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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 능력과 보혈의 능력 (롬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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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를 지나오면서 우리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는 무척이나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개발도상국이란 표현이 어색할 만큼 많은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OECD에 가입하여 선진국 문턱에 한걸음 다가가는가 하면, 국민소득 2만불을 눈 앞에 두고 있기에 머지않아 G7 혹은 거기에 버금가는 멤버쉽이 될 수도 있다는 청사진이 우리를 들뜨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23년 전 평안의교회가 이 지역에 개척할 당시만 해도 이 주변에는 자가용을 가진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90년대 넘어서면서 차츰 길가 자기집 대문 곁에 자가용을 세워두는 일이 눈에 띄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는 일렬주차를 넘어 양렬주차로도 감당키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일단 직장이 안정되고 집을 구입한 뒤에야 자가용을 생각해 보는 것이어서 자동차는 부의 상징이었는데, 지금은 삭월세를 살더라도 자가용은 있어야 할 정도로 생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는 와중에 우리 성도들의 신앙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백적인 신앙인데 그 힘은 바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에서 오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죄의 능력과 피의 능력, 곧 보혈의 능력입니다. 보혈의 능력과 죄의 능력은 언제나 서로 충돌하게 되어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회적인 환경이나 삶의 질이 점점 좋아지는 것과 반비례하여 우리의 신앙은 약회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가 신앙을 가졌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반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배고파서 내가 예수를 믿었는가? 아파트를 마련하기 위해 예수를 믿었는가? 보다 나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다녔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마치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왔더냐 갈대를 보려고 나왔더냐. 좋은 옷 입은 사람들을 보려고 나왔더냐?'고 반문하셨던 것 처럼, 오늘 우리도 그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맨션아파트도 마련했고, 좋은 자가용도 구입했고, 우리의 일상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문화적 욕구들을 채워줄 수많은 컨텐츠들을 소유한 이 마당에 아직까지도 교회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성도들이 요구 속에는 이런한 주장이 적지 않습니다. 일 주일 동안 부부가 맞벌이 하면서 세상 속에서 지치고 피곤한데 교회에 와서도 이런 저런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각성, 기도와 전도, 충성과 헌신 등의 그런 주제는 그만두고, 평안과 위로, 축복과 부흥, 성장과 비전 등 이런 류의 주제를 중심으로 다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 말씀을 통한 회개와 결단 등의 주제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귀를 닫고 하나 둘씩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삶의 긍정적 교훈을 이야기하고, 믿는 자의 형통을 이야기하며, 위로와 축복을 이야기하는 교회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옮겨가기 시작을 하여 갑자기 몇몇 교회들이 대형교회로 발돋음하는 기현상이 생겨났습니다.그들은 수용능력이 부족하다며 수 백억원을 들여 맘모스 건물을 짓는라 정신이 없을 지경입니다. 그런 이들에게서 신앙의 깊이를 느낄 수 없습니다. 고민하는 신앙을 찾아보기도 어렵습니다. 그저 신앙은 품위를 유지하는 모임을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품위유지를 위해서 교회를 다닙니다. 교양을 위해서 다니다 보니 그들의 요구는 갈수록 태산입니다. 우리 교회는 문화센터 같은거 안합니까? 어느 교회는 영어도 가르쳐 주고, 붓글씨도 가르쳐 주고 커피숍도 있고....그리곤 문화적인 소양을 얻기 위해 그러한 시설이 있는 교회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결국 교회는 그러한 이들을 붙잡기 위해서 수많은 돈을 들여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서 그런이들의 교양을 채우주고 문화적인 욕구를 채어주는데 급급하다보니 교회의 정제성은 온데간데 없는 21세기 한국 교회의 현주소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정말로 중요한 부분들을 잃어 버리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됩니다. 중세가 망해가는 암흑의 와중에서 마틴 루터를 통해 꺼져가는 심지가 되살아났고, 영국이 무지와 질병과 부정 부패로 좌초 위기에 몰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요한 웨슬리를 통해 회복의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는 것은 우리 몸에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사형통의 방편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은 그 바울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수 있지요. 내가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서 내가 핍박을 받지 않고, 내가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서 우겨쌈을 당하지 않고, 내가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서 망하지 않고,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핍박을 받지만 망하지 않고, 우겨쌈을 당해도 우리는 결코 좌절되지 않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은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도 망할 수 있고, 답답한 일을 당할 수 있고,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그럼에도 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이길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예수의 능력의 보혈을 소유한 성도의 신앙인 줄 믿습니다. 품위를 유지하고, 교양을 채워가고, 만사형통의 그릇된 방편으로 생각하는 한 교회는 점점 체질이 약화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성도들은 점점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죄의 능력과 피의 능력이라는 제목을 상당히 심각한 마음으로 제목을 삼았습니다. 죄의 능력과 피의 능력은 언제나 충돌하기 마련입니다.

