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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조건 (요 15: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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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생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축복스러운 이름들을 주셨는데 그것은 가정의 경우 아버지, 어머니, 아들과 딸, 형과 동생, 누나, 오빠 같은 이름들입니다. 이런 이름들이 가정을 빛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고 즐겁게 합니다. 사회적으로는 선생님, 제자, 선배, 후배, 교수, 학자나 박사, 사장, 회장 등등의 이름인데  그 중에는 ‘친구’라고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이 친구라는 말은 사회적 피조물로서의 인간 상호관계를 성립시키는데 가장 적합한 이름입니다.

런던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에 대해서 현상 모집을 한일이 있는데 이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1, 2, 3등 세 대답입니다. 3등으로 당선된 대답은. “친구란 기쁨을 더해주고 슬픔을 나누는 자이다” 기쁠 때 만나면 기쁨이 더 커지고, 슬플 때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지는 자, 기쁠 때에 만나면 내 기쁨을 함께하고 기쁨을 극대화 해주는 사람 그가 친구입니다. 또 2등으로 당선된 것은 “친구란... 한 보따리의 동전이다” 그저 내 모든 사정을 다 이해하고 동정하는 바로 그가 친구입니다. 그리고 1등으로 당선된 대답. “친구란 온 세상이 나에게서 떠날 때 다 나를 버릴 때 내게로 오는 자가 진정한 친구다”

미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웹 박사는 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내가 남의 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사정을 깊이 이해하면서 내 먼저 좋은 친구가 되려고 노력할 때만이 또 다른 사람도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인데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밀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비밀이 있지만 친구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또 비밀이 없어야만 친구입니다. 이 사이만은 완전한 진실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거짓말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만이 친구의 정을 지속하는 아주 중요한 조건이 되며, 세 번째는 평등의식입니다. 봉건주의적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영원히 친구가 없습니다. 너와 나는 똑같다. 지위가 높든 낮든, 학벌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건 적건, 심지어는 남녀 어른 상관없고, 문제는 나와 너는 똑같다는 평등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친구가 있습니다.

스티븐 존슨 박사는 이렇게 친구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금방 부를 수 있는 친구, 당장 달려올 친구가 있는가? 없다면 당신은 친구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내가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는가?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내가 기쁜 일이 있을 때 찾아 가서 붙들고 이야기하면 그래 그래 그거 참 좋겠다. 아무 시기나 질투가 없이 내 기쁨에 동참해 줄 사람이 있는가? 그래야 그가 친구입니다. 그러나 내 기쁨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그는 친구가 아닙니다. 또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선뜻 내게 돈을 빌려주고 만일에 저가 없으면 믿고 다른 사람에게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빚을 갚아주고 내 어려운 사정을 도와줄 사람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하여 긍정적 대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요, 당신 자신이 좋은 친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랑하는 제자들을 앞에 놓고,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을 지금 최고로 최고의 지위로 우대하는 시간입니다.

오늘 본문에“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했는데 친구란 누군가가 먼저 주도적으로 출발을 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내게 친구 되어 주기만을 바라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친구 못 만납니다. 내가 좋은 친구가 먼저 되어야만 가능합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 주도적으로 내가 너를 사랑했다. 택했다. 먼저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유대인의 격언 중에 친구에 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친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첫째는 음식과 같은 친구로 매일 빠져서는 안 되고, 둘째는 약과 같은 친구로 이따금 있어야만 하고, 셋째는 병(病)과 같은 친구로서 이를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자기 선언을 보게 됩니다.“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라고 하였습니다(요 15:15). 여기‘친구’라는 말 ‘필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육적인 우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저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켜“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1:11). 이때에도 필로스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사로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낼 때는‘필레인(filein)’도 사용하고(요 11:3) ‘아가판(ajgapa'n)’도 사용하였습니다(요 11:5). 이것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간적인 우정의 친구인 동시에 또 신적인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라고 하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친구 예수'의 참된 우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찾아주신 친구 예수

구약성경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나의 친구, 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야고보서 2장 23절에“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라고 하였고. 이사야 41장 8절에“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라고 하였고, 역대하 20장 7절에“주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아브라함 편에서는 상상을 불허하는 하나님 편에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을 자기의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어찌 아브라함 편에서‘하나님은 나의 친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 편에서 나사로를 가리켜“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 편에서 우리를 자기의 친구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편에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자신의 친구로 선언하고 말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요?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에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죄인의 친구 예수

