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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은 능력이다(빌 1:2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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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저는 "복음을 복음 되게 하라"는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복음을 누가 병 고침 받고, 누가 부자 되고, 누가 성공한 소식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당신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죄인 됨을 자인하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믿습니다."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이 복음이 지금도 저 창고에 쌓여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은 심판의 때를 향하여 점점 다가서고 있습니다.
이번 파키스탄 지역의 지진이 일어날 때도 사람이 지진을 감지하기 전에
까마귀들이 기괴한 울음을 내며 하늘로 날아오랬다고 합니다.
작년 남아시아 쓰나미 해일 때도 사람이 위험을 느끼기도 점에 동물들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짐승들은 위기를 느끼고 반응을 하는데,
여기저기 허리케인이 휩쓸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나고, 해일이 일고, 알수 없는 질병들이 창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창고에 넣어두고 '전하지 아니하는' 우리 크리스챤들은
심각한 무감각, 그리고 "위기 불감증"을 앓고 있는게 분명합니다.

복음은 그것이 아무리 기쁘고 좋은 소식이고, 생명의 소식이라 할지라도 전달이 되어야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진 약이 천하의 명약이라도 그것을 나만 간직하고 있고,
그것의 존재를 알지 못하여 죽어가는 이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으면,
그 약은 나에게만 효과가 있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은 지식도 아니요, 철학도 아니요, 어느 종교가 가진 진리의 말씀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능력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복음은 죄인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선언 하였습니다.
바울은 생각할 때 사망권세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 그 역동적 사건과
이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의 그 소망의 시간이 곧 복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내용, 즉 예수님의 오심과 가르치심, 고난과 죽음,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실 약속에 이르는 이 "구원의 드라마"가 복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을 정의할 때 그것은 '능력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의 복음을 받은 자가 크리스챤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상 그 위미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느 나라의 시민권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은 곧 권리이며 동시에 "의무"도 따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빌립보라고 하는 이 도시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에는 '로마 시민 권자'는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만큼 대단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온 각 지방에서 오는 노획물들로 자본은 풍성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민권 하나를 얻기 위하여 별의 별 수단이 다 동원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정도 특권층이었지만 동시에 로마시민권자는 쓰는 언어도 라틴어만 쓰고,
입는 옷도, 풍습도, 체통도 철저하게 지켜야 했습니다.
즉 로마 사람은 로마사람답게 살아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본문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하는 말은
"복음을 받고 천국 시민 권자가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천국 시민답게 살라"는 말입니다.
즉, 크리스챤들만의 언어, 풍습, 체통을 지키고 살아야 하고, 세상 속엔 살아도
'세상과 동화되거나 물들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천국 시민권자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이것을 전하고,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친구들 만나면 밥 사주고, 전도하고, 자꾸 부담을 안기며 전도하다 보니
친구들 사이에서 '그 친구 밥은 함부로 얻어먹으면 교회에 코가 꿴다'는 농담이 돌 정도라고 합니다.
친구 만나도, 거래처 사람 만나도, 구멍가게를 들어가도,
목욕탕에서 옆 사람 등을 밀어 주어도, 앞집에 찐 고구마 한 접시를 들고 가도
"복음" 전할 생각을 하고 찾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 입니다.
그 사람이 천국 시민권자다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오늘 부터는 하나님 자녀 된 특권만 누릴 생각 보다는 하나님 자녀된 의무 감당에도 신실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한 뜻으로 복음 전하는 일에 협력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복음 전할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복음 전하는 이레도 적극 협력을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전도 못하면 전도하는 이들을 잘 도와서 효과적인 전도가 이뤄지도록 하여야 합니다.
'협력'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서 협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자들 식사준비로 협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비 지원'으로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잘 하느니 못하느니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말만 많이 하는데,
이런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어 주는 것도 협력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목회자나 선교사나 전도자에게 협력하는 것이 복음 받은 크리스챤의 의무요, 사명인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목회자에겐 장로, 권사, 집사가 협력자요. 구역장 권찰, 교사, 성가대원, 남녀 전도회가 협력자 입니다.
기도로 돕고, 순종으로 돕고, 물질 헌신으로 돕고, 그리고
'기껏 데려온 새신자에게 막말해서 상처주고 떠나게 하지 않는 것'도 목회 돕는 것이고
'공집회에 잘 참석 하는 것'도 목회 돕는 것이고, '설교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도 목회를 돕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부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도록 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복음전파 사역에 직접, 간접적으로 협력하라는 말입니다.