역사를 이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에 사탄 마귀가 도전하는 그런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을 죽입니다. 특별히 죄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기도의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헌신의 사람을 죽이려고 하고, 봉사의 사람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죄는 하나님의 사람을, 능력의 사람을 무능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을 하나님의 교회에서 떠나가게 만듭니다. 뭐가? 죄가 우리로 하여금 무력하게 만듭니다. 떠나가게 만듭니다. 종종 우리는 훌륭한 사람들이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모습들을 봅니다.

그 떠나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보면 죄의 능력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디자이너 베르사체를 아십니까? 아마 그의 이름을 가진 넥타이나 가방이나 지갑을 든다는 것은 명품을 드는 것, 그래서 자부심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디자이너로서의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상숭배의 우상의 제일 첫 번째는 육체의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정욕이 21세기의 현대인들의 가장 심각한 우상이라는 그 말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잘못된 삼각관계, 친구의 남편 친구의 이상한 관계가 되는 것은 기본적인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죄의 능력들이 이 사회에 당연한 것처럼 들어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어처구니 없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면 오히려 속이 좁고, 아주 편협한 사람으로 그렇게 우리가 인식되고 있습니다.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커밍아웃을 당당하게 하고 활동하는 사람들, 나는 성을 전환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텔레비전을 장식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말 한마디 못하는 무기력한 입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젊은이들도 그것이 뭐 어때서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기겁을 할 정도입니다.

여러분 3월 1일이면 서울에서 통곡기도회가 열립니다. 마치 미스바에서, 수문 앞 광장에서 그들이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울면서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를 회개하는 것처럼 2007년, 1907년 영적대각성을 100주년 앞두고 한국교회의 영적대각성 운동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한편으로는 다행이면서도 부끄러운 것은 3월1일날 한국에서 열리는 그 서울통곡대회는 주최가 한국에 있는 교회단체가 아니라 미국에 있는 교회 단체에서 주최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지금 분위기가 이상해 졌어요. 북한의 김정일의 독재와 김정일의 인권유린과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짐승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수십 수만명이 죽어가는 것을 이야기 하면 이상한 사람처럼 되어 버려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 우파 꼴통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소리를 안 하려면 입 다물고 있어야 합니다. 이상한 나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의 성도들이 참다 못해서 한국으로 자리를 옮겨서 통곡기도회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 어떤 정치적인 신념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가 보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우리는 지금도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행동하고 이렇게 사는게 제일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기가 막힌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영광과 바꿔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초코렛 하나는 주면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가지고 노는 흑인들에게 바꾸지 않겠냐고 하는 초코렛 하나 먹어보니까 심히 맛이 있으니까 막 바꾸어 주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이 지금은 깨어나고 나서는 절대로 초코렛과 다이아몬드 원석을 바꾸지 않습니다. 어리석을 때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이죠. 2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베르사체는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그는 우상숭배의 삶으로 육체의 정욕을 위한 우상숭배로 갔습니다. 그것도 동성애라고 하는 육체의 정욕의 길로 빠졌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자기가 좋아했던 동성애자에 의해서 권총에 맞아 살해를 당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5절을 보겠습니다. 2가지 문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거짓된 것과 바꾸어 살기를 좋아했다.

