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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3.1절] 진정한 자유 (렘 7:1~7, 갈 5:13~15, 요 8:3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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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오늘이면 함께 삼일절 기념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은 86년 전 저희 선조들이 하셨던 3.1운동의 이야기 중 한 가지를 되새겨 보려고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나라를 빼앗기고 정부도 없으며 사회 구성체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 속에서 살아남게 되는 조직이란 식민지 정부가 손을 대지 못하는 종교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신앙 단체까지는 식민지 정부가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결국 민족의 여러 지도층은 종교라는 이름 하에서 독립운동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경우에도 기독교와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이 주도자로 나서서 33분의 대표를 세웠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으며 3.1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민족의 지도자들이 유일하게 남은 집단체인 종교 단체들의 소속원으로서 일을 했으리라고 짐작이 갑니다.

3.1운동을 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마련하고 전국적인 독립의 불길을 일으켰을 때, 마지막 순간에 기독교 대표와 천도교 대표가 손을 잡고 마지막 서명을 했었습니다. 천도교를 대표했던 분은 손병희 씨였고, 기독교를 대표했던 분은 오산 학교를 만드셨던 이승훈 장로님과 이승만 대통령 때에 부통령을 하셨던 함태영 목사님이셨지요. 이렇게 세 분이 만나서 독립선언서를 함께 작성하고 운동을 함께 하기로 최종 결정했던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천도교와 기독교가 합의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기록에 의하면 천도교에서는 독립 선언서 초안을 작성하고 출간하며 이를 일본 총독부에 전하는 일을 책임졌다고 합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 선언문을 전달하고, 또한 일본에 직접 교섭사를 파송해서 이를 전달하며 지방, 서울에 배포하고 거사 당일에는 시민과 학생, 교인들을 총동원하는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결국 기독교는 들어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교인과 시민, 학생이 서로 동원이 되어 일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가장 앞장 설만한 현실적인 공동체였던 것이며 우리 민족에 뿌리깊이 남아있던 천도교가 이 일에 함께 했었던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위기를 당했을 때, 종교와 소속을 초월하여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함께 뭉쳤던 역사적 사건. 이것은 86년 전의 일만이 아닙니다. 다가오는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 민족에 위기가 있다면 종교인들이 다 모여서 민족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이 민족에게 임하는 하늘의 뜻을 각 종교마다 깊이 인식하고 전파할 수만 있다면 3.1절 기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하나로 뭉쳤던 역사적 사건을 귀감으로 삼아서 민족의 위기 때에 모두 함께 나서야 합니다. 그런 후에 각자의 신앙대로 우리 스스로 구원의 역사를 펼칩시다.

이런 결단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만약 지금이 3.1운동을 주도했던 때만큼 위기라고 생각된다면 우리는 한 번쯤 심각하게 이 일의 추진을 고려해봐야 할 것입니다. 물론 위기란 상황마다 시대마다 그 성격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먼저, 3.1운동 당시의 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3.1운동 당시의 위기는 어떻게 해서든지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를 옭아매었던 식민지라는 족쇄에 대해서 항의하고 저항하여 자유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자유케 했으니, 자유를 잃지 말아라. 우리 인간들을 얽어매고 있는 온갖 족쇄들을 풀자. 그러나 풀기 위해서는 족쇄에 대해서 저항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족쇄가 개인이 범한 죄이던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체제이던지 또는 우리 사고방식이 되었든지,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옭아매고 식민지화하고 누르는 족쇄라면 그에 대해서 반드시 저항을 해야 합니다. 저항이 없이는 자유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86년 전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은 식민지에 이렇게 저항하는 방식으로 자유를 얻고자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위기는 무엇입니까. 86년 전과 지금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때처럼 식민지 상황에 살고 있지도 않습니다. 독립된 나라와 독립된 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저항할 위기가 없으니 86년 전에 저항했었던 자유를 송축하고 기념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될까요.

