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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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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는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이십니다. 긍휼하심은 우리 주님의 성품이시며 주님의 삶의 덕목이시며 삶의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의 비밀 속에도 그분의 긍휼하심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롬 5:8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써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과 허물됨과 죄악됨을 아시면서도 덮어주시고 택하시고 부르시고 세워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의 중심까지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하여 아신 것을 다 드러내 놓으신다고 하면 우리의 처지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보신 것을 만약 그대로 드러내놓으신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언제까지라도 해야할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긍휼을 입고 산다고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샘물이 가득 차면 물이 흘러 넘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긍휼히 넘쳐 나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긍휼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덮으시는 역사가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긍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관계이며 또한 궁휼을 입은 우리들이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관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이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보혜사이신 성령님의 긍휼하심이 우리 인간 상호관계 속에서도 드러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특히 믿는 자의 심령에 긍휼이 넘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 중에 하나로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을 말씀하여 주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첫째로 생각할 것은 안이하고 적당주의식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무슨 법률을 위반해도 "괜찮아. 계속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맥이 없고, 안이하고 적당히 사귀기 쉬운 그런 사람이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란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단순한 감정의 문제나 내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작용에 그치는 그런 제한적인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행동을 설명하는 중요한 용어였습니다. 긍휼과 자비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시 62:12).

  하나님은 긍휼하심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해방시켜주셨습니다.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볕을 주시며 우로를 내려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기뻐하시며, 그 긍휼은 영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하여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 성육신은 귱휼의 결정체이며 예수 죽음과 부활은 긍휼의 완성입니다. 이처럼 긍휼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 믿는자들을 통하여 그리고 인간들을 통하여 인간관계 속에서도 드러나기를 주님은 바라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땅히 복수할 수 있는 데 복수하지 않는 것, 마땅히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 마땅히 저주하고 진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이것이 긍휼입니다. 스데반집사는 자신에게 돌을 던저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을 향하여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바랍니다."하고 마땅히 미워하고 저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미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비나 어미는 자식이 하는대로 갚아주지 않습니다. 자식이 못을 박아도 자식에게 똑같이 목박지 아니합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아비노릇해야 할 사람이 어린양하고 있는 집이 있습니다. 어떤 집에 가보면 어미가 젖병빨고 있는 있는 집이 있습니다. 그런 집은 행복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아비가 아비노릇을 하고 어미가 어미 노릇을 해야 집이 살아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아비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어미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아야 합니다. 사회도 그렇고 민족도 그렇습니다.

  셋째로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이런데 저 사람의 마음이 어쩔까? 하는 식의 자세입니다.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일방적으로 말하고 일방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긍휼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신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생각해 버리고 말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방대방에게 가혹하고 가중한 아품을 줄 때가 있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심정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영어로 이해를 "Understand"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밑에 선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본다는 말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긍휼히 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이처럼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한걸음더 나아가서 그 사람의 처지 아래에 서 보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고 하면서 수혜자보다 더 우월하고 더 높은 위치에 서 있다고 하면 그리고 거드름을 피운다고 하면 그것은 자신이 즐기는 것이고 자기 만족에 취하는 것이지 결코 긍휼히 여기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고 오히려 그 사람으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은 단순한 동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인격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의 문제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라 즉각적이고 현재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좋은 것은  즉각적으로 해야 합니다. 뒤로 미루면 욕심이 생겨서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해서 가만 생각하니 살아온 생애 동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이 별로 없어서 내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께서 감사를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1000만원을 작성했더랍니다. 그런데 즉시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건강이 회복되어가자 1000만원은 너무 많고 500만원 하기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50만원으로 줄어 들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50만원도 아깝게 생각되어서 주일 헌금 5000원 밖에 드리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는 것은 성령이 감동하시고 내 마음이 움직일 때 곧 바로 하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라겔르뢰프(Selma Lagerlof)가 쓴 [진홍 가슴 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옛날 하나님께서 세상 만물과 동, 식물을 지으실 때였습니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 하나님은 깊은 생각에 잠기신 후에 쟂빛 털을 가진 조그마한 새 한 마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새 이름을 '진홍 가슴 새'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이 새가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저는 온통 잿빛 털을 가지고 있는데 어찌하여 진홍 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참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날 '진홍 가슴 새'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사람이 그 십자가에 메달렸습니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진홍 가슴 새'는 그 사람이 얼마나 불쌍하게 보이든지 그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로 날아갔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았더니 그 사람의 이마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데. 그 가시가 박힌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나고 있었습니다. 이 새는 그 가엾은 사람의 이마로 날아가서 자신의 자그마한 부리로 그 사람의 이마에서 가시를 하나씩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가시가 뽑힐 때마다 피가 솟아 나와서 이 작은 새는 온통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새는 지칠 때까지 그 가시를 뽑다가 안타깝게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에 묻은 피가 도무지 깨끗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목덜미와 가슴에는 핏자국이 남게 되었고, 더욱 이상한 것은 새가 낳은 새끼들마다 모두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을 가진 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진홍 가슴 새' 이야기는 모든 긍휼히 여기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찾습니다. 다윗도 시 69:20 "비방이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불쌍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 같은 사람도 자신을 불쌍히 여길자를 바라고 긍휼히 여길 자를 찾았습니다. 아직도 전도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그렇습니까? 이처럼불쌍히 여길 자를 찾는 사람이 있고 긍휼히 여길자를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필요을 채워주는 관계전도는 가능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데 바로 긍휼이 여긴대로 긍휼히 여기는 복을 자신이 입는 다고 했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게 됩니다. 자신은 전혀 용서를 모르면서 용서받기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일만달란트 빚진 자는 그 엄청난 빚을 채주에게서 탕감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일백달란트 받을 빚은 강압하여 받으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탕감받았던 그 긍휼을 잃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긍휼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긍휼을 받을 수있겠습니까? 긍휼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긍휼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긍휼을 받아야할 존재임을 깨닫을 때 남들도 긍휼이 여기는 것이고 또한 긍휼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첫째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보상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겨 달라는 애원을 할 때 결코 모른 채 하시지는 않을 것을 우리는 확실히 믿습니다.
출 33: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히 베푸느리라"하셨습니다.
  삼상 23:21에서 사울왕은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했습니다.

  둘째로 자신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 자신의 마음에 증오를 담고 살거나 미움을 품고 살면 마치 발바닥에 숯불을 밟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면 자신의 마음에 평강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 곁에는 늘 좋은 이웃이 붙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살길이 생깁니다. 육이오 때 어떤 교사가 삼팔선을 넘어오는데 그만 공산군에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그 공산군이 옛날에 자기가 가르친 교사 였습니다. 그 공산군도 곧 알아보고 살길을 열어서 피난길을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교사가 제자를 가르칠 때 긍휼히 여기는 자세가 아니였다고 하면 어떻게 되었겟습니까? 아마도 앙갚음을 도리어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기 쉽상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만 있으면 원수를 만드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긍휼을 베푸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송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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