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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Ⅸ) (단 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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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하얼빈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헌트 선교사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일입니다. 경찰의 심문을 받으러 경찰서에 가던 중에 헌트 선교사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잡혀온 여러 성도들을 만났습니다.
헌트 선교사가 경찰의 조사를 받고 다시 형무소로 가기 위해 걸어오는데 약 20세 안팍의 한국 청년이 잡혀온 성도들 앞에 서있었습니다. 간수가 그의 오른쪽 손목에 매달려 있는 한쪽의 빈 수갑에 헌트 선교사의 손목을 채웠습니다. 그 청년은 선교사와 묶인 것을 무척 기뻐하는 듯했습니다. 헌트 선교사 역시 신앙을 지키려는 성도와 함께 묶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호송차로 갔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간수들이 차에 빨리 타도록 재촉할 때 청년은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저기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저의 아내입니다." 그때 모여 있던 무리 속에서 누군가가 "끝까지!"라고 소리쳤습니다. 끌려가던 사람들에게 끝까지 신앙으로 견디라는 격려였습니다. 헌트 선교사와 함께 묶인 청년의 아내도 다른 이들과 함께 소리쳤습니다. "끝까지!"
이 소리를 들은 청년은 밝은 모습으로 헌트 선교사를 바라보았다고 합니다. .
온 세상이 평온하여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믿음을 지키고 따라가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이 올 때 믿음을 지키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은 건너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나보아야 안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여기 바벨론에 와 있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도 시련이 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인 즉위 18년째로 추정되는 해에 금신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가 금신상을 만든 목적은 여타 제왕들과 다르지 아니 했습니다. 자신의 세력 확장을 과시하고 자신의 왕국의 영원성을 기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신상을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상을 바벨론도의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 시민 앞에 낙성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세계패권 제국인 바벨론은 모든 백성들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악기 소리가 들릴 때 자기가 만든 신상에 절할 것을 명했습니다.
여기에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겠다고 왕의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죽음의 칙령을 내리는 것을 감안할 때 이 행사가 모든 이들에게 가납되는 행사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다수의 사람들은 왕이 만든 금신상 앞에 절하기를 꺼려하고 있다는 것을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풀무불 칙령 앞에 그 누구도 왕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했습니다.

본문 3장 7절에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왕의 신상 앞에 절하지 아니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 가운데 유독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만이 예외였습니다. 참으로 이들은 엄청난 도전을 지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적인 왕의 칙령 앞에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계명 준수를 위한 일사각오 였습니다.

본문 3장 12절에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왕의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입니다.
출애굽기 20장 3-6절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참소했습니다. 이들은 유다사람들과는 원수입니다. 이들은 궁실의 동료들인데도 불구하고 유다사람들을 해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국법을 어긴다고 참소했습니다. 왕에 대해 불충한다고 참소했습니다. 공직자로서 직무유기죄로 참소했습니다.
환난 날에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1차적인 시련이 온 것입니다.

1) 이들의 행위에 왕이 분노했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라고 했습니다.

2) 왕 앞에 끌려갔습니다.
본문 3장 13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라고 했습니다.

3) 범법 행위를 확인하는 심문이 있었습니다.
본문 3장 14절에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라고 했습니다.

4) 현실과의 타협을 강요하는 시련이 왔습니다.
본문 3장 15절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현실은 항상 타협의 가능성을 지닌 좋은 재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마음이 약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므로 승리하셨습니다(눅 22:42-43). 십자가를 앞에 놓고 울부짖는 자식을 보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닙니까?

Ⅱ. 순교적 신앙에서 한 말입니다.

본문 3장 16절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왕의 조서를 포함한 모든 상황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왕의 생각과 자신들의 생각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접촉점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믿는 대로 행하고 배운대로 행동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경시한 나머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무례히 행하는 자들이 결코 아닙니다. 왕의 명령이 자신들의 신앙과 비교해 볼 때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어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절대 하나님 신앙이 절대 하나님 계명 준수로 성화된 것입니다. 여기서 양보와 타협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Ⅲ. 더 나은 부활에 대한 확신에 찬 말 입니다.

본문 3장 17-18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말 속에는 특별한 이적의 기대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9-30절에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몸을 가지고 살기 보다는 육신이 불타 없어져도 죄 없는 영혼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다는 저들의 순교적 신앙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에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5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첫재 부활의 완성인 영생하는 둘째 부활입니다 .
마침내 이들은 느부갓네살 왕에 의하여 자기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본문 3장 19-23절에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평일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라 하고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고 했습니다.

Ⅳ. 최후 승리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1) 사형집행 현장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 먼저 사형을 집행하던 군졸이 그 불에 타 죽었습니다(3:22).
(2) 세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3:25).
(3) 풀무불 속에 던져진 사람은 세 사람인데 한 사람이 더하여 네 사람이 되었습니다(3:25).
(4) 세 사람의 결박이 풀렸습니다(3:25).
(5) 전혀 상하지 않았습니다(3:25).
(6) 저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네 사람이 합세하여 불꽃 속으로 걸어 다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3:25).
(7) 네 번째의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신들의 형상을 입고 온 사람같이 보였다고 했습니다(3:25).
신들의 아들이라고 하는 데는 이견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견해와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라는 견해가 있으나 고전적 해석은 신약에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저들의 행위가 강성이냐 연성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적으로 무모하냐 지혜로우냐에 있는 것입니다.
저들의 강한 정면 도전이 저들을 최악의 사태로 몰아갔지만 그것이 진정 신앙적 행위일 때는 그 모든 것을 신앙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2) 풀무불 기적 이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 느부갓네살 왕의 충격적 고백입니다.
본문 3장 26절에 "느부갓네살이 극렬히 타는 풀무 아구 가까이 가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서 나온지라"고 했습니다.

(2) 왕의 신상에 절한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본문 3장 27절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3)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였습니다.
본문 3장 28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4) 느브갓네살 왕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사람을 구원할 신이심을 공포했습니다.
본문 3장 29절에 "그러므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하고"라고 했습니다.

(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더욱 높임을 받았습니다.
본문 3장 30절에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찰스 킹슬리는 제 갈 길을 아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비켜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현실은 예외 없이 그 본질적인 면에서 지난날 바벨론 역사의 재판입니다. 그리고 저 두라 평지의 풀무불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피부적으로 실감 있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온갖 유형, 무형의 풀무불이 우리 앞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불길, 우상주의의 불길, 쾌락주의의 불길, 세속주의의 불길, 국가 지상주의의 불길, 과학만능주의의 불길, 황금만능주의의 불길, 민족주의의 불길, 가족주의의 불길, 상대적 빈곤감의 불길입니다. 죄와 타협할 수 없다 하고 살아가는 기독신자들에게 평소보다 칠배나 뜨거운 무서운 불길이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뿐만 아니라 높아지기까지 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까지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언제나 살아 있는 주님의 기적과 같이 있습니다. 이 세상 역사는 결국 의인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의 현장에서 우리를 구해내지 아니하실지라도 더 나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결코 우리는 신앙을 배반할 수 없습니다. -아 멘 -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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