예수의 말씀입니다. 자유에는 죄와 악에 대해서 저항하는 자유도 있지만, 자유인이 되었을 때 누려야 할 또 다른 자유가 있습니다. 그 자유는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평화와 독립의 자유가 육체의 정욕으로 타락하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순종할 수 있습니다. 파괴하는 자유도 있지만, 다시 세우는 자유도 있습니다. 우리가 식민지에 저항하는 자유도 있지만, 독립국가로서 새롭게 자유스러운 나라로 서기 위해서 세우고 만들고 생산하고 건설해야 하는 자유도 있습니다. 오늘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이 땅에는 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자유를 주는 여러 가지 사회 단체와 시민운동들이 있습니다. 이제 이들과 함께 우리는 세우는 자유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파괴하고 저항하는 데에는 용감했지만 세우고 건설하는 데는 약했던 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86년 전을 송축하고 있는 지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세우는 자유에 대해서 강조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유대백성 여러분이여. 여러분은 다시 한 번 진리 속에 들어와서 진리를 머금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유대백성들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가 언제 하나님 나라의 종노릇 한 적 있습니까. 다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도 예수 그리스도라 이름하는 하나님 아들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만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시는 구원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전통과 율법을 따라서 유대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택한 나라의 시민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보시니 이제 그 율법은 족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의 족쇄에서 풀려나 자유롭고 정직한 결단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길을 주시려고 했지만 유대 백성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유대백성 여러분. 여러분은 유대에 주신 하나님의 성전에만 오면 다 자유인이라고 생각하셨죠. 율법을 지키면 자유인 줄로만 알았지요. 그리고 선민으로 사는 것을 자유인의 특징으로 생각하셨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진실로 자유함을 받은 사람은 그 행실을 참되게 살아야 합니다. 진실로 성전에 속한 사람은 이웃끼리도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나그네와 고아를 업신여기거나 억압하지 말고 사랑으로 안아 주어야 진실로 자유한 것입니다. 죄 없는 자를 율법의 이름으로 살해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독립된 오늘날에 세워야 할 자유에 대하여 이야기해주는 복음입니다. 이제 이 복음을 살찌게 만들고 아름답게 세워가십시오. 세우는 자유가 벗어나는 자유만큼 중요한 시기입니다. 진실된 삶을 살아가는 자유가 죄에서 구원받은 자유만큼 중요한 시점입니다. 주님의 성전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죄악을 벗고 자유함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여러분은 그걸로 자유인이 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이웃과 나그네와 하나님과 함께 행실을 통해서 자유를 매일같이 세우고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예수께서 위의 말씀을 하시던 당시에 유대 모든 백성들은 신분상으로 종이었고 로마시민은 자유인이었습니다. 체제상으로 종과 자유인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자유케 하리라 말씀하셨을 때에 모든 유대인들은 식민지 체제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나 보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모시기 원했습니다. 예수가 독립의 주동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에는 부응하지 못한 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때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제 십자가에서 이 세계의 모든 분들께 정치적 억압, 경제적 속박, 마음의 족쇄 등 모든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드립니다. 그 대신 세워가며 만들어가며 창조하는 자유를 부활의 은총으로 여러분이 누리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그 당시 유대땅과 헬라땅에서의 해방의 욕구를 실현시켜주지는 못하였지만 우리나라에서 훨씬 더 많은 실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천민이라 이름하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대대로 머슴살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 천민, 상놈이라 불리던 그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제일 먼저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되었던 보물들이 되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체제를 없앴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종과 노예 관계가 없어지면서 제일 먼저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고 확신합니다.

로마 당시에는 로마 시민만 자유인이었으나 지금은 모두가 자유인입니다. 지금은 신분계급 제도도 없으며 우리 모두가 다 자유인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자유인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품고 사는 우리들에게 지금의 자유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저항하고, 깨고, 부수고, 탈출하는 자유는 이루었으니 이제는 세워야 합니다. 세웁시다. 진실된 자유를 세웁시다. 어떻게 세우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 방법까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있는 자유가 진실된 자유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유는 다시금 족쇄가 됩니다.

오늘의 갈라디아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이 자유함을 얻었으니 그 자유를 진실로 즐기기 위하여 사랑을 하십시오. 그렇다면 왜 사랑을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 자유를 보증받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자유의 보장책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 권력, 이념, 체제, 사회적 신분 등이 자유를 영원히 제공해줍니까 아니면 족쇄로 만들어 줍니까. 사람이 만든 그 무엇도 여러분의 영원한 자유의 받침대가 되어주지 못합니다.  진실로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는 분은 당신을 위해서 몸까지 버리고 죄악을 사해주고 부활의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밖에는 없습니다. 그 분께서는 사랑이라 이름하는 헌신의 자유를 베푸십니다. 그 분께 오면 자유인이 되게 하십니다. 부활의 능력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항상 선이 있으며 악이 있습니다. 악에 속하는 자유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결국 망하게 되는 자유이고, 선에 순종하여 사랑함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에게도 스스로 결단해야 할 선과 악의 구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면 우리는 죄와 악에서 해방되는, 자유인이 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여러분은 평생 자유인입니다. 평생 자유인이 되고 싶다면,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를 누리고 살고 싶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를 속박하지 않고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부자유하단 말입니까. 이는 세례받고, 성만찬에 참여하고, 교인된 지 오래되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부자유한 사람이란 말입니까 하는 것과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매일매일 당신 속에 살아 움직여야만 합니다. 당신의 생활과 행실 속에서, 이웃과 정직하게 관계를 이루는 속에서, 끊임없이 예수의 말씀이 있어야 자유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전에 속하고 세례받고 교인으로 등록된 것만 가지고는 자유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매일같이 살아 움직이는 자유로 사십시오. 성령이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약속을 마음에 담고 민족의 3.1절을 다시 한 번 지켜가십시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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