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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비밀 (사 60:1~5, 엡 3:3~6, 요 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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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현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주현절은 주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께서 빛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제일 먼저 창조한 것이 빛입니다. 빛을 창조하셨고 어둠을 몰아 낸 다음 밝게 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계속해 가셨습니다.

오늘 이사야서도 아주 감동적인 언어로 빛의 이야기를 합니다. 때는 이스라엘이 식민지여서, 마음대로 주님께 예배드릴 수 없었고, 성전도 파멸되어서 희망이 없었던 시절입니다. 언제나 고국으로 돌아가 주님과 함께 성전예배를 드리고 떳떳하게 선택된 백성으로 살게 될까 하는 좌절과 분노가 지배하던 시절에 이사야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빛을 비추어라. 구원의 빛이 너에게 비치었으며, 주님의 영광이 아침 해처럼 너의 위에 떠올랐다.” 마치, 천지창조의 처음을 시작하듯 빛을 비추라고 합니다. “이방나라들이 네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고 “빛이다. 일어나라, 빛이 임한다, 빛이 환하게 비출 뿐만 아니라 뭇 나라 백성들과 왕들이 그대들의 빛을 보고 찾아올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뒤바뀔 것입니다. 어두움을 몰아내는 것이 빛인데 이스라엘의 고초의 역사를 물리치고 빛을 줄테니 하나님께 찬양하고 빛의 영광을 돌려라 동시에 만 백성이 왕까지 그대들앞에 올 것이다. 우리가 이 말을 식민지 시대에 들었다고 생각해봅시다. 3‧1운동 아침예배에 이 광경을 보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인도의 타고르가 조선을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던 시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으나, 제가 등불인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저한테 꿈을 심어준 그 분께 참 감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나서 빛을 발하라고 한지 500년이 지나서 베들레헴 작은 말구유간에 작은 등불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합니다. 이사야가 ‘만백성이 그 빛을 보고 몰려올 것’이라고 했는데 누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가 이 예수를 보고 그 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이방나라의 왕들이, 현자들인 동방박사 세 사람이 이방민족을 대표하여 별을 움직임을 따라서 도착해 보았더니 말구유간에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났습니다. ‘빛을 비추어라, 만 백성들이 올 것이다’ 라는 표현이 이렇게 상징화 되어 있습니다. 별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살던 사람들, 밤의 별빛을 좋아하던 사람들, 목동이 들판에서 별빛을 보고 찾아간 곳은 말구유간이었습니다. 이사야서의 우렁찬 예언과 축복의 말씀은 500년 뒤에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그러나 내용은 변하지 않고 이루어졌습니다. 이방나라를 대표하는 동방박사 세 명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목자들이 예수께 와서 경배를 드리고, 빛의 태어남을 축하했습니다. 이사야서와 신약의 내용이 들어맞습니다.

이사야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빛이 되어 임할 것이다, 하나님이 드러날 것(테오파니 theophany)이라고 했습니다. 테오는 하나님이고 파니는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현절은 테오파니라는 말이 아닌 에피파니(epiphany)라는 말을 씁니다. 이 말은 주님이 신이 아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주현절이란 사람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빛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나타나는 계절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빛이 된다는 선택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테오파니까지는 받았으나, 육으로 오신 빛은 거부했습니다. 베들레헴, 이스라엘, 구약전체가 아직도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온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가 아직은 구세주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면 테오파니 예배는 드릴 수 있으나, 인간의 몸이 된 에피파니아 예배는 드리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매우 큽니다.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어제 신부님이 이런 강좌를 하시는 것을 들었는데, 6311021 이라는 번호를 쓰시고 읽으셨습니다. 저는 전화번호인 줄 알았습니다. 이 분이 설명하시기를 본래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을 분리, 확대하여 631개의 율법 계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다가 율법이란 말을 나오면 십계명이 아니라 631개의 법률조항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개의 조항으로 축약했습니다. 사실, 십계명 중 1계명에서 4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야기이고, 5계명에서 10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일자는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웃사랑, 하나님사랑을 뺀 “사랑”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설교준비를 하다가 그 하나를 사랑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고, 모든 것을 다 포괄하여 하나로 만들면,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분에서 10개, 20개, 1000개로 확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주현절에 나타나신 주인, 그 분이십니다. 