바울 당시 전도사역은 항상 개척사역이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곳에 가서 '협력자'를 잘 만나면 선교가 성공이 되고, 그게 안 되면 매 맞고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협력자'의 반대는 '훼방자, 방해자' 입니다.
나는 기도만 했을 뿐인데도 협력자가 될 수 있고,
나는 '걱정이 되어서 바른 소리 좀 했을 뿐인데도 훼방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탄이 내 개인의 정의감과 의분으로 포장하여 전도를 가로막고, 주의 일을 지체시키거나
전도자들의 의욕을 꺾기도 합니다.
어떤 모양이든 여러분은 결코 '방해꾼, 훼방자'가 되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떤 모양이든 협력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또 '복음에 합당한 생활' 즉,
'능력의 복음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땅한 의무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두려움은 그 의미상 조마조마해하며 비겁하게 사는 것입니다.
먼저 '실패, 패배'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두려워하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복음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여러 분속에 복음이 꽉들어 차있으면 여러분은 능력충만 상태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신앙적 담력을 가지고 생활하시라는 얘기입니다.
복음증거하고 복음위하여 일하다가 오해로 받고, 핍박도 받고, 시간적ㆍ물질적 손해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손해를 다 헤아리시고 하늘에 상급을 쌓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도 보상하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 되는 것에 대하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생들은 공부하면서도 대학 못갈까 두렵고 두려워하지 어른들은 사업하고 돈 벌면서도 무슨 일이 터질까 두려워합니다.
복음증거자들은 전도하면서도 열매 없을까 두려워합니다. 안될 걱정먼저 합니다.

여러분 내가 이 순간 하나님에게서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하였으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던져 버리시길 바랍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챙기실 테니 담력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똑같은 고난을 당하여도 선교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에는 자부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내 욕심 챙기다가 위기를 만나면 죄책감만 생기고 평화는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기만 하면 마지막은 승리로 끝이 날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씀이 등장 합니다.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를 하는데 이것을 방해하고 트집 잡고 괴롭게 하고 마음 상하게 하는 자가 있습니까?
두려워말고 주눅 들지 말고 다음 일을 내다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누구 편에 깨시겠는가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을 마음 언짢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 바라보는 마음을 좀 바꿔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지금 저렇게 흥분하여 막말하고 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가 한말을 후회하게 될 터인데
자기는 얼마나 부끄러울까? 이 사람이 지금은 잘 알지도 못하고 저러고 있는데
나중에 그게 오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존심 때문에 사과도 못하고 얼마나 곤란할까?'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복음전하다보면 대놓고 막말하는 사람, 논쟁하자고 달려드는 사람, 너나 잘하라고 빈정대는 사람, 이제 상대도 안 해주는 사람,
별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때는 이렇게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예수님의 사랑에 녹아지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면 지금 나에게 이렇게 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울까'하고
느긋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입장이 바뀔 날이 올 것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만민에 미소를 짓고 사람을 대하는 여유를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일찍이 사도바울이 귀신들인 여종을 만나 그 귀신을 쫓아낸 사건이 사도행전 16장에 나옵니다.
이 장소가 어딘가 바로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 즉, 지금 사도바울이 쓴 이 편지를 받는 곳입니다.
저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면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하여 돈벌이하던 자들이 바울과 실라를 옥에 가두고 든든히 지키게 합니다.

하지만 그 억울한 상황, 비참하게 매 맞고, 망신을 당한 상황에서도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큰 지진이 나고 감옥 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하였습니다.
간수가 자다 깨어 일어나보니 옥문이 다 열려있어 죄수들이 도망할 줄 알고
자기 직무를 온전히 감당못한 것 때문에 자결하려고 합니다.
이때 바울이 크게 소리 지르고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여기 있다하니
간수가 보고 무서워 떨며 그들 앞에 엎드립니다.
바로 이 간수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주의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6장에는 간수가 바울과 실라의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신뿐 아니라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는 장면이 등장을 합니다.
게다가 죄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을 대접하는 장면까지 나옵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아주 통쾌한 역전승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바울과 실라가 매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왔을 때 이 간수는
저들을 조롱하고 침 뱉고 멸시하고 어쩌면 옥에 가두면서 더 때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간수에게 바울과 실라는 그냥 일거리요 다른 죄수와 다를 바 없는 죄수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들에게서 복음을 받고 그들의 맞은 자리를 씻기며
정말 자기가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 생각에 바울은 매 맞을 때는 고통스러웠지만 복음을 받은 간수가 씻겨주고 먹을 것 주고 세례 받는 순간
그 고통의 억울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울은 빌립보형제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빌립보에서 당한 일을 너희가 보지 않았느냐 핍박자, 반대자, 훼방자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결코 잘못되거나 중단 될 수 없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어찌되든 전파될 것이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요
저들에게는 멸망의 빙거니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바울은 역전승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고는 핍박, 반대, 훼방에 개의치 않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복음에 합당한 인생이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이란,
지금 내가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는 수고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 특권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예수님을 위하여 얼마나 손해를 보셨습니까?
얼마나 희생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복음 때문에 얼마나 안타까워하여 보셨습니까?
그만큼 영광이 있고 기쁨과 보람이 있을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과 함께 고난당하지 않아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영광의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예배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한 분들이 예배에서 느끼는 감격은 그냥 예배에 참석만한 분들이 느끼는 것과 차이가 있습니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예배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전도한 내 심정과 아무것도 모르고 그 곁에 앉은 성도의 심정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부터 강력한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의 삶을 복음에 합당한 인생으로 바꾸어 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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