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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라! (고후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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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한 마을에 포도주 가게를 경영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둘은 마차를 한 대 끌고 읍내로 포도주를 사러 갔습니다. 같이 마차 한 대를 가지고 가는 것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통으로 한 통을 샀습니다. 집에 가서 나누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추웠습니다. 한 사람이 주머니를 보니 마침 1.000원짜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여보게 지금 내가 추워서 그러니 자네 몫에서 한 잔만 팔게”... 그런 식으로 하여 집에 올 때까지 1.000원을 가지고 서로 사 마셨습니다.

집에 돌아와보니 포도주가 한 잔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얼큰하게 취하여 하는 말이 “우리는 정말 기적의 사나이 들일세. 단돈 1.000원을 가지고 포도주 한 통을 사서 마셨으니 말일세”.... 그들은 읍내 시장을 헛되이 갔다 온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1.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거리낌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거리끼다.”는 말은 “방해가 되다. 꺼림하다. 석연찮다. 말썽이 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직책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고후6:3)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거리끼다.”는 말은 “프로스코팬”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거리낌의 원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영어성경에는 “stumble, offend”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위반하다. 반칙하다. 감정을 상하게 하다. 화나게 하다. 비위를 거스르다. 불쾌감을 느끼게 하다. 실족케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 거리끼지 말아야 합니다.

받은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거리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온 세상과 온 인류에게 비취어야 합니다. 온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받아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네피림들과 장부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리끼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근심시켰고, 걱정을 시켜 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하나님을 근심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골칫거리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율법사들, 대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께 거리끼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13-18절에서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❶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❷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❸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❹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❺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❻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❼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서 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의의 태양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맛에 괴로운 세상이지만 웃으면서, 즐거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사람 앞에서 거리끼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서도 거리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한다든지, 남의비위를 상하게 한다든지, 이웃의 기분을 불쾌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3-5절에서 예수님은 “❶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❷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❸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❹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6-7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화가 있도가 실족케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들을 지나치게 간섭한다든지,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은 받은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15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2.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야 합니다.

생물은 생물답게 살아갑니다. 식물은 식물답게, 동물은 동물답게 살아갑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교인은 교인답게 살아야 하고, 성도는 성도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다면 성도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성도라면 성도답게 살아가는 것이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생활입니다.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 생활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군들은 하나님의 일군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군답게 살지 못하면 마귀의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하여”(고후6:4)라고 말했습니다.

1)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임을 스스로 “보여주고, 증명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 자신이 성직자임을 말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교회의 장로임을 말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납득을 시켜야 합니다.

자신이 어느 교회 직분자임을 말과 행동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증명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꾼임을 인정받지 못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짓밟히는 소금, 가리는 빛이 되고 맙니다.

2)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일꾼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사는 게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❶ 많이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의 특징은 많이 견디는 겁니다. 견디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꾼의 자격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들은“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 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고후6:4-5) 을 참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❷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고후6:6-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갑니다.

❸ 의의 병기를 들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➀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➁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➂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➃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➄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➅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➆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➇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6:7-10)라고 말했습니다.

3.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시대에는 성막이 하나님의 성전이었고, 사사 시대에는 산당이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다윗 시대에는 가정집이 하나님의 성전인 때가 있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졌습니다. 

1) 인간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유다의 바벨론 70년의 포로시대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불타버리고 없었습니다. 성전이 없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때에는 하나님도 지상에 발붙이고 생활하실 처소가 없으셨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스룹바벨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임재와 말씀의 상징이 없는 성전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시대를 약 400년으로 봅니다. 이때에는 스룹바벨의 성전이 있었지만 성전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중간기 시대는 ! 

❶ 바사시대(B. C. 430-332년, 98년간)가 있었습니다. 이 시대는 B. C. 430-332년(98년간) 이었습니다. 이때 유다는 바사의 속방이었습니다. 당시 바사는 유다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이었으므로 성전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❷ 헬라시대(B. C. 331-167, 164년간)가 있었습니다. 헬라시대의 역사는 성경의 사사시대 B. C. 12세기로 여겨집니다. 트로이 전쟁과 호머는 B. C. 100년경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였습니다. 페리클레스와(465-429) 소크라테스(469-399)는 에스라와 느혜미아의 동시대 사람들이었습니다.


          <트로이전쟁>

B. C. 336년에 알렉산더 대왕이 20세의 나이로 헬라 군을 이끌고 애굽, 앗수르, 바벨론, 바사의 지배아래 있던 동쪽 나라들을 휩쓸었습니다. B. C. 331년까지 온 세계를 정복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유대에 대하여 상당히 우호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겨두고, 유대인들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도록 특별한 배려를 했습니다.

알렉산더가 B. C. 323년에 죽고 제국은 넷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후 안디오쿠스 대왕이 팔레스틴을 정복하여(B. C. 198) 수리아 왕조로 넘어 갔습니다.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B. C 175-14년)는 유대민족과 유대인을 말살시키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황폐시키고(B. C.168), 성전을 더럽히고, 제단에 돼지를 바치고, 성전에 주피터(Jupiter, 헬라의 Zeus)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제사를 금하고, 할례를 금지하며, 수천의 유대인을 노예로 팔고, 성경의 사본을 발견되는 대로 없애버렸습니다. 성경을 가진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습니다.
헬라시대의 성전은 주피터 신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피터 (Jupiter)>

❸ 마카비 독립시대(B. C. 167-63)가 있었습니다. 안디오쿠스의 유대인 학살은 유대의 역사상 가장 영웅적인 마카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제사장이며 용감한 애국자였던 맛다디아(Mattathias)는 충성스러운 유대 인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에게는 호전적인 다섯 아들 “유다, 요나단, 시몬, 요한, 엘리아살”이 있었습니다. 그의 장남 유다의 별명이 “마카베오, 혹은 마카비”였습니다.

마카비는 천재적인 군인이었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서도 항상 승리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회복했습니다(B. C.165). 성전을 깨끗하게 정돈했습니다. 이것이 수전절(Feast of Dedication)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약 100년간 마카비 시대가 열렸습니다.

      <마카비의 반란>

❹ 로마시대(B. C.63-그리스도까지)가 있었습니다. B. C. 63년에 팔레스틴은 로마의 폼페이에게 정복당했습니다. 에서의 자손인 에돔 사람 안티파텔이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 헤롯왕에게 유다의 왕을 계승시켰습니다(B. C.37-3). 헤롯은 통치차원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지은  성전을 자기가 더렸습니다.

결국 지상의 성전은 이방인들이 들어와 성전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더럽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는 성전을 짓도록 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이는 성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광야시대의 언약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0-11절에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셨습니다.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2:19-21절에서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손으로 지은 성전을 불태우고, 헐어버리고, 우상의 신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십자가 위에 매달았습니다. 그리고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덤에서 삼일 만에 그 성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

3) 우리를 성령의 성전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14-16절에서 “❶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❷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❸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❹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❺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❻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❼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❽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끝맺는 말

사도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라고 은혜의 날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때에 받고, 누릴 때에 누리며, 발전시켜야 할 때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로 헛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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