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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께 가라 (요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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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세 번째로 먼저 35절부터 37절입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 요한에게는 이미 여러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세례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서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례 요한은 자기의 두 제자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그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은 바로 스승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두 제자가 스승을 바꾼 계기입니다. 자기네들의 계산이나 판단보다는 스승인 세례 요한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말은 저 분은 이런 분이라는 소개라기보다는 자기 제자를 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배우는 것보다는 저 분에게 가서 배우라고 보낸 것입니다. 현 세상은 이기주의가 얼마나 만연하고 있습니까? 그저 내 이익이고 내 생각만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려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어느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세상입니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내 이익을 위하여 아내를 버리는 일도 있고 자기의 삶을 위하여 자식을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참으로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런 사람이 많이 나와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행복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것을 나도 가져야 하고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누리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내가 가지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내가 가졌다고, 다른 사람들이 다 소원하는 것을 내가 가졌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따로 있습니다. 행복이란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산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참 괜찮은 표현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소원하는 곳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산속 길 하나만을 걸어도 이것이 행복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길을 알았고 그 길을 갔습니다.

38절에서 42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두 사람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데 예수님을 너무 존경하고 사랑하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 때문에 주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쉽게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먼저 무엇을 찾느냐고 말을 걸어옵니다. 제자들이 어려워서 절절매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편안하게 일을 쉽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을 가진 분이 어른입니다.

우리 주님은 늘 이렇게 일을 쉽게 풀어 주셨습니다. 아무리 어른이라고 일을 어렵게 하는 사람은 어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되는 일을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서지 못하고 겁을 내고 두려워할 때에 예수님이 항상 먼저 가셨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서 군대 장관을 먼저 보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는데 바로 이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대장이 되셔서 우리가 힘들어 하고 두려워 주저주저하며 어쩔 수 없어 할 때에 먼저 가시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우리 주님께서는 항상 먼저 가셔서 먼저 일을 시작하십니다.

불쌍한 사람을 돕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전부 다 도울 수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사랑을 만들고 평화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어렵고 힘들고 내 힘으로 안 된다고 뒤로 물러서 있으면 평화와 사랑은 한 세월입니다. 여러분들이 작으나마 평화의 작을 불을 밝힐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큰 불을 켜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그것은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가? 만약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을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여기에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해서 두 제자가 대답을 했는데 이 대답은 최고의 대답입니다. 무엇을 찾느냐고 물었는데 제자가 대답한 것은 어디에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그렇게 어려운 것을 묻습니까? 우리가 무슨 인생의 목표를 가질 수 있고 찾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찾지 못합니다. 어디 계십니까? 가서 예수님에게 배워서 그것을 우리의 인생의 목표로 삼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길에서 한 두 번 들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는 곳에 찾아가서 거기서 함께 오래 있으면서 배우고 또 배우겠다는 대답입니다. 얼마나 명답인지 모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필요할 때에만 대답을 듣고 급할 때에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있으나 없으나 늘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항상 내 마음 속에 계시길 원하며 마음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일이 있을 때에는 물론 함께 계시고 일이 없을 때에도 늘 나와 함께 해 주십시오 라고 하는 것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이 지혜의 길과 평안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어디 계십니까 라고 대답한 것은 정말 명답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고 흔쾌히 승낙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흔쾌하게 대답하십니다. 오기만 하면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데서 찾으려 하는 것은 전부 다 헛수고입니다. 예수님께 오면 순간순간 마다 목표를 주십니다. 인생의 참된 가치를 가르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우선은 멋진 것 같습니다만 다 허황된 것인데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길로 살게 되면 인생의 참된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가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찾을 수 있습니다.

39절에 눈길을 끄는 기록 하나가 있습니다.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이 글을 쓴 사람이 바로 이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제자가 있었는데 한 사람은 바로 이 글을 쓴 사도 요한이었고 또 한 사람은 이제 나오는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를 오늘 성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성경에 세 번 등장하는데 하나는 오늘의 본문입니다. 형 베드로를 예수님에게 데리고 가는 역할을 합니다. 또 하나는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때 먹을 것이 없을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먹을 것을 나누어 주어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에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 하나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는 사람이 바로 안드레입니다. 세 번째는 12장에 있는 일로 헬라 사람 몇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오는데 다른 제자들이 이들을 안드레에게 소개하여 이들을 예수님께 안내합니다. 세 경우가 다 안드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드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했습니다. 정말 예수의 사람들은 이런 사람입니다.