누가복음 7장 34절에“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라고 하였고, 누가복음 15장 2절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일 뿐 아니라 죄인을 영접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죄인의 친구 되신 예수는 죄인과 함께 먹을 뿐 아니라 죄인의 집에 유하기 위해 들어가셨고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였습니다(막 2:17). 바로 여기에 예수의 매력이 있고, 특이성이 있고, 유일성이 있고,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죄인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목숨을 버린 친구 예수 

요한복음 15장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참된 친구, 영원한 친구가 되어주신다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지 않으시면,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하여 그 죄 값인 사망을 지불하지 않고는, 결코 우리가 그와 함께 하거나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로 만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대속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막 10:45).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친구로 영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실로 값비싼 예수의 목숨이 지불된 결과, 우리는 그의 친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데는 예수의 목숨이 지불되었습니다. 그 값은 은이나 금이 아니고,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친구가 되는 조건

예수님은 요한복음 15장 14절에“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고, 15절에서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님과 우리 성도들과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 우리는 "그의 양"이라고 했고,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예수님은 "남편" 우리는 "그의 아내"라고 했으며 예수님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고 불러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불러주실 때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아무나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에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고 하였는데 즉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는 사람만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천국 시민처럼 살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5,6,7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천국 시민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본문 12절에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전도의 명령입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물론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명령을 순종할 때 주님의 친구로 삼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구로 불러주신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13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는 친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외로울 때 위로해 줍니다. 친구는 친구가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하여 줍니다. 친구는 자기의 하는 일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라고 불러주신 아브라함에게 비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8:17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친구인 너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이유

본문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로 택하여 주신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는 이유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태3:8에 보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열매를 맺을 뿐 아니라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말씀은 계속적으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추수하면 추수한 알곡을 다 먹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종자를 남겨 둡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에라도 종자 씨는 먹지 않아야 봄에 다시 씨를 뿌릴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한 번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가 항상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전도의 열매도 한 번 전도하여 열매를 맺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계속적으로 전도의 열매를 맺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교회가 계속하여 성장하고 성숙해가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

우리를 친구로 선택하여 주신 것이 기도의 응답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 되신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이루어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친구가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친구가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14:13-14에서도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너무나도 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고, 줄곧 같은 학교를 다녔던 죽마고우였습니다. 군대에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월남전이 터졌습니다. 둘은 같은 부대원이 되어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숱한 전투를 치루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러던 중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였습니다. 그 와중에 두 친구 중 한 명이 돌격 중에 적탄에 가슴을 맞고 한참 격전 중인 한 가운데 지점에서 쓰러졌습니다. 부상을 입고 헐떡이는 것을 본 다른 친구가 뛰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소대장이 팔을 붙잡았습니다. "김 일병, 저 애는 살려봤자 전투불능 상태야. 그리고 우리가 진격이나 퇴각할 때도 그는 짐만 될 뿐이야. 게다가 너까지도 위험해? 어줍잖은 감상은 집어치워."

그러나 그 친구는 신음하는 친구를 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소대장의 팔을 뿌리치고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의 정점을 향해 뛰어나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피범벅이 된 친구를 등에 업고 참호 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등에 업혔던 친구는 이미 죽어 있었고, 업고 온 친구 역시 여러 곳에 총탄을 맞아 숨을 헐떡이며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소대장이 소리쳤습니다. "내가 뭐랬어? 네 친구는 죽었어. 너 역시 큰 부상을 입지 않았나. 우리 소대의 전투력 손실도 마찬가지야! 그런 무모한 행동이 도대체 무슨 이득을 줄 수 있어?" 소대장의 다그침에 친구는 희미한 미소로 대신했습니다. 그리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큰 이득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제게 말하더군요. `네가 올 줄 알았어'라고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친구로서 이 세상에 다시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의 오심입니다. 그가 보혜사로 오셔서 조금도 비밀이 없이 우리에게 진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요 16:12, 13).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6:14).

친구 예수! 그는 먼저 나를 찾아주신 친구입니다. 그는 의인의 친구가 아니라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죄인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 우리를 죄 없는 친구로 살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영원한 친구가 되는 비결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친구 종교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구, 예수님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친구 종교입니다. 말하자면 멀리 떨어져 있는 종교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종교입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말하고, 함께 행동하는 친구 종교입니다. 서로 주고받는 친구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30배, 60배, 100배로 확대되고 확산되는 우주적 종교가 된 것은 바로 예수께서 그의 모든 백성을 친구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친구 예수, 영원한 친구 예수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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