피조물을 조물주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더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제목에 근거해서 말씀을 적용해 보면 죄의 능력이 보혈의 능력을 압도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피조물을 섬기는 일에 더 좋아하는 우리의 모습들,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세상의 거짓된 것과 바꾸어가면서 즐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야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간데 없고, 죄의 능력만이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쫓아온다.

왜 우리를 채찍하시고, 왜 우리에게 진노로써 말씀하시는지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아직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유효한 줄로 믿습니다. 채찍하지 아니하면 아들이 아니요, 채찍하지 아니하면 자녀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질병을 주셔서 깨닫게 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망하게 하심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실패의 자리에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형통이라고 하는 말 언제나 1등이어야 하고, 형통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가 잘 되어야만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 아주 단란하고, 정말로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병원에 와서 진단을 해 보니까 의사가 가족들을 다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 들어갔더니 의사가 하는 말이 치료할 수 없는 암 말기 인 것 같습니다. 얼마 살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 가족들 전체가 준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가정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희망과 인생의 푸른 꿈을 가득 안고 있는 여러분 가정에 그런 진단이 놓여진다면 궁금합니다. 저도 궁금해요. 제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처신을 할 수 있을지, 죄송하지만 저도 장담을 할 수 없습니다.

그 가정이 모여서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왜 날벼락 같은 일인지, 왜 우리 가정에 일어나야 했는지, 그러다가 그들은 놀랍게도 이렇게 결론을 맺었습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 한 번 해 봅시다. 사실은 그 가정은 신앙생활에 열심이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날 좋으면 산에 가고, 그저 날 궃고 갈 데 없으면 교회나 오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의 가정에 세상적으로는 부족할 것이 없는 그런 가정이었는데, 그런 사망 진단이 그 가정에 위기를 던져 주었어요.

그 가정은 마지막으로 합심해서 이제 한 번 제대로 한 번 구해보자 해서 부부가, 아이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매달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새벽기도가 시작이 되었고, 예배에 빠진 일이 없게 되었고, 말씀을 듣는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고, 기도를 해도 편안하게 기도하는 기도가 아니라 정말 생명을 놓고 기도하는 간절한 간구의 기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진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큰 병원에 가서 진단을 했더니 마지막 암 말기가 되어져서 얼마 살지 못한다고 준비해야 된다고 그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그 병원에서는 암에 대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생각은 먼저 병원에서 오진을 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가정의 그런 사건을 통해서 놀랍게도 그 부부가, 그 가족이 다시 모여서 암이라는 것은 없댄다. 원래부터 암은 없는 건데, 원래 병원에서 오진을 한 것 같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러한 위기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고, 신앙을 회복하게 되어지고, 그래서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해 주셨으니 우리가 감사하자.

그래서 그 글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 가정에 엄청난 위기가 한 때 주어졌던 그 일이 우리 가정을 영적으로 소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기는 우리를 넘어지게 하고, 망하게 할 일로만 가지는 않습니다.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연단을 주시는 것은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된 것으로 바꾸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길 때에 하나님께서 여전히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 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 지어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복종할 지어다라고 선포한 후에 계속해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저가 피하리라.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영적인 승리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사탄마귀의 세력이 약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붙잡는 한 죄의 능력은 약해질 것이고, 도망갈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했던 죄의 능력들, 세속의 능력들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거짓된 것을 더 가까이 하고, 중요하게 여겼던 그러한 삶이, 우리의 삶의 중심들이 보혈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를 중심이 옮겨 가면서 곧 사탄마귀의 세력들은 곧 우리에게서 멀어질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202장은 우리에게 고백합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주님의 보혈만이 우리를 죄의 능력에서 이기게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말씀은 위로의 말씀이 아니라 썩어가는 그 부위를 알콜 발라주면서 호호 불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프더라도 째서 그 고름을 짜내는 그러한 진정한 치료자가 우리에게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죄의 능력, 죄의 능력에 붙잡혔던 보혈의 능력에 붙잡혀서 예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부끄러움이 없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며 따라갔던 우리들 진리의 말씀보다 거짓된 것을 더 좋아하며 사랑했던 우리들이 이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에 다시 한 번 붙잡히기를 원하고, 주님의 보혈의 은혜에 다시 한 번 감동받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하시옵소서.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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