕에 믿으려면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켜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에 성도님은 알았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주 토요일 아침에 주일에 오겠다던 손님이 일찌감치 머리를 하러 왔습니다. 그 손님은 주일 밖에 시간이 없다고 하여 시간까지 약속을 했던 손님이었습니다. 성도님은 저를 만나고 주일을 온전히 지키기로 작정을 하였고, 손님과 약속한 주일에는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기려고 했었습니다. 그랬던 손님이 토요일에 미리 왔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성도님은 다시 한번 주일을 온전히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상하신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새가족인 성도님에게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이 좌우되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런 문제로 성도님이 고민할 때 하나님은 자상하게 답을 주셨습니다. 저로 하여금 시의적절하게 심방하여 상담하게 하시고, 두 번씩이나 주일에 약속하였으나 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자상하신 배려와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상하신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2장 6-7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들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아멘. 이것은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머리털까지도 세실 수 있는 자상한 분이십니다. 하찮은 참새까지도 돌아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참새보다 훨씬 귀한 사람에게는 더 자상하신 하나님이십니다.

A. 자상하신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조급함으로 원망하지 말라

그런데 자상하신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성도들은 조급함으로 원망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이사야 40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원망을 하였습니다. 2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원망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상하게 응답하실 때가 있고, 어떤 때는 침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님의 침묵에는 깊은 뜻이 있음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졸고 계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곳에 계시고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실 때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잊으시지 않으셨으며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조급하게 원망하지 말고 차분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려야 합니다.

B.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우리는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로 인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라가 망하는 비통함과 포로생활의 고통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슬퍼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침묵하셨으니 오죽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망하기에 앞서 먼저 해결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포로생활은 우연이 아니라 죄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죄악으로 인한 징계요 하나님의 침묵이므로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이사야59:1-2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먼저 죄의 해결할 죄의 문제가 있는지 돌아보는 것이 참다운 지혜입니다.

C.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습니다.”(전도서3:2-8).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어야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메시야의 예언도 때가 차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70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포로가 되기까지 약 50년 동안에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죄값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70년이 차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때가 찰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D.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

또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더라도 전능하신 창조주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6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이는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능력에 견줄만한 존재는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은 너무나 신비합니다. 우리의 심장에 연결된 혈관도 펼쳐 놓으면 그 길이가 지구의 반 바퀴에 이를 정도라고 합니다.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 이상을 고동치며 피를 온 몸 구석구석에 보내주는데 그 피가 한 바퀴 돌아오는데 13초가 걸립니다. 이 피리가 흐르는 속도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속도와 비슷합니다. 심장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상하신 하나님은 심장이 1초에 15분의 4초는 쉬게 하셨습니다. 하루에 5시간 반 정도는 심장이 쉬고 있습니다. 얼마나 섬세하시고 자상하신 하나님의 배려입니까? 우리를 창조하시고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분이심을 믿으십시오. 28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나 능력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침묵하셨으나 결국 애굽에서 고통당하며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동안 졸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큰 민족이 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야 할 환경도 만드셨습니다. 백성을 이끌 지도자를 키우셨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동안에도 능력으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똑같은 능력으로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독일이 좌우로 나뉘어 이념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때의 일입니다. 동독의 한 공산주의자 선생이 자기 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라고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교육을 철저하게 받은 한 여덟 살짜리 소녀가 완강하게 거부하였습니다. 아이는 심하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은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공산주의자 선생은 화를 내며 “하나님은 없다”를 50번 써오라는 숙제를 냈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하나님은 계신다” 라고 50번 써서 제출했습니다. 선생은 더욱 화를 내며 이번에는 “하나님은 없다”를 500번을 써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 소녀의 아버지는 아이를 데리고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아이가 당하는 어려움을 호소하며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를 듣고 난 교장선생님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너희 선생님은 지난밤에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단다. 그런데 너무 심하게 다쳐서 살 가망이 없다.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F.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기다리라

이제 마지막을 본문의 말씀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31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할렐루야!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소망을 갖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큰 힘을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어려운 세상을 이기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만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주실 때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복음전도자로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이 힘 주셔서 이길 수 있었다는 신앙적인 고백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기 위해서 웃음을 찾습니다. TV에서도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높습니다. 또 웃기는 리더가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사실 웃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웃음은 엔돌핀이 솟게 하고 치료의 효과도 크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웃음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웃음보다 몇 천배 강력한 것이 하나님의 힘에 의한 감동입니다. 성도는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동받을 때 영육 간에 훨씬 큰 힘을 얻습니다. 성령의 감동은 인격도 변화시키고 어려운 환경도 극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덴마크가 전쟁에 패하게 되자 나라가 혼란에 빠졌습니다. 많은 부녀자들이 매춘부가 되었고 남자들은 술주정뱅이가 되어 길거리를 누비고 다니며 술주정이나 하는 비참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른트비 목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을 듣고 일어났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믿음의 힘을 강조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힘보다도 믿음의 힘이 자신들을 구원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지런히 믿음을 외쳤고 백성들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어려움을 극복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시나니 그 어떤 어려움도 이기고 승리할 줄 믿습니다. (황광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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