그 분의 나타남이 성탄의 나타남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의 나타남을 절반만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가정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백성이 생각했던 율법과 십계명과 이웃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는 분,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하는 구세주로 받아들였다면, 유대 백성은 이스라엘에 머물지 않고, 전 세계로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임하셔서 이제는 이방에 사는 모든 백성들이 유대백성과 함께 하나님의 축복을 공유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살고, 하나님의 축복을 온 누리에 펼칩니다. 이 말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빛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면, 하나님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변합니다. 인간이 변합니다. 하나님을 유대땅에 묶어두었던 유대주의의 틀을 벗고, 인간이 존재하는 전 세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육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요즘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는 국경을 넘나들고, 인종, 역사를 넘나들면서 하나의 단일시장이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윤리, 사고방식, 언어도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세계화는 냉전의 붕괴가 아니라 성경에 의하면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민족주의나 이념, 체제를 넘어 온 세계를 끌어안는 것이 세계화라고 하면, 유대주의에 매몰되었던 하나님의 빛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바로 베들레헴 말구유간이었습니다. 세계화의 두 번째 의미는 단일시장이 아니라, 세계화를 주도하고 모든 축복을 누리는 중심은 하늘이라는 것입니다. 세계시장 속에 있는 사람의 중심이 되는, 모든 상품의 핵심이 되는, 하늘뜻인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화의 중심입니다. 저는 성탄이 예수의 탄생인 줄 알았더니, 세계화, 세속화, 인류화, 지구촌화 등 모든 것의 중심인 하늘이 땅이 된 사건입니다. 세계화는 성탄 때부터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계화의 기회를 절반만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오신 주님과 선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는 감사했지만, 자기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 맡겼습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이방백성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 세계화를 이룰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은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예수 덕분에 관광산업이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화된 잉태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계에 살아갑니다. 이제는 편협한 유대 종교주의, 민족주의를 뛰어넘는 범우주적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유대적 역사에 매몰되어 있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편협한 이데올로기와 지나간 체제에 너무 집착해서 앞을 열기를 주저합니다. 우리 사회의 정치적 질병이 무엇입니까. 극단주의의 대결, 과거지향적 경쟁에 매몰되어 우리의 정력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구약은 율법을 631개로 만드는 규제의 강화이고, 신약은 두 개로 줄이다못해 예수 그리스도 하나로 줄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알아서 사는 복음이 쉬운 것 같아도 어렵습니다만,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대의 창조적 가능성을 가지고, 전 세계를 끌어안고, 인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창조적 삶은 고달프지만 행복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작지만, 중요한 통계자료를 보았습니다. 2004년도 말, 전 세계 무역고를 보면, 1위인 미국은 2조 3천억 불, 독일은 1조 6천억 불, 중국 1조 1천억 불, 일본 1조억 불이고, 한국은 5000천억 불 내외로 12번째입니다. 5000만 인구가 1인당 1만불 정도를 번 것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룬 셈입니다. 가난에 허덕이던 이 나라가 양적으로 이렇게 부강하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고 동방의 등불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더 놀란 사실이 있습니다. 2004년 멕시코를 뺀 중미, 남미 38개 나라의 연간 총 무역고가 5천백억 불로 우리나라보다 약간 많습니다. 또한, 아프리카 전체 53개국 1년간의 무역고가 4천 4백억 불로 한국보다 수백 억 적습니다. 이 작은 나라가 중,남미 전체보다 약간 적고, 아프리카 전체보다 많고, 작지만 강한 나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구약의 율법으로 돌아가는 한 살지 못합니다. 우리 삶의 바탕을 철저하게 그리스도 안에 두고 발전시키고, 팔되, 그리스도가 우리 구세주임을 철저하게 믿고 세계로 나아가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은 반쪽 나라가 아닌 새롭게 펼쳐지는 역사 속에 새로운 축복의 나라가 됩니다. 한국을 ‘제2의 이스라엘’이라고 반쪽만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초월하십시다. 우리 사회의 극과 극의 대결은 구약적 사고 때문입니다. 이것을 뛰어넘어 새롭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눠가집시다. 중요한 것은 이웃과 더불어 공동상속하고, 하나님이 우리사이에 성육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축복입니다. 여기 앉으신 모든 분들은 엄청난 우주, 한 세계입니다. 내가 세상을 뛰어 넘어, 세계를 뛰어 넘어 하늘을 품고 있으면, 내 자신이 세계인, 세계화의 사람, 하늘의 사람, 하늘을 품고 세계를 넓게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주신, 이 민족과 교회에게 주신 하나님의 빛 된 축복이자 과제입니다. 복음으로 은혜와 진리로 살면, 넓어지는 대신 우리에게 업무와 과제가 주어집니다. 이 사실을 아시면 주현절을 뜻 깊게 보내십시다. 주님이 잉태하십니다. (박종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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