안드레가 자기 형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을 때 예수님께서 안드레의 형에게 게바라는 별명을 붙여줍니다. 헬라 말로 하면 베드로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베드로라고 하는데 베드로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별명입니다. 이것을 어느 나라 말로 하면 베드로이고 또 다른 나라 말로는 게바인데 둘 다 반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본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이 시몬에게 베드로, 게바라는 별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몬에게 별명을 붙여주신 것은 그냥 별명으로만 주신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미래를 주신 것입니다. 너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일인칭 의지미래로 I will make you..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나가면 우리 주님은 여러분을 좋은 미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우리 주님께서 새롭게 창조해 주십니다. 어쩌면 아주 추한 인생을 살 뻔했던 사람들의 미래를 우리 주님께서는 아주 멋진 인생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나가게 하십시오. 공부 좀 더 한다고 멋진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 거의 다 라는 것이 우리나라 역사뿐만 아니라 미국 등 다른 나라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훌륭한 미래를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께 가야 합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온갖 수단과 재주를 부려 봐도 세상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보다도 더 훌륭하게 만들어 줄 세상은 없습니다.

이제 43절에서 51절까지입니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란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세 번째로 빌립을 제자로 만나게 되는데 이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 뒤에 가만있지 못하고 자기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도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이 너무 좋기 때문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콧방귀를 뀌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유대인은 나사렛에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그런 곳에서 그렇게 좋은 것이 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입견은 사람들에게 좋지 않습니다. 기왕에 선입견을 가지려면 부정적인 선입견보다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지면 여러분의 인생이 긍정적인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사람은 부정적인 인생이 됩니다. 나다나엘이 그렇게 말하니 빌립이 예수님께 금방 배운 듯이 와서 보라고 말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아마 친구의 강권이므로 와서 보았을 것입니다. 그 콧방귀 뀌던 나다나엘이 깜짝 놀랄 고백을 하는데 그것이 49절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빌립과 나다나엘의 이 이야기는 기독교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기독교는 이론으로는 알 수 없는 종교입니다. 누가 설명해서는 알 수 없는 종교입니다. 예수를 만날 때에 알 수 있는 종교입니다. 여러분이 와서 설교를 듣고 책이나 TV로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어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기독교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형편없는 곳이라고 그 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은 기독교를 알게 됩니다. 또 하나는 기독교는 내 능력과 내 말재주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만나게 하는 것을 통해서 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고린도전서 2장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1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4~5절)..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십니다.

기독교를 전도할 때에 내가 나서서 가르치거나 설명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여 주시든지 예배당에 데리고 와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그 사람이 기독교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다나엘이 그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인에게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 평화를 소원할 때에는 무화과나무 아래로 갑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의 평화를 원할 때에 어떻게 합니까? 십자가 밑으로 가면 제일 좋습니다.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고 앉으면 평화가 가득해 집니다. 유대인들은 평화를 소원할 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네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나다나엘이 깜짝 놀란 것입니다. 아, 이분은 내 마음을 아시는 분이시구나. 내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아시는 분이구나. 그렇다면 이 분은 나의 모든 소망과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돈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 보다 더 큰 이를 보리라(50절) 라고 말씀합니다. 과거에, 조금 전에 내가 너를 보았다는 그것 때문에 나를 믿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점쟁이와 비슷합니다. 점쟁이는 지난 일들을 압니다. 그러나 미래는 절대로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네가 과거만 본 걸로 생각하느냐,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미래를 보고, 뿐만 아니라 미래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보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소원하는지, 여러분의 아픔이 무엇인지, 어려운 것이 무엇이고, 고통이 무엇이고 슬픔이 무엇이고 여러분들의 서러움이 무엇인지 우리 주님은 너무너무 잘 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자신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정말로 좋은 것, 여러분들에게 행복한 것을 우리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그것을 다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최고의 것을 해 줄 수 있는데 이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다른 것을 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은 행복입니다. 행복은 인생의 유일한 목적적 가치라고 합니다. 종교, 철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이의 없이 인정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인생의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할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사랑을 받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랑에 반응할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누구나 사랑하고 싶고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랑에 아주 아름답게 반응라고 싶습니다만 소원대로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나도 알지 못하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사랑받을 줄 압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받습니다만 제대로 받아들일 줄 모릅니다. 예수님 앞에 나가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여러분은 사랑할 수도 있고 사랑 받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 남은 인생, 예수님 앞에 나가십시오. 만나고 또 만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사랑할 수 있고 받을 수도 있고 정말로 행복한 인생